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저항의 미학> 쾰러의 <파업>

 

 

나는 아이쉬만에게 쾰러라는 화가가 생산관계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1886년 미국의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그림의 제목은 <파업>이었다. 브레멘에서 살 때 우리는 오래된 하퍼스 위클리지에서 이 그림의 복사본을 오려 내어 부엌에 걸어놓았다. 189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전시된 이 그림은 색상에 있어서 멘첼의 그림과 달리 생동감이 넘치고 뭔가 짜릿하게 다가오는 것이 전혀 없었다. 대신 붓질이나 그림구성에 대한 질문을 배제하는 사실성에 초점을 맞춘 삽화적인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주의가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고 오직 내용에만 머무르게 했다. 그림 왼쪽엔 공장주가 열주현관의 문을 열고 나와 서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층계 맨 위에서 무쇠로 만든 장식이 어우러져 있는 난간 뒤에 스탠드 칼라에 커프스 단추와 실크해트 차림으로 서있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이를 악문 표정이었다. 마치 시가를 잡고 있는 것처럼 오른손의 손가락을 약간 치켜 들고 있었지만 손은 비어 있었고 그 손동작은 놀라움과 힘없는 방어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노동자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의 자세 또한 아직 그들이 누리는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는 계급의 자신감에 젖어있었지만, 그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과거의 것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해서 그 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역력히 볼 수가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네모진 마름돌이 버티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하인은 그를 이미 반쯤 떠난 상태였다. 위엄을 부리고 서있었지만 그 위엄은 아무런 핏기가 없었고, 그에게 용기란 것이 있다면 노동자들이 층계를 밟고 올라와 그를 층계참에서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무지에서 나오는 용기일 뿐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수히 이 그림을 보아왔고, 그리고 부모와 토론을 거듭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번 새로운 해석으로 치닫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주었다. 공장주의 집 앞 툭 터진 공간에 모인 노동자 그룹이 불거진 분쟁의 발전가능성이 다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 그룹의 대변자는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뿌연 연기로 희미한 지평선에 있는 다른 공장들과는 달리 연기를 내뿜지 않는 공장을 가리키면서 층계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공장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위협하는 태도를 다양하게 취하는 가운데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건지 기다리면서 대변자와 공장주간의 충돌을 지켜보고나 아니면 서로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한 여성이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뭔가를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몸짓으로 보여주는 한 노동자를 달래고 있었다. 그림 오른쪽엔 종이를 접어서 만든 모자를 쓴 한 노동자가 먼지가 가득한 땅에서 []돌을 주워 들려고 몸을 굽히고 있었다. 산성과 같은 시커먼 갈색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들고 나와 모인 것이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몸을 깎아내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노여움이 가득 찬 상태로 언덕을 달려 층계 앞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마지막 종업원들이 그을음으로 시커먼 공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기 뒤편에 보이는 마부도 움푹 패인 질퍽한 땅에 마차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고 있었다. 그림의 뒤 배경에서 반복되는 []돌을 움켜쥐는 동작은 이젠 오직 무력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공장주는 노동자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뻣뻣하고 얼어붙은 자세로 홀로 서있었고, 노동자들의 기세는 그를 금방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우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가 공장주를 보호하여 그에게 다가설 수 없게 하였다. []돌은 던져지지 않을 것이었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발전시켜 나아가려고 애를 써도 그 모든 것이 층계 앞에서 멈추어 섰다. 멀리 서 있는 사람들의 동작은 분노가 가득했고, 단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벽돌집 가까이에 와서는 그런 모습이 누그러져 주저하고 기다리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용기를 상실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주의 집으로 쳐들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썩어 문드러질 주인의 거만을 보호해주는 무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장주의 집 뒤에는 볼 수는 없지만 중무장한 방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오렌지나무가 즐비한 오솔길을 따라서 다시 강둑으로 돌아가는 동안 아이쉬만에게 층계를 올라가서 그 늙은이를 한방에 처리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할 수가 있었던 일인지 자주 그려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절름발이 상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여기 유럽에서도 이와 같은 단순한 행위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노동자들이 층계를 올라가는 내디딤을 했던 것이었다. 노동하는 대중이 그림 안에서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무르익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고 지속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층계를 뛰어오르는 도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이해한 것이지만 이 그림이 묘사한 사건이 들끓는 동요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의 가능성만 내포하고 있었다. 화가는 유토피아적 사고에 빠져들지 않았다. 그는 명백하게 노동자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동자의 삶의 조건을 직접 보고 경험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멘첼과 다를 바 없이 학습하고 훈련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자의 육중한 육체성을 그리는데 있어서 프로이센 궁중화가와는 달리 노동자들을 상품생산의 마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종으로 묘사하지 않고 자기를 자각한 주체로 그렸다. 노동자들은 불거진 투쟁행위에서 착취자와 대립하고 서있었다. 멘첼의 압연공장에서는 착취자가 성가시게 하는 노동자가 없이 아직 묵상을 즐길 수 있었는데 말이다. 노동자들이 층계 앞에서 멈춘 것은 이성이 강요한 것이다. 개별적인 공격은 무의미하고 곧바로 총탄세례를 받았을 것이다. 분에 찬 기다림,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뒤흔드는 행동은 조직[]를 통해서 이행될 조치를 알리는 징조였다. 검은 복장으로 층계 위에 서있는 저 놈을 볼 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뭔가에 나도 역시 사로 잡혔다. [그러나 차분히] 그림을 분석하고 토론하면 화가의 지혜로움과 역사적인 통찰력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886, 이 해는 미국에서 대중파업이 개시된 해였다. 1 8시간 노동제를 위해서 데모하고 시카고에서는 경찰이 노동절 집회에 모인 노동대중을 유혈 진압한 해였다 1850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1917년 미네아폴리스에서 가난하게 죽은 쾰러의 그림은 계급간의 적대적인 대립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게 말해주는 증인으로서 오늘날에도 그 현재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