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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날의 삽화

1.

날씨도 춥고 눈까지 온다고 했다. 밥솥을 열었더니 식은 밥이 충분히 남아 있다. 밥을 새로 지어 도시락을 싸야 하는데 콘센트를 꽂고 그냥 보온모드로 전환했다. 간밤에 다시마와 무까지 넉넉하게 넣어 시원하게 끓인 콩나물국과, 어제 아침에 도시락 반찬으로 싸고 남았던 무생채를 꺼내어 아침밥을 배불리(!) 먹었다. 겨울이 지나고 있음인지 7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 사위가 제법 밝다. 겨울이 다가고 있구나. 서울 출퇴근이 익숙해질수록 더이상 기차시간에 쫓기지 않고, 매사에 여유가 있다.

 

2.

그래도 잠은 늘 부족하다. 새벽 4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다가 3시간(90분의 수면주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편임. 즉, 3시간, 4시간 30분, 6시간으로 수면시간을 설정함)이라는 최소 수면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손전화의 알람으로 깨어난 터에 밥까지 충분히 먹었으니, 오랜만에 차를 타자마자 잠을 청했다. 깨어나니 한강을 지나고 있다. 눈이 내린다. 갈매기가 끼루룩 끼루룩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황지우의 어떤 시를 떠올린다. 세상 밖으로 날아오른 새들이 눈이 되어 돌아오는건가. 

 

3.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눈보라가 매서운 현실이 되어 몰아친다. 옷깃을 급히 여미고 지하철로 뛰어드니, 거기에는 이미 인산인해. 인천행 전철이 어찌된 영문인지 역주행을 하고 있다. 어-랍-쇼? 다급한 안내방송이 이어진다. 죄송합니다. 고장난 전동차를 견인하고 있습니다. 남영역쪽으로 가려했으나 눈이 오고 경사가 심해서 반대쪽으로 견인하고 있사오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사내는 그렇게 되풀이하며 외치고 있었고, 까맣게 불꺼진 창들이 거꾸로 달려가고 있었다.

 

4.

서울역 지하에서 달리던 전동차에서 합선이 되어 불이 났고, 전철이 멈췄단다. 사고 시간이 7시 20분이라 했다. 그리고도 한시간 후에야 내가 그 광경을 목격했으니, 무려 1시간 이상 출근길의 서울특별시민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나 보다. 나비의 날개짓 하나로도 서울은 얼마든지 사람들을 죽였다 살렸다 하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는 제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타고, 시청앞에서 한번 더 갈아타고, 사무실에 무사히 제 시간에 도착했다. 눈이 아무리 내려도 그 곳만 벗어나면 황량한 겨울 벌판임에야.

 

5.

사무실에 들어서면 눈은 딴 세상 일이다. 서울역 화장실, 소변기와 소변기 사이 바닥에 둘러앉아서 이른 아침부터 깡소주를 마시고 있던 노숙인 동지들은 이 추운 낮에 어디에서 몸을 쉬고 있을까. 노조 만들고 처음으로 상경집회를 하고 있는 학교비정규직노조 동지들은 모두가 차창을 꽁꽁 닫고 쌩쌩 지나칠 광화문 허허벌판에서 누구에게 쌓인 분노를 내던져야 하나. 국회 앞에서 최저임금 50%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을 동지들은 세찬 눈보라도 대한민국의 최저임금보다는 차라리 덜 춥다고 생각할까. 여러 곳에 동지들을 보내 놓고서 이런 쓸데없는 감정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나.

 

6.

3월 2일에 연맹 정기대의원대회가 예정되어 있다. 지난 해의 사업을 평가하고 올해 할 일들을 계획하고 대중적으로 합의를 모아가는 과정이 참 지난하기만 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투쟁과 교육과 회의와 간담회와 집회로 사무처의 상근 간부들이나 임원들이나 모두 정신없는데, 내가 떠맡아야 할 일주일치의 버거운 일정과 숙제(내일까지 1천페이지에 달하는 문건을 모두 읽어치워야 함)를 앞에 두고, 이처럼 한가한 독백이라니! 눈은 잠시 그쳤지만, 하얀 눈길이 이 동네에는 그래도 남아 있네.

 

7.

싱거운 덧글 하나. 지하철에서 나이든 광신도 둘이 얘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무어라 무어라 결의하는 듯하더니,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 팔뚝을 한번 내지르며 "승리합시다!" "아멘!"이었다. 푸하하. 투쟁하는 동지들이여, 모두 함께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자, 하고 외치려다 보니 요즘 우리끼리 싸우는 곳이 워낙 많아서 누구를 응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동지가 회의하러 간다면서 방금 팩스로 받은 문건 하나를 던지고 간다. <민주노총 대의원들께 드리는 호소문> "기만적인 '사회적 교섭안'의 폐기를 촉구한다!" 이게  또 누구냐, 어디 보자, '사회적 교섭안' 폐기를 촉구하는 교수들이로구나. 두둥 둥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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