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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서설 §37

(§37) 의식 안에서 발생하는 자아와 자아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실체로서의 정신[1] 간의 불일치는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행사하는 부정의 힘으로서 본래 [자기 안에] 분열을 일으키는 힘이다. 그래서 부정적인 것은, [분열되어 대립하는 양자에게 각기 그 부정적인 것이 모자란], 결핍으로 간주될 수 있겠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에 스며있는 혼, 달리 표현하면 그 혼을 운동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여기에 몇몇 고대 철학자들이 공허함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공허함과 무(Nichtsein/비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고] 부정적인 것을 운동하게 하는 힘으로는 파악하였지만 바로 이 부정적인 것이[2] 자기라는 것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 부정적인 것이란 이런 것인데 [부정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분열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아와 대상의 불일치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이런 불일치는 또한 실체로서의 정신이 [부정의 힘에 의해서 분열을 일으키고] 자신과 관계하는 가운데 발생한 불일치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와 지의 대상이라는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차이는[3]] 실체로서의 정신 외부에서 그것과 무관하게 일어나고, 실체에 反하는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실체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주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실체로서의 정신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줄 때 비로소 정신은 자신이 현존하는 양식과 그 본질 간의 일치를 완성하게 된다. 이때 정신은 [왜곡되지 않고 완성된] 자기 모습을 대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덜 떨어지고 지와 진리를 따로 떼어놓던 행위가 왕성했던 추상적인 터전이 극복된다. 이때 모든 것은 [더 이상의 매개가 필요 없는] 절대적으로[4] 매개된 양식으로 존재한다. 무슨 말인가?[5]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우선] 실체로서 [정신의] 내용임과 동시에 이젠 아무런 매개 없이 그대로[6] 자아의 재산이 된다는 말이다. 즉 내용 자체가 자기 운동하는 주체이며[7], 곧바로 [완성된] 개념이 된다는 말이다. 이때 정신현상학은 약속된 목적을 달성하고 완성된다. 정신이 정신현상학에서 마련한 것은 지의 경지로서 정신에 깃들어 있는 갖가지 계기들에[8] 의해서 전개되는 정신이 [이젠 더 이상 대립과 분열을 빚지 않고] 대상과 자아로 갈라지는 않는 단순성 형식을 띠면서 확장되어 나가는 그런 경지다. 이때 정신의 계기들은 더 이상 존재와 지 사이의 대립으로 갈라져 뻗어나가지 않고, 지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면서 참다운 형식을 갖춘 참다운 것이 된다. 그들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용상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정신에 깃들어 있는 계기들의 운동을 단순성의 형태로 전개하여 유기적인 총체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논리학 또는 사변철학이다.



[1] 원문 . 이 문단에서 를 그냥 <실체>로 번역하지 않고 <실체로서의 정신>으로 번역하였다. 앞 문단과 이 문단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의식과 정신 간의 관계이며, 나아가 <정신현상학> <논리학> 간의 관계다. 이와 관련 제기되는 문제는 의식이 자기의 힘으로 정신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정신현상학>이 헤겔이 이야기하는 <학문>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이다.

[2] 부정의 힘에 의해서 타자가 된 것을

[3] Bewusstseinsdifferenz

[4] 원문 . 여기서 역자는 스피노자의 영원의 관점아래>를 듣는다. 

[5] 원문 <>. 파렌테시스를 이렇게 번역하였다.

[6] unmittelbar

[7] 원문

[8]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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