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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5/26
    유감(8)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9/05/23
    유서(10)
    손을 내밀어 우리

유감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유서] 에 관련된 글.

 

=미디어충청(http://cmedia.or.kr)에 오늘 기고한 것.....

 

 

민주노총 지도부 조문 유감

다시 두 통의 유서를 아프게 읽으며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40대의 후반에 작고한 어느 문학평론가의 말은 죽음이 갖는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서 죽음을 애도하는 정치, 사회적인 근원을 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하나의 소중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며, 그의 육체가 완전히 지상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래서 추모의 열기는 그에 대한 기억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뜨겁고, 또한 그의 죽음이 그 시대의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더욱 커지거나 줄어든다. 젊은 연예인의 자살이나 전직 대통령의 죽음이나, 그런 의미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니까 지금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한 국민적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열광하고 그에게 표를 던졌던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큰 충격이고 슬픔일 수 있으며, 누구라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애도할 수 있다. 비록 모양새는 자살이지만 많은 국민들은 ‘살아있는 권력이 죽은 권력을 괴롭혀서 살해’했다고 믿고 있으며 서슴없이 그렇게 말하고들 있다. 더 부패한 정권이 전직 대통령의 ‘옥에 티’를 압박하여 못 견디게 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대중적인 공분은 이명박 정부 아래 자신들이 15개월여 동안 겪은 핍박과 굴종의 경험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응축하고 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죽은 대통령의 유령이 현실 정치를 움직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을 목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2004년 탄핵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를 심각하고 강력하게 양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른바 인물 중심의 ‘3김 정치’ 시대를 종식하고 탈권위주의의 시대를 열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 내부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구축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민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은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다. ‘노무현’이냐 ‘이명박’이냐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이 봉하 마을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 아닌가. 양 극단의 사이를 채우고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 특히 노동운동진영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급변하는 흐름에 동요하거나 휩쓸리지 말고 중심을 제대로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최근 수년간 민주노조진영은 상층부의 잇따른 비리와 성폭력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 부각되었고, 정부와 언론의 민주노조 죽이기 공세는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그 집요한 공격이 일정하게 성공한 것일까, 현 시점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조운동은 안타깝게도 노동자 민중의 희망이 아니며, 미래의 대안도 아니다. 이러한 때, 범국민적인 추도의 열기가 아무리 뜨겁더라도 노동운동진영이 그것에 편승하여 섣불리 부드러운 화해의 손길을 내밀다가는 악수와 공감을 얻기는커녕 내부의 상처를 헤집고 억울함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

“한 소중한 생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늘, 그것도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크게 진척시킨 전직 대통령인데, 애도 성명도 내지 말고 조문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혹여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말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인 추모의 열기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떤 누구라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진영이나 민주노조진영이 조직의 이름을 걸고 죽음에 대한 예의를 빌미로 자기 조직의 정체성을 해치는 행위를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역대 정권에서 죽어간 수많은 혼백들을 일일이 불러대지는 않더라도, 용산참사로 숨진 시민들 5명의 비통한 외침과 정권의 탄압에 자결로 맞선 노동자 박종태의 처절한 절규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다. 온 국민의 애도에 둘러싸인 전직 대통령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더 바치는 것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외롭게 떠돌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영혼을 달래고 그 뜻을 기리고 이 땅 위에서 구현하는 일이다.

나는 민주노조운동의 간부들에게 ‘특별한 사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가 남긴 유서를 다시 읽어 보라고 감히 권한다. 온 국민이 애도하는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한 개인의 상처와 고통만이 크게 차지하고 있지만,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이 땅을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 민중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국익을 내걸고 이라크 파병을 감행하고, 비정규악법을 강제하고, 한미FTA를 밀어붙였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결단이 국익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는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강조하고 그것을 죽음으로 실천했다. 나는 감히 주장한다. 유서를 통해서 나타난, 죽음을 앞둔 두 사람의 자세로 견주어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였지만 ‘특별한 사람’은 그저 평범한 개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난 이 땅 소수의 ‘특별한 사람’보다 다수의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이끌고 가는 것이라고 또다시 확인한다.

노파심에 한마디 더 하겠다. 혹시라도 민주노조의 이름으로 봉하 마을에 가거들랑, ‘특별한 사람’에 대해 남몰래 보냈던 경외심은 버리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과 함께 하는 새로운 투쟁에 대한 다짐과 각오를 단단히 벼리고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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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1.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2009. 5. 23. 05:21)

 

2.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적들이 투쟁의 제단에 재물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잃을 수 없었습니다.
저의 육신이 비록 여러분과 함께 있진 않지만, 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 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악착같이 싸워서 사람 대접 받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큰 나라를 반토막내서 배부르고 등 따신 놈들 미국과 극우보수 꼴통들이 이번 참에 아예 지네들 세상으로 바꿔 버릴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는 실종된 지 오래됐고,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거나 고분고분 노예로 살라고 합니다.

그 속에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안락만을 위해서 투쟁할 것이 아니라 통큰 목적을 가지고 한발 한발 전진하기 위해 손을 잡고 힘을 모으는 적극적이고 꾸준한 노력과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자의 생존권, 민중의 피폐한 삶은 사상과 정견을 떠나서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고,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 민중은 이론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세상을 바꿀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최소한 화물연대 조직이 깨져서는 안 된다는 것, 힘 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지 43일이 되도록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눈을 감으면 깜깜할 겁니다. 어떻게 승리하는지 저는 보지 못할겁니다. 그것이 아쉽고 억울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이런 식의 선택을 해야 되는지, 그래야 한 발짝이라도 전진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속상하고 분합니다.
이름을 거론하자니 너무나 많은 동지들이 떠오릅니다.
저를 이만큼 건강한 간부로 활동가로 있게 해 준 소중한 분들. 저를 믿고 따라 준 형님, 동생, 친구들. 이 의미있는 투쟁, 힘겨운 투쟁에 끝까지 남아 준 동지들 모두가 저에겐 희망이었습니다.

광주라는 곳도 사랑합니다.
날고 싶어도 날 수 없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행복하고 서로 기대며 부대끼며 살아가길 빕니다.
복잡합니다. 동지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면서 그 속에 저도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 올림.

(2009. 5. 3. 자결 확인된 이후 발견됨)


3.

'특별한 사람'의 유서가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를 뒤덮고 있다.

 

'특별한 사람'의 유서에는 개인의 상처와 고통이 크게 드러나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의 유서에는 조직(공동체)의 상처와 고통이 오롯이 배어있다.

 

'특별한 사람'은 

언제나 국익을 외쳤지만 국익을 위해 목숨을 저버린 것 같지는 않고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국익의 근본이 노동자 민중의 삶에 있음을 외쳤고 죽음으로 실천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전복의 역사 앞에서

나는 모든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관과 무덤에서 되살아와서

산 사람들과 어울려

전복되지 않는 오늘의 역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것을 꿈꾼다.

 

'특별한 사람'의 죽음이 미구에 태풍처럼 세상을 휩쓸고 가더라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듬고 지키며 우리는 그저 싸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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