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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막차를 타고 와서 24시간 문을 여는 할인점에 들러서 계란, 콩나물, 간고등어, 훈제굴, 바나나, 청포도, 요플레와 요구르트, 과자, 레몬차, 코코아, 꽁치통조림, 식용유, 로션 따위, 지난 주말 가족나들이 때문에 미처 챙겨두지 못했던 반찬거리와 간식거리들을 뒤늦게 장만하는데 1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것만 보면 엄청나게 집안일을 잘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설 연휴가 지나고 나는 하루 걸러 하루씩 외박했고 그 사잇날은 밤 늦게 귀가했다. 민주노총과 연맹의 밤샘 회의와 줄지은 부고장들 틈에 끼여서, 정성들여 반찬을 만들어본지 여러날 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지난 설에 어머니가 가져다 준 수삼 뿌리가 냉장고에 있다는 기억이 살아나서 오자마자 찾아봤더니 다행히 아직 썩지는 않았기에, 한밤중에 인삼 한뿌리 어적어적 씹어먹다가 청포도 한줄기 씻어서 껍질째 먹어치운다. 수삼의 씁쓸한 맛은 변함없는데, 내 고향 유월은 어쩌고 하던 청포도는 간데 없고 미국이나 칠레 어드메쯤에서 왔을 타원형 청포도의 맛은 단듯 쓰다. 내일은 연맹 정기대의원대회라서 하루종일 회의에 매달려 있겠다. 모레는 과기노조 합동간부 수련회가 있고, 그 다음날은 시민참여연구센터(참터) 총회가 있고, 토요일에는 서울에서 집회와 결혼식, 밤중에 대전에 와서는 교육을 하나 해야 한다. 바쁘게 사는 것 같지만, 일은 제대로 하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매사 여유를 즐기지도 못하여, 지난 가을에 이혼했다는 고교 동창은 심심하면 한번 보자고 전화가 오는데 뚝섬에서 강남갈 짬을 내지 못하고 집으로만 전화를 두번이나 했다는 또다른 친구의 소식을 아내에게 듣고서도 전화 한번 할 생각을 못하니, 시나브로 내 일상이 푸석푸석한 사과속살이나 골다공증에 걸린 뼈세포처럼 실속없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 잠을 좀 자고 나면 모든 게 새로워지리라, 오늘도 믿어보자 믿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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