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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5월 27일이다

대부분의 동지들이 울산으로 가버린 오후,

노동자교육센터 운영위원회가 있었다.

참 오랜만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회의에 가면

건강이 부쩍 좋아진 박준성 선생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모처럼 <하종강의 노동과 꿈> 사이트에 갔더니(박선생님의 근황을 미리 살피려고^^)

김태훈 열사에 대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오라,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

박준성 선생님과 나는 함께 있었던 것이다.

(박준성 선생님은 투신 이후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나는 투신하던 광경을 오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낮에 회의장에서 만나 둘이서 그런 얘기를 처음으로 나누었다)

그 글과 김태훈 열사의 영정은 덧붙이기로 한다.

 

24일 밤 네오와 미류님을 만난 자리에서

술김에 잠시 떠올리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오늘 그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만났으니,

일체의 감상을 배제하고 무미건조하게 24년 전의 일을

간략하게 되새김질한다.

 

-81년 5월 27일이다.

-1년만에 광주는 다시금 뜨겁고도 치열한 이슈가 되었다.

-아침부터 학교는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일진일퇴 공방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엔 사복 차림의 경찰들이 잔디밭에 모여앉아 카드놀이도 하고, 그랬다.

-오후의 어느 시간, 모두들 녹초가 되어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말하자면 소강 국면이었다.

-어디선가 높은 곳에서부터 굵고 분명한 음성이 들렸다.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도서관 6층에서 지상을 향하여, 한줄기 굵고 선연한 빛줄기가 내려꽂혔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일순 침묵의 순간이 흘렀고

-그 낙하지점으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다음 순간, 그 곳을 향해 최루탄이 날아들었고

-잠시 학생들이 흩어진 사이에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보건진료소에서 들것이 달려나왔고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몸뚱아리, 그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싸움은 다시 시작되었지만 곧 끝났다.

 

-81년 5월 29일이다.

-자취방에서 조금 늦게 나섰다.

-1교시 수업에 약간 늦었다.

-강의실 밖에 학교버스가 두대 서 있고, 교수와 학생들이 실갱이를 벌이고 있다.

-소모임 활동에 열심이던 몇몇의 친구들이 저만치 도망쳐 갔다.

-약화학 교수와 학생담당 학장보 교수가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나는 맨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안양에 있는 유한양행 공장을 견학하러 간다고 했다.

-버스가 후문을 벗어나는 순간, 나는 맨 앞자리로 뛰어나갔다.

-두 교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늘은 김태훈 선배의 장례식 날입니다. 우리를 학교로 되돌아가게 해주십시오.

-너 뭐야? 학장보 교수의 싸늘한 반응.

-난데없이 수업을 팽개치고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너 영웅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약화학 교수의 무심한 목소리.

-나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했다. 나한테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쏟아지다니.

-교수들이 이윽고 약속을 했다. 안양까지만 가자. 그리고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

-그렇게 우리는 안양에 갔다가 곧 돌아왔다.

-학교는 이미 상황이 끝난 다음이었고,

-최루탄 매캐한 교문 안 잔디밭에서 누군가 초라한 우리 모습을 찍었다.

-그 사진 어딘가에 있다.

-아주 평범한 학생이던 나는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교수와 학생 모두에게 찍혔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해 가을 나를 서울을 떠나게 했고, 한학기 쉬게 했다.

-그 다음해부터는 5월만 되면 이른바 요주의 학생들은 교수와 함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나도 한번은 집에 가서 좀 쉬라고, 출석 신경쓰지 말고 쉬다가 오라고, 지도교수가 그러길래

-그러겠노라고 하고서 집에 내려갔다가 이내 학교로 돌아간 기억도 있다.

 

그 후로 숱한 죽음의 순간을 목도했거나 죽음 이후를 함께 서러워하면서

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것은 내 인생을 궁극적으로 결정해 버렸다.

말하자면, 80년 5월의 광주가 내 인생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 시기에 청춘의 한 시기를 보낸 사람이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든지간에 이미 광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하다.

나는 20대 초반의 어느날 우연히 어떤 사건을 마주하였고

그 이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노라고 하자.

 

고 김태훈 열사의 넋을 오늘에 다시 기리며...




 

선생님
  학생들에게 몇 번 <그의 20대>라는 책을 읽고 느낀 소감과 ‘내 20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구상해보라는 과제를 냈습니다. 열정을 다해 치열하게 살았던 29명의 20대 삶을 짤막짤막하게 정리한 책입니다. 선생님이 추천사를 쓰셨지요.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를 검토하다가 문득 제 20대를 돌아보았습니다. 박정희 유신 독재체제가 유신헌법에 대한 모든 비판을 틀어막으려고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1975년부터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계속되던 1984년까지가 제 20대였습니다.

