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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검진하다가 작업환경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사십 오 명의 검진 인원 중 세 명만이 특수검진을 받았는데, 성분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화학물질을 취급하고 있었다. 그 업종은 워낙 알려지지 않은 유해인자가 많아서 국내 산업안전보건법이 무용지물이다시피 하다. 그날은 몸 상태도 안 좋고 산업위생사와 함께 공정을 둘러볼 필요가 있어서 따로 날을 잡으라 했다.
오늘 오후에 그 회사를 방문했다. 일에 짓눌려 괜히 무리하게 일정을 따로 잡았다고 약간 후회를 하면서 갔다. 회사 담당자는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현장에 들어갔다. 방진복을 입고 두 번의 에어샤워를 거치고 해당 공정에 가서 둘러보았다. 가장 년차가 오래되었다는 여성 노동자는 4년차였는데, 공정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해 주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화학물질이 담긴 50cm정도 깊이의 20Cm*30Cm 가량의 넓이의 세척조에 제품을 담구었다가 빼는 일을 수동으로 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다른 작업을 하고 있어서 별로 냄새가 난다던가 하는 것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30분 IPA를 천에 묻혀 장비를 닦는데 그 때는 냄새도 심하고 머리도 좀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방독마스크는 쓰지 않는단다. 회사에서 지급한 방독마스크는 얌전히 작업대밑에 놓여 있었다. 사실 이 회사전에 이 장소에서 작업했던 회사는 비슷한 공정을 가지고 있었고 몇년전에 청소를 할 때 화학물질에 심하게 노출되어 이런 저런 증상이 생긴다는 호소가 있어 내가 작업자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한 적이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장비의 겉면을 떼서 주기적으로 외주를 주어 청소를 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회사의 작업자들은 옛날만큼 심각한 화학물질 노출은 없다 한다. (외주업체의 세척작업자들은 아마 호소할 데도 없는 환경에서 일하겠지)
다음으로 검사 및 조립공정을 보겠냐하고 담당자가 물어서 엑스레이가 있냐 물었더니 없단다. 몸이 무거워서 그냥 빼먹을까 하다가 아니지, 자고로 산업의학 의사란 엉덩이가 가벼워야지, 하고 들렀다. 방진복을 또 입으라 해서 미적거렸더니 담당자가 그냥 들어가라고 하더라. ㅎ. 제품의 물리적인 특성을 검사하는 곳이었고 작업자들은 앉아서 모니터를 보면서 작은 도구를 사용해서 제품에 전기가 통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작업대가 좀 높다 싶었는데 어떤 사람이 두꺼운 스폰지를 두 장을 깔고 거기에 팔꿈치를 기대고 일하고 있었다. 물어보니 역시 집에 가서 쉬어도 증상이 계속될 정도로 어깨가 자주 많이 아프단다. 그래서 어깨를 들고 있는 자세를 피하려고 스폰지를 구해서 받쳐놓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전체적인 자세가 비뚤어져 허리가 아플터.
이 작업을 어떻게 바꾸면 일을 하시기가 좀 편하시겠어요? 하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웃는다.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봐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옆에서 일하던 사람이 말한다. 작업대가 너무 높고, 발의 여유공간이 부족하고..... 세 네명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뾰족한 답은 없었다. 교과서적으로는 높낮이 조절이 되는 작업대와 의자가 필요하고, 모니터와 눈의 높이는 수평, 어깨와 몸통의 각도는 30도 이내로 작업대를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니터 보고 손 보고 하느라 목의 반복작업이 생긴다. 흠흠...
작업장을 둘러보고 나서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좀 보자 했다. 그걸 가지러 간 사이 그간의 보건관리대행일지를 산업위생사의 업무일지를 중심으로 주욱 훑어보았고, 몇 가지 비교적 쉽게 개선할 수 있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권고했으나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업장 담당자가 물질안전보건자료를 가지고 왔고 우리 산업위생사와 나 이렇게 셋이서 토론결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주의해라하는 정도가 아니라. 특히 물질안전보건자료를 읽어보면 대부분의 성분이 영업비밀이다. 발암물질이 들어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어떤 물질의 구성성분은 95%가 영업비밀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업환경측정결과가 괜찮기 때문에, 영업비밀의 진짜 의미를 이해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작업을 안전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측 담당자왈, 시간이 없다. 일찍 끝나야 아홉시이다. 전에는 교대근무를 했었는데 그걸 없애고 장시간 노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옆에서 산업위생사가 방문할 때 마다 십분 십오분이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주세요 한다(아이고, 말하는 게 정말 이쁘다). 결국 물질안전자료 교육을 하기로 하고 자료를 이메일로 받기로 했다. 우리는 준비하고 있다가 일이 적을 때 연락하면 와서 교육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2. 작업자의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자동화가 필요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이었다. 그래서 세척조에 제품을 담굴 때 길고 두껍고 가벼운 손잡이를 이용해서 가급적 호흡기와의 거리를 멀리 하고 세척하는 동안은 세척조의 뚜껑을 닫아서 불필요한 노출이 되지 않도록 하자고 권고했다. 이 의견은 우리 산업위생사가 낸 것인데,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품특성상 환기도 세게 하지 못하는 상황일텐데, 이런 최소한의 조치라고 하셨으면 좋겠어요. (이 대목에서도 우리 산업위생사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예쁘게 보였다).
3. 검사 및 조립공정 노동자들의 어깨 통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대 설계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제시했다. 이건 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고 성의가 필요한 일이니 잘 이야기하면 개선이 가능한 문제.
2, 3번에 대하여 사측 담당자는 작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나서 작업장 개선에 대해서 보고해보겠다고 했다. 나오면서 재차 당부했다. 다른 업무도 많고 해서 보건쪽에 신경쓰시기 어려운 것을 잘 알지만,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딸같은 여성 노동자들이 세월이 흘러 암과 같은 나쁜 병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산업위생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기관에서 오년동안 정규직으로 일하다 우리 병원에 비정규직으로 온지 몇 달 된 이었다. 관점도 좋고 열심히 일해서 이쁘고 고마운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걱정이 많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안타깝다. 더군다나 여자 산업위생사가 버젓한 직장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회사의 보건관리자로 일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자격증도 더 많이 따야 하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해야 하는데, 일을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서 책만 쌓아놓고 있다며 배시시 웃는다(아무리 보아도 예쁘잖아!)
오늘은 꼭 경비원의 과로사와 건설 노동자의 폐암에 대한 업무관련성 평가서를 써야 한다. 내 방에 돌아와 쌓인 서류더미를 보니 약간 숨이 막힌다. 그래도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엉덩이도 더 가볍고 뇌도 더 가벼워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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