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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관사의 겸손과 소통

정관사와 부정관사가 있는 독어의 번역에서 어려운 게 있다.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번역이다. 영어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의미론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정관사, 부정관사 혹은 무관사의 번역은 그래도 쉬운데, 부정관사의 사용에서 감지되는 ‘겸손’은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핵폐기물의 정치경제학”의 번역에서 다음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Und doch ist das Angebot nicht nur unanständig. Es regt zumindest die Debatte an und ist
überlegenswert, weil ein Weg gefunden werden muss, die Rückstellungen der AKW-Betreiber für die Allgemeinheit zu sichern.”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그저 책임을 회피하려는 파렴치한 행동(unanständig)으로만 볼 수는 없다. 최소한 논쟁을 자극하고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다. 원전운영업체의 유보금을 사회일반을 위해서 확보하는 길이 있다면 그걸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ein Weg gefunden werden muss” (하나의 길이 찾아져야 한다)를 “길이 있다면 그걸 찾아야한 한다”로 번역했다.

 

원전업체의 파렴치한 제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ein”이라는 부정관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여기에 겸손과 개방 – 열린 마음 – 이 감지된다. 한 개인의 아비투스(Habitus, habbit)가 아니라 언어 내재적인 겸손과 개방이다.

 

서양 이론은 많이 수용했지만 왜 소통은 불통이 되었을까? 번역의 과정에서 저런 언어내재적인 아비투스가 간과된 게 아닐까? 우리말의 겸손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소통을 힘들게 하는 게 정도(正道) – der Weg – 가 아닌가 한다.

 

부정관사의 겸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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