  대학원에서 우리 역사를 공부하던 20대 중반 때 일입니다. 1981년 5월 27일 광주민중항쟁 1주기 주간을 맞아 학생들은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복형사들과 중무장한 전경들이 학생들을 건물 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규장각에서 고도서 해제작업을 하던 몇몇 국사학과 대학원생들이 학교 직원 행세를 하면서 도서관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언가 금새 터질 것 같은 긴장된 분위기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릴 것 같은 답답한 공기가 온 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오후 3시 무렵 도서관 꼭대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습니다. 건물 아래서는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몇 십 미터 저쪽 바닥으로 무슨 물체가 ‘퍽’하고 떨어졌습니다.
  
  도서관 6층에서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 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 외치고 몸을 던진 것입니다.

  정신없이 몇 걸음 달려가다 규장각 출입문 기둥을 끌어안았습니다.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 더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몰려들어 울부짖었습니다. 그 위로 전경들이 사과탄을 집어 던졌습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을 지도 모르는 몸체 위에 최루탄 가스 분말이 하얗게 덮였습니다. 저들은 학생들을 쫓아버리고 쓰러진 김태훈의 육신을 빼앗아 갔습니다.

  부들부들 떨며 그 모양을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온 몸이 뻗뻗해졌븐디. 그 날 저녁 신림동 술집에서 술병과 술잔을 얼마나 집어 던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뒤에도 도저히 공부할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놈의 세상에서 공부는 해 무엇에 쓰랴 싶었습니다. 공부를 때려치우리라 마음먹고 운동하는 선배들을 찾아가 할 일을 찾았지요. 선배들이 저를 달랬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공부하는 사람도 필요해. 분통이 터지겠지만 꾹 참고 공부해. 나중에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이 많을 거야


  광주에서 ‘꽃잎처럼’ 스러져간 수많은 젊은 넋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 김태훈의 죽음은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 눈 팔지 말고 더욱 긴장하라는 아픈 채찍이 되었습니다.  

  규장각에서 책을 보다가도 김태훈이 떨어진 자리를 내다보면 오랫동안 가슴이 두근거리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가 어디쯤인지 떠 오릅니다.

그 다음 해 3월 막 공해운동을 펼치던 최열 선배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지요. 고문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인데도 선생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꾸짖었습니다.


   이 땅의 팔팔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은 어찌하여 결혼을 하면 훌륭한 남편과 착한 아내로 전락하느냐


  저도 새파란 나이에 후배나 제자 주례를 서면서 선생님이 하셨던 이 말을 그대로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말에 기대 남편노릇 아빠노릇 제대로 못하는 저를 변명하기도 합니다. 달팽이 껍질 같은 가정 속에 또아리 틀고 안주하려는 노동자들의 가족이기주의를 꾸짖기도 합니다.

  1984년 2월 석사논문을 내고 8월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인 대학강사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와 함께 선배들이 말하던 ‘공부 가지고도 할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시집 <젊은 날>에서 이렇게 하셨더군요.

   나는
   일생을
   저 가난의 근원과 싸우리라 하고
  
  제가 작정한 일은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것을 주인들에게 돌려주는 노동자 민중교육이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역사가 역사의 주체인 노동자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 무기로 쓰여야 한다고 다짐했습니다. 햇수로 따져보니 2002년 올해 19년째입니다. 그 동안 제 뜻으로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은 없었습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새롭게 불려지는 민중가요를 부지런히 따라 불렀습니다. 어느 곳에서든 민중가요를 함께 부를 수 있는 것도 운동성을 잃지 않는 방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가운데 1980년대를 넘어 1990년대를 지나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불리는 노래가 바로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1981년은 광주민중항쟁을 꼼꼼히 따져가며 새로운 운동을 모색하는 해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1980년 5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하며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습니다. 술에 취하면 ‘보고 싶은 얼굴’을 부르며 흐느적거렸습니다.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1982년 2월 광주 지역의 연행 예술 운동패가 노래 굿을 만들었습니다. 시민군 대변인으로 끝까지 도청을 지키다가 5월 27일 새벽 목숨을 잃은 윤상원 열사와 들불 야학을 같이하다 연탄가스 사고로 먼저 숨진 후배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 굿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들어있었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 선생님의 시집 <젊은 날>에 들어 있는 ‘가신 님’ ‘우리들의 합창’ 같은 시들이 떠오릅니다.      


  고개 들면 네 귀퉁이
  팍삭 꺼지는 무덤가
  사랑도 명예도
  흙 한 줌 남김없이
  한평생 달구자던
  피맺힌 통일에의 의지가
  예까지 왔는가 일러주던 그 님아

  동지는 간 데 없고
  푯말은 쓰러졌는데
  장부의 맺힌 이슬
  어디에다 뿌릴꼬

  쇠북은 찢어져
  바람은 증언인양
  일제히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삼천리 휘어감은
  백옥 같은 흰 구름
       ‘가신님’

  .............................

