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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판타지 영화, 그리고 일상의 판타지.

최근에 본 영화들은 많은데,

또 이렇게 저렇게 써 놓고 싶은 얘기들도 많은데.

제대로 정리를 못했다.

어디 글을 하나 써 줘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부랴부랴 한밤중에 썼다.

좀 더 재미나게 쓰고 싶었는데... 아 요즘은 벽에 너무 빨리 부딪친다.

 

 



겨울, 크리스마스, 연말. 이 맘때가 되면 티비 속에서는 갑자기 어려운 이웃들이 등장하고 그들을 위한 성금 모으기가 진행된다. 좋은 일이고, 아름다운 손길임에는 분명하지만 언제나 이 시기에만 세상 속에 사랑이 가득한 걸 보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고, 따뜻한 손길도 언제나 내밀 수 있는 것일 텐데, 연말이 되면 다들 1년을 엉망으로 보낸 것을 반성하려는 것인지 모두들 착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갑자기 따뜻하게 변해버리는 것도 일종의 판타지가 아닐까.


쓸데없는 빈정거림으로 얘기를 시작한 건, 얼마 전에 보았던 두 편의 판타지 영화 때문이다. 판타지 영화는 겨울에 강세인 건지, 올 겨울만 해도 해리포터를 시작으로 나니아 연대기, 킹콩 등등 많은 판타지 영화들이 극장에 걸려있었다. 나는 그 중에 한 편인 ‘해리포터와 불의 잔’을 보게 됐다. 딱히 책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영화를 재밌게 본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해리포터 시리즈는 매번 보게 됐다. 그리고 덧붙여 얘기하자면 이번에 나온 ‘불의 잔’은 내가 본 해리포터 시리즈 중에서는 최고로 재미난 영화였다.

또 한 편의 판타지 영화는 ‘아빠가 필요해’라는 독립 애니메이션이다. 길이도 10분 정도이고, 투박한 목소리가 등장하는, 해리포터에 비하면 아주 작은 영화였지만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이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 어떤 것이 정말 ‘판타지’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해리포터는 볼거리가 풍부한 영화였다. 두 시간이 넘도록 영화를 보면서도 그렇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영화는 끊임없이 마법세계의 화려함을 보여주었다. 설명적이었던 지난 시리즈에 비해, 부쩍 커 버린 아이들은 미묘하게 심리를 드러낼 줄 알았다. 이야기는 풍부해졌고, 볼거리는 늘어났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나서 뒷맛이 영 씁쓸했다. 상상 속에서 그려진 마법 세계에서조차 여성들은 현실 세상 속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세계의 꽤나 큰 마법 겨루기대회의 3대 챔피언 중 유일한 여성인 플뢰르는, 몸에 딱 붙는 의상을 입고 고고하게 걸어다니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자신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동생을 대신 구해준 해리포터, 혹은 친구인 론에게 키스로 보답을 해 줄 뿐이었다. 일상을 그린다는 드라마나, 환상의 세계를 엿보게 해 준다는 이 영화나, 여성에 대한 굳어진 생각은 그대로였다.

‘아빠가 필요해’는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아빠가 필요해’의 주인공인 늑대는 미아자키 하야오의 영화 속에 나올법한 시골의 한 한적한 동네에서 글을 쓰는, 최근에 등단한 작가다. 그리고 어느 날, 처음보는 여자가 찾아와서는 당신이 아빠라며 6살 짜리 영희를 남겨두고, 멋진 주먹 한 방을 그에게 날리고 사라진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두 명의 여자가 더 찾아와 각각 토끼와 바다거북을 늑대에게 남기고, 역시 멋진 킥을 날리고 사라진다. 결국 늑대와 영희와 토끼와 바다거북, 그리고 늑대가 산에 올라가 잡아왔던, 냉장고 안에 들어있던 사슴의 이상한 가족이 만들어지고, 늑대는 영희를 위해 예전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아빠가 필요해’는 잔잔한 일상을 그리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이야기들을 보여줬다. 예쁜 여자의 공중 킥이나 채식 요리만 만들어주는 사슴, 그리고 색다른 형태의 가족까지. 이 영화를 보면서 판타지 영화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엄청난 스케일에 멋진 볼거리들도 좋지만, 진정한 판타지라는 건, 이렇게 정말 다른 세상을 꿈꾸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하고.


하나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해리포터를 보러 대한극장에 갔을 때의 일이었다. 같이 보기로 한 친구가 좀 늦어서 먼저 티켓을 끊고 기다리려고 매표소로 내려갔는데, 한쪽 구석에 예매 티켓을 찾는 무인 발권기가 몇 개 있었다. 그 쪽이 줄도 없고 한산하길래 그 앞으로 가서 티켓을 뽑고 있었다. 그 기계는 먼저 어느 사이트에서 예매를 했는지 선택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누르면 기계에서 지하철 티켓나오듯 영화표가 나오는 것이었다. 주민등록번호를 누르고 있는 중에 옆 기계에 한 노부부가 나타났다. -노부부 말고 더 멋진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 여하튼- 머리가 하얗게 세신 두 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나란히 서서는 그 기계에서 예매한 티켓을 찾으시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살피시며 화면을 누르자 할머니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주민등록번호를 틀리게 누르자, 늙으니 이 것도 잘 못하네, 하면서 호호 웃으시다가 열심히 번호 누르는 걸 도와주셨다. 난 그 광경이 너무 재미있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더 날 놀라게 했던 건 기계가 뱉어낸 영화 티켓! 영화 제목은 바로 ‘해리포터와 불의 잔’ 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일상의 판타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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