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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마음과 생각이 흐름을 타고 있다. 일상생활과 거의 단절된 상태다. 이젠 다시 또 며칠 흐름을 단절해야 하고 일상생활로 나가야 한다. 잊지 않게 몇가지 정리한다.
1.
관심(關心)의 한문을 찾다가 관심(觀心)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전자는 Interesse로 쉽게(?) 번역되는데, 후자의 적당한 독어는 뭔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 앞서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네이버 사전: [불교] 마음의 본바탕을 바르게 살펴봄. 새우리말 큰사전: 마음의 본성을 밝히어 살핌. 자종(自宗)의 진리를 살핌. 자종? 새우리말 큰사전에 없다. 종에 대한 설명만 있다. 인도 논리학 어찌고 저찌고 하는데, 뭔말? 그리스의 Noesis(독 Vernunft/이성)와 비교될 수 있겠다라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무지의 답답함은 한이 없다. 답답함은 홀로이기 때문이다. 교제가 없기 때문이다. 관심 혹은 자종이란 낱말이 한낱 낱말에 머물러 아무런 연상(聯想)을 야기하기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Funktionaer(간부)하면, 기능에서 시작해서 수학의 함수, 기능적 분화(funktionale Differenzierung)등에 이르기까지, 또는 거드름 피우는 당간부 혹은 스마트한 자본주의란 기계의 기능공 등 연상이 풍부하다.
관심(關心)과 관심(觀心)의 변증법? 얼른 생각나는 건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 뭐라고 했지?
2.
노동자는 ‘자종’(自宗)적인 것 혹은 ‘자가’(自家)적인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남김없이 [타자 소유 및 레짐하의] 생산에 투입될 때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이 완성된다.
이렇게 생산된 것이 자기 안에 모순되는 이중성격을 갖는 상품이다.
하늘과 땅 그 모든 것은 생산된 것이다. ‘자종’, ‘자가’적인 것이란 없다. 관념도 생산된 것이다. 착취관계에 기반한 생산에 의해서 생산된 관념이 자종/자가를 운운하는 순간 상품처럼 자기 안에 모순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스의 Noesis (독 Vernunft/이성), Philia(독 Freundschaft/우정) 등이 이렇다.
관념도 역시 생산의 결과란 말의 긍정적인 의미는 해방의 세력이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산해야 한다는데 있다. 예컨대, 연대를 생산해야 한다.
Noesis(nus)와 그 주변 연상들의 관조적인 면과 생산적인 면의 우위가 유럽 정신사에서 늘 문제가 되어 왔다. 변혁의 대목에서는 더욱 그랬다. 근대/현대 혁명세력은 관조적인 면을 다시 우위로 설정한 이상주의에 대항하여 대려 경험주의/실증주의에 가까운 ‘실천’을, 즉 생산(Produktion)을 중시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제와서는 이른바 좌파사이에 관념주의가 더 팽팽하다. 관념에 관념주의적으로 접근한다는 말이다. 생산의 범주로 접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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