  이제는 가나니
  벗이여 결코 흔들리지 말라
  세상살이 무거운 짐
  허리가 휘어도
  나는 가나니
  벗이여 결코 뿔치지 말라
  우리들의 합창
  구천에 사무치는 우리들의 합창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우리들의 합창
  갈수록 우렁찬 우리들의 합창
      ‘우리들의 합창’


  백기완 선생님!
   저는 20대를, 열정과 격정의 1980년대를, 한 치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살지는 못했습니다. 학문과 운동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을 겪으면서 괴로워하고 흔들렸습니다.
 
  20대를 보내고 30대에 접어들었을 때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을 혼자 종주하고 무등산을 넘어 망월동을 찾았습니다. 지금은 구묘역이 된 광주 5월의 무덤들 앞에 술을 따르고 엎드려 ‘전진하는 5월’을 흐느껴 불렀습니다.


   저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 가로질러
   ......
   물러서지 않으리
   사슬 끊고 전진 하는 오월 오늘은  
   물러서지 않으리
  

   한 여름 망월동의 땡볕 아래서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으며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목이 쉴 정도로 끝까지 마음껏 울었습니다. 막혔던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다짐을 하며 광주를 떠났습니다.


  그래, 이제 그만 ’광주‘에 대한 자책감에서 벗어나자.
  대신 결코 안주하지 말자.
  편안하게 살지 말자


그리고 1987년 6월항쟁과 7.8.9 노동자 투쟁의 회오리바람은 광주에 대한 회한을 좀 더 쓸어안고 갔습니다.

  선생님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들어 전국 200여 개가 넘던 노동자 민중운동 단체들이 노태우정권의 탄압과 운영난으로 빠르게 간판을 내리고 문을 닫았습니다. 동구 사회주의권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소련연방이 해체되는 상황도 한 몫 했습니다.

  ‘세상과 대중이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는 말이 현실보다 더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운동이 끝났다고 고백하며 보따리 싸들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이 절박하여 떠나는 사람들이야 어절 수 없었지만, 자본과 권력의 앞잡이가 된 자들이 웃으며 다가와 악수를 청할 때면 열불이 치솟았습니다.

  그런 날이면 술에 취해 휘청 거리며 밤길을 걷다 이런 노래를 부르며 욕을 해대기도 하였습니다.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 에라이, 씨발놈들아  


  남아 있던 단체들도 강의를 가보면 서너 사람만 앉아 있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강좌를 준비한 사람들은 더 가슴이 아팠겠지요. 저도 속이 상해 7년 끊었던 담배를 그 즈음 다시 피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제가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 강의하던  해방 사회로 가는 길과 상이 과연 맞을까 하는 회의가 밀려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 공부와 노동자 민중교육을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것도 아니었고, 노동자 민중의 고통스런 현실이 바뀌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은 역사의 산물이며 결과이므로 현실을 이해하고 바꾸려면 역사의 거울과 등대는 더 필요했습니다.

   남들이 어디로 가든 눈치 볼 것 없이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대로 살아 갈 것이고, 그것이 세상을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의심할 뿐 아니라 흥미까지 잃고 떠나는 대중을 예전과 같은 방식만 가지고는 불러 앉히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흥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영상 매체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좀 더 효과 있게 강의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리저리 고민하였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는 역사, 느낄 수 있는 역사 교육 방식을 찾아야 했습니다.  역사극도 해보고, 주제를 발표하고 토론하게 하는 방식을 써보기도 하였습니다.

  전체 강좌에 역사가 한두 번 들어 있는 대중교육에서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노래를 불러가며 근현대사를 훑어보기도 하였고, 역사를 좀 더 생생하고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역사기행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시도 끝에 도달한 방법이 사진 슬라이드, 시. 노래 테이프, 비디오테이프 같은 시청각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92년부터 사진기를 들고 슬라이드 사진을 찍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번을 넣고 빼고 순서를 바꾸어 가면서 정착한 것이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입니다.

  광주민중항쟁 부분을 강의할 때 꼭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개하곤 합니다. 1982년판 <젊은 날>에는 넣지 못했던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뛰우는)’의 다음 부분을 목소리 높여 낭송하기도 합니다.


  벗이여
  민중이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져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선생님 목소리를 흉내내며 소리 높여 외워주곤 했지요.

  IMF 구제 금융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노동자 민중의 삶과 운동이 휘청거렸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스스로 보람 있고 사회에서 쓸모 있으며, 누구나 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해방 공동체에 대한 꿈과 희망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놈의 세상이 밀어낼수록 더 캄캄한 수렁일지라도 한 발자국만 더 밀어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쓰러지더라도 단 한 치만이라도 더 밀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20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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