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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하층/기층과의 관계를 상실한 신세대 좌파

기사 원문 : Zeit Online

원제 : Junge Linke haben Bezug zur Unterschicht verloren.

인터뷰

인터뷰이 : 볼프강 메르켈 (베를린 사회연구과학센터 (WZB)민주주의 및 민주화과 소장,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 교수)

 

{일러두기 : 많이 의역했다}

 

질 : 설문조사가 매번 보여주듯이 독일 대학생 대다수는 스스로 정치적 좌파라고 자칭한다. 그러나 그들이 [좌파] 정당에, 혹은 현재 진행 중인 프랑스에서 파업에서 볼 수 있듯이 [파업]시위에 대폭 참여하는 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신세대 좌파의 활동 공간은 현재 어디서 찾아 볼 수 있는가?

 

답 : 실제로 신세대 좌파의 정치적 참여/개입의 형식이 뚜렷하게 변했다. 평생 적을 두기 일쑤였던 대형 조직들이 그 의미를 급격하게 상실했다.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당은 이제 정말 시시콜콜한 것이고, 더욱이 장기적인 참여/개입은 극소수만 원하는 일이 되었다. 대신 국제사면위원회, 아탁(Attac - 시민의 이익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 도입을 위한 연합) 또는 환경운동 단체와 같은 시민 조직에 단기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나아가 인터넷에 디지털 시민 사회의 형식이라 할 수 있는 동아리들(Formen)도 있는데, 신세대 좌파가 거기에 이따금 참여하기도 한다.                    

 

질 : 내용이 궁금하다.

 

답 : 내용 면에서도 역시 흥미진진한 발전을 관찰할 수 있다. 분배의 정치에서 멀어지는 발전이다. 사회적 부의 정의로운 분배 문제가 예로부터 좌파 정치의 본질 중 그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게 이젠 신세대 좌파 사이에서는 거의 전부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문화적인, 정체성의 정치적인 주제들이 들어서 우위를 차지한 상황이고, 이런 것들이 오늘날 신세대 좌파가 자신의 좌파적 존재[감]를 규정하는 [좌표가] 되었다. 그 사이 소수자의 절대적인 평등권이 진보가 추구하는 핵심 사안이 되어버렸다. 인종적, 종교적 혹은 성적 소수자의 평등권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발전은 종교로 제한해서 두고 볼 때 아주 이상한 결과를 야기했다. 왜냐하면, 신세대 좌파가 – 계몽과 마르크스주의 종교비판의 전통에 역행하여 종교를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성역으로 보호하고, [특히] 이슬람에 대한 비판을 바로 „우파“ 또는 „혐오“로 낙인을 찍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결과 좌파의 종교비판이 망각되고, [좌파의] 비판적인 담론은 아예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게 큰 문제다.

 

질 : 좌파가 스스로 입을 봉했단 말인가?

 

답 :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비판적인]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역과 같은 지대가 있는 건 확실하다. 3분 가량 나는 우파가 아니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아가 국경 개방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등의 신앙 고백을 먼저 해야 비로서 입장이 허용되는 지대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서 소수자의 입장이 비판의 대상으로 허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의 발언이 어렵게 허용될 수도 있다. 이슬람과 관련해서는 자유로운 담론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명백하다.  자유로운 담론에 준하는 발언은 바로 비난을 뒤집어쓰게 된다. 토론 금지는 좌파적일 수 없다.

 

질 : 신세대 좌파는 분배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는 대신 문화, 정체성 정치 주제에 개입/참여하고, 좌파의 담론이 제한적이 되었다는 말씀이신데, 그 외의 변동 사항은?

 

답 : 아주 중요한 점은 오늘날의 신세대 좌파가 하나같이 세계시민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건 정의의 문제를 더 이상 사회 정책, 임금 정책 등  일국의 맥락에서 거론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전지구적인 연관성을 중요시하고, 이에 비해 국가는 낙후하고 지나간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또한 연대와 공동체가 아주 구체적이고 이웃과 함께하는 것이었고, 경제정책이 국민경제로 이해되었던 전형적인 좌파, 사민당의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런 직접적인 삶의 세계와 국가에 초점을 둔 정치관이 전지구적인 초점 전환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질 : 방금 서술하신 발전을 종합하면 금시 다시 거론되는 이른바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적 좌파로부터의 소원(疏遠)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단순 노동자(Hilfsarbeiter)가 아마 성차별을 지양하는 언어에 별반 열광하지 않았을 거고, 가속화된 현대화 시대에서 국가가 점점 더 전망하기 어려운 세계에서 최후의 질서를 담보하는 원리로 보이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답 : 언급하신 원래 좌파 핵심 지지자들이 그들의 지난 대표로부터 소원해지는 프로세스는 분명 다층적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지구화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었다. 좌파는 전유럽에서 지구화의 패자를 좌파 당에 결속 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불확실한 취업자, 실업자, 그리고 일반 사무직(kleine Angestellte)도 이제 대다수 우파포퓰리즘 당에 표를 던진다. 권위적인 취향의 노동자들도, 설령 지구화의 패자에 속하지 않는 숙련노동자일지라도 그렇다.       

[기존 정당에 실망하여 우익 정당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의 이런 항의 표심에는 물론 분명 문화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배 정책을  두고 볼 때 [유럽 각국의] 우파포퓰리즘의 입장은 전혀 통일적이지 않다. 각 정당들은 국가마다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의  Front National 의 경유 현저한 재분배를 요구하는 반면  스위스의 Volkspartei는 보다 신자유주의 지향적이다. 이들의 공통 분모는 철저한 반유럽노선 및 민족-국수주의 지향에 있다. 이것이 스스로 지난 수십년의 현대화 과정의 패자로 자인하고, 공론장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하고 익숙한 구조와 선명하게 정돈된 삶의 세계로 회귀하기를 원하는 유권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다.객관적-주관적으로 주변화된 이 그룹에 중산층의 문화세계에 깊게 뿌리하고 있는 좌파가 지금까지 제공한 게 별로 없다.   

 

질 : 뿐만 아니라 신세대 좌파가 이런 새롭고 심원한 양극화를 무관심, 경멸, 그리고 당황이 혼합된 냉담한 자세로 대한다는 느낌을 이따금 받는다.

 

답: 사실 그렇다. 신세대 지식 좌파는 자국의 하층/기층과의 관계를 거의 다 상실했다. [끈끈한] 연결은 고사하고 [하층/기층]의 심정을 느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시선을 돌리려 하지도 않는다. 좌파는 말 그대로 세계시민이 되었고, 언급했다시피 정치적 중점을 문화적 지형으로 옮겼다. 바로 이 지형에서 최고급 교육인과 그렇지 못한 교육인 간의 차이가 현저하게 되었다. 여기서 계급이란 개념의 사용이 허용된다면 이런 계급 간의 소통 상실이 강력(massiv)하고 사회 정의 실현에 문제가 된다.  

담론에서만 볼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생활 스타일, 가치관에서도 „위“와 „아래“ 그리고 도시와 시골 환경 간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차이가 표심에서 나타난다. 비슷한 걸 배후자 선택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계급 구조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배후자 선택에서 같은 층 소속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를 찾는다. 이것이 사회적 균열과 분리를 더 심화한다. 증가하는 좌파의 문화적 감성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어두운 곳에서 새로운 계급사회가 발생했다. 이 계급사회가 아직 신세대 지식인 담론의 주제가 되지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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