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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천당가자

„예수 믿고 천당가자“가 기독교의 키포인트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의 „지옥에 가도 예수를 따르겠다“, 즉 예수 믿는 걸로 족하겠다는 무조건적인(kategorisch) 고백에 견주어 보면 예수 믿는 것과 천당가는 걸 수단과 목적 혹은 전제와 결론의 관계로 추락시키는 천박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 점은 차지하고 이 표현을 좀 살펴보자.

이게 기독교의 가장 역겨운 표현이라는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작은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은 25장 31절 이하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33절-46절 이하 이렇게 쓰여있다.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강조는 ou)

여기에 누가 뭘 척도로 하여 최후심판을 하는지 분명히 적혀 있다.

척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야훼가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다.

이런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믿음이 관계의 표현이라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직접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와 관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주렸고,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나 였으며, 이런 형제와 관계하는 것이 직접 나와 관계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과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도 아니다. 구별할 수 없는 하나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와 관계하는 것은  마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따라 누구의 이름으로, 예컨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원문„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βασιλεὺς ἐρεῖ αὐτοῖς,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ἐφ' ὅσον ἐποιήσατε ἑνὶ τούτων τῶν ἀδελφῶν μου τῶν ἐλαχίστων, ἐμοὶ ἐποιήσατε.“에서 이런 직유, 은유, 혹은 누구의 이름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 살던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가 역사적인 예수를 알던 모르던, 예수와 직접 관계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야훼의 나라를 업으로 받는 행위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는 항상 읽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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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3

블로그 공간에서 날 보여줄 때도 있다. 여기서 „나“라는 건 나의 옛이야기다.  그러나 블러그 공간에서 보여주는 이런 나는 극복되었거나 이상화된 나다. 보여줘도 쑥스럽지 않는 나다.

오늘 이곳 블로그에 올려진 김지하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들으면서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들어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금관의 예수> 공연 중 불렀던가? 어딘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삐쩍 말라 윤곽이 뚜렸했던 누님의 모습은 생생하다.  보고 싶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짐을 자주 챙기게 된다. 뭘 버리고 뭘 가지고 가지? 가지고 가는 양은 점점 준다. 전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 버리고 가게 된다. 버리고 가면 뭔가 내 한쪽을 버리고 가는 것 같아서 망설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누님이 보냈던 엽서들을 읽는다. 생일 때 내가 어려워 할 때 날 챙기고 위로하는 엽서들이다. 무심히 읽었던 것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갈 때  누님의 마음이 물씬 다가온다. 몸이 그립다. 안아주고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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