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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남구 서초동의 한 오뎅집에서

중년의 사내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여섯 명 중에서 네 사람은

한 때 시국사건이니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해서

감옥에 다녀온 전력이 있고,

그 중에 둘은 우연히도 같은 감방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무엇을 하느냐,

한명은 돈 좀 버는 회사의 CEO입니다.

그 전날 사장을 짜르고 맘이 안되어 밤새 술 마셨다고 합니다.

한명은 변호사입니다. 서초동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요즘 사업을 연예인 관련 법률 자문역까지 확대하고 있나 봅니다.

한명은 감정평가사입니다. 땅 좀 있거나 건설회사 개발책임자쯤 되는

사람을 많이 알면 돈 좀 되는데 저같은 사람만 알고 있으니 쉽지 않다고 합니다.

한명은 의사입니다. 도립병원의 내과 과장으로 있는데 연봉 1억쯤 되나 봅니다.

골프도 치고 중국어 공부에도 빠져서 여가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래도 선거 때나 세액공제사업 때 민주노동당 후원하라면 곧잘 합니다.

한명은 꽤 이름난 좌파 활동가입니다. 그 중에서는 저하고 가장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분이지요.

한명은 저입니다. 임기가 끝나고도 노조 사무실로 출근한다고 했더니 의사 친구가

그럽니다. 월급은 나오냐?

 

이런 자리에서 정치얘기 나오면 좀 짜증이 납니다.

의사친구가 그럽니다.

-난 민노당에 정치기금 내고 그랬는데 요즘 하는 걸 보면 별로 의미없이 느껴진다.

-....(당원인 나도 짜증이 난다)

감정평가사 선배가 말합니다.

=100프로 잘하는 당이 어디있나? 그래도 한나라당 비하면야 백번 낫지.

 

의사가 또 얘기합니다.

-내가 정치하고 담쌓아서 하는 얘기이기는 한데 노무현이 가장 잘하는 것 같더라.

제가 바로 한마디 합니다.

=니가 정치하고 담쌓았기 때문에 노무현이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나는 노무현 같은 사람이 한번 더 했으면 좋겠다. 유시민이 나오면 후원금 낼

생각이다.

 

설왕설래가 이어집니다. 변호사가 한마디, 유시민은 독선적이라 절대로 안된다.

.....김근태처럼 세계관이 어느 정도 확립된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노무현이나 유시민

이나 변변한 세계관도 없이 개혁 어쩌고 하니까 도리어 갈팡질팡하는 거고 인정받을

수 없는 거다.

그러고 보니 모인 사람 중에 두 사람인가는 유시민하고 친구사이쯤 됩니다.

 

이렇듯 나온 얘기들을 다 줏어모아도 별 볼일 없습니다.

강남에 눈 펑펑 내리던 저녁에

저는 이렇게 오랜만에 옛 친구들(선배들) 만나서

옛 추억을 더듬으며 술을 펑펑 마셨습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나요. 학교 다닐 때 모두가 저의 귀감이 되고 저를 이끌던

사람들이었는데, (의사친구 얘기를 빌면) 지금은 먹고 살만 하니까 여유가 생기고

몸도 좋아지는 것 같다고 하고, (제가 보기로는) 그러면서 한 때 치열했던 변혁을 향한

열정은 다 사그라지고 만 것 같습니다.

 

CEO 선배한테는 기왕에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노릇 하라고 주문한 적 많았고

(그렇게 해 오기도 한 사람이지요),

의사친구한테는 이제부터 좀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하라고 주문할 생각이었는데,

좀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그냥 술만 마셨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드는 사이에 시나브로 노동조합의 낡은 관료쯤으로

되어가고 있은지도 모르겠다 싶은 생각이 들때마다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어제 술자리는 그런 저를 한번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하고

내 안에서부터 질타하는 자리였던 것 같습니다.

 

음, 이 글은 어제 모인 사람들을 나무라기 위해서 쓴 게 절대로 아닙니다.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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