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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강령에 대한 단상

이번 총건 결과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 결과를 좀 신빙성있게 내다보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뿐만 아니라 수많은 징후와 흐름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하찮은 토크쇼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그에 대한 관중의 반응 등에 이르기까지 민심이 어디로 쏠리고 있는지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정보’와 단절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각 정당의 강령을 한번 읽어보았다. 근데 새누리당 강령이 가장 신선한 느낌을 준다. 철학적 수고가 보이는 일목요연한 흐름이다. 골빈 좌클릭이라고 일축하고 넘어갈 수 없는 강령인 것 같다.  명쾌하고 설득력이 있다.  „국민 행복“이란 큰그림에 굵직한 획들을 „국민과의 약속“으로 배치하고, 그 약속을 이행하는 방법으로 조화와 통합이라는 실천규범을 내놓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생각나게 한다. 특히 [보수]정치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행복’(eudaimonia)과 ‚중용’(mesotes)을 반영한 강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가 진정 지향했던 것이 복지국가였고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박근혜가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것“을 추구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으로 돌아가 보면 이건 산수적 혹은 기하학적으로 계산되는 정체적인 ‚중간’이 아니라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관계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시도라고 봐야 할 것 같다. 현재 상황에 적용해 보면 자본과 노동간의 대립관계가 첨예화된 역동적인 상황에서 자기자리를 찾으려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정책정당, 국민정당, 전국정당으로 거듭 태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근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립구도 („성장과 복지“, „자율과 책임“ 등등)를 이야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활쏘기 비유를 들어 그랬듯이 은연중 아무나 최종목적인 „행복“을 제대로 겨낭하고 실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립구도에 있는 세력에게 „행복“문제를 맡길 수 없고 이런 대립구도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만, 즉 특정한 엘리트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강령“이란 특이한 강령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엘리트의 몸가짐(hexis)과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맑스적으로 이해하자면 계급간의 대립을 부동하는 제3의 뭔가 – 심판자, 중재자, 정부, 국가 등등 – 만이 „행복“을 담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계급간의 대립이 첨예화될 때마다 벌어지는 양상이다. 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강령이다. 이런 부동하는 제3의 세력이 막판에 가서는, 독일에서 보았듯이, 파쇼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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