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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14
    "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2
    ou_topia
  2. 2015/03/26
    부정관사의 겸손과 소통
    ou_topia

"뼈를 깍는" 박근혜, 쿼바디스? - 2

1.

 

산책하면 늘 그러듯 짝지는 어제 역시 느닷없이 동요를 부르기 시작한다.

 

“같은 하늘 밑에서 사는 우리들

우리는 송이 송이 나라 꽃송이

너희 고향은 어디냐 너희 고향은 어디냐

함경도다 전라도다 평안도다 경상도다

황해도다 충청도다 강원도다 경기도다

그리고는 제주도다 ”

 

가사가 맞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그러니까 국민학교 다닐 때 배웠다고 하는데, 난 아무런 기억이 없다.

 

2.

 

문득 작년 말 별세한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를 기리는 <슈피겔>의 표지가 떠오른다. 얼굴과 손이 어우러진 인물 사진이다. 밑에서 위로 비스듬하게 올려 찍은 사진이 손을 강조하고 있다. 상황이 요구할 경우 신속하게 결정하고 냉철하게 추진한다는 'Macher'('행동으로 옮기는 자,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자')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겼다. 담배를 피고 있다. “의지, 사람은 이게 있어야 해. 플러스 담배“라는 슈미트의 재담이 버팀목이 되어 손 쪽으로 치우쳐진 머리로 인해 불안정해진 삼각형 구도가 안정감을 되찾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담배가 의지와 함께 이성과 실천의 조화를 이루는 버팀목의 요소?

 

공적 공간에서의 금연 논쟁이 한참 진행 중일 때 독일 정치 풍자 개그맨 디터 힐데브란트(Dieter Hildebrandt)가 흡연을 - 좀 익살스럽지만 - 호평했던 게 생각난다. 담배는 인디언의 생활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이상은 평화라고 했다. 전시 두 족장이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담배만 피우는 게 평화의 첫 걸음이 되었다는 것. 이런 ''의 유보에서 평화가 싹텄다는 것.

 

데리다의 “차연“을 가능하게 해주는 게 담배? 아니면 헤겔의 “매개된 직접성”(„Vermittelte Unmittelbarkeit“)이 더 어울리나?

 

3. 박근혜 대통령의 '외로운' 결정 vs. 헬무트 슈미트의 “大위기[상황]스태프”(Grosser Krisenstab)

 

1977년 가을 헬무트 슈미트는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독일 적군파가 독일 연방고용주협회장 겸 독일 연방산업협회장 마르틴 슐라이어를 납치하고 수감된 적군파 전원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PLO도 가세하여 독일 루프트한자 여객기 '란쯔훗'(Landshut)을 납치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헬무트 슈미트는 유관 부장, 야당 총수, 그리고 유관 경제계 인사를 망라한 “대위기[상황]스태프”를 소집했다. 이렇게 '국론'을 하나로 모았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의 '외로운' 결정이 국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까박근혜 대통령의 '깡지지' 보수 언론까지 우왕좌왕하는 상황이다.

 

4.

 

그나마 다행이다. 오는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회연설”이 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보수 언론이 요구하는 “대국민담화”의 포퓰리즘을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국민심판론 등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를 우회하는 통치를 두고 볼 때 결코 밝게 전망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퓰리즘의 본질이 “직접성”에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매개된 직접성”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문제를 두고 모든 야당과 소통해야 한다.

 

5.

 

자타 모두 헬무트 슈미트의 정신적 지주는 포퍼 경과 칸트라고 했지만 생중계된 국장(國葬)을 보는 중 그건 보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국장 순서와 배열을 세심하게 지시한 슈미트는 포퍼 경과 칸트를 넘어서 삶의 아픔에 시달리는 '인민의 정서'를 갖춘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가 원했던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저녁노래/Abendlied>의 마지막 연 연주에는 눈시울이 좀 뜨거워지기도 했다.

 

Und laß uns ruhig schlafen!
Und unsern kranken Nachbar auch!

(그리고 우리가 편히 잠들게 해 주세요! 우리뿐만 아니라 병든 우리 이웃까지)

 

 

''과 이성의 외곽에 있는 뭔가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뭔가 성스러운 것, 손대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게 슈미트의 선곡이 의도했던 것일까? 국장에서는 의례 군인들이 관을 들고 나가지만 슈미트는 먼저 민간인이 관을 들고 교회 밖으로 나가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 비로서 군인이 관을 위임하도록 했다. 국가 권력에 선행되는 성스러운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6.

 

한반도 상황에서 손을 대서는 안되는 성스러운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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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관사의 겸손과 소통

정관사와 부정관사가 있는 독어의 번역에서 어려운 게 있다.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번역이다. 영어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의미론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정관사, 부정관사 혹은 무관사의 번역은 그래도 쉬운데, 부정관사의 사용에서 감지되는 ‘겸손’은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핵폐기물의 정치경제학”의 번역에서 다음 문장을 이렇게 번역했다.

 

“Und doch ist das Angebot nicht nur unanständig. Es regt zumindest die Debatte an und ist
überlegenswert, weil ein Weg gefunden werden muss, die Rückstellungen der AKW-Betreiber für die Allgemeinheit zu sichern.”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그저 책임을 회피하려는 파렴치한 행동(unanständig)으로만 볼 수는 없다. 최소한 논쟁을 자극하고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제안이다. 원전운영업체의 유보금을 사회일반을 위해서 확보하는 길이 있다면 그걸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ein Weg gefunden werden muss” (하나의 길이 찾아져야 한다)를 “길이 있다면 그걸 찾아야한 한다”로 번역했다.

 

원전업체의 파렴치한 제안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ein”이라는 부정관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여기에 겸손과 개방 – 열린 마음 – 이 감지된다. 한 개인의 아비투스(Habitus, habbit)가 아니라 언어 내재적인 겸손과 개방이다.

 

서양 이론은 많이 수용했지만 왜 소통은 불통이 되었을까? 번역의 과정에서 저런 언어내재적인 아비투스가 간과된 게 아닐까? 우리말의 겸손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소통을 힘들게 하는 게 정도(正道) – der Weg – 가 아닌가 한다.

 

부정관사의 겸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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