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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공지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로 진중권이 이런 글을 썼다.
“‘의자놀이’를 둘러싼 의자놀이” (여기에도 게재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는 것 같다. 근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는 느낌이 들면 들수록 역겨운 느낌이 더해진다.
왜 그러지?
소제목 “난무하는 해방의 서사”에서 왜 그런지 좀 분명해진다.
이 부분 전문 인용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하종강-이선옥이 새로 건물을 짓고, 그것을 하종강의 이름으로 등록하기로 합의한다. 이후 하종강이 그 건물을 공지영에게 임대한다. 그러자 이선옥이 나타나 자신이 건물의 공동소유주이니 자신에게도 임대료를 내라고 하는 격이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이선옥은 이 사안에서 아무 권리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권리를 스스로 포기, 혹은 양도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책의 기획 자체가 공익을 위한 것이고, 저자는 물론이고 인용된 필자들, 책을 만든 출판노동자들 모두가 재능을 기부했다. 게다가 칼럼의 내용도 되도록 널리 복제될수록 좋은 공익적 콘텐츠에 속한다. 그런데 소유권 등기도 안 한 이선옥이 나타나, 그 공익적 콘텐츠에 대한 사유권을 주장하다가, 저자의 사과가 없다고 공익적 콘텐츠의 배포중지를 요구한다. 남세스럽지 않은가?
자본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사유재(저작권)로 보나,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그것을 공유재(공익적 콘텐츠)로 보나, 애초에 이선옥이 낄 자리는 없다. 그런데도 하종강과 일부 자칭 좌파들은 특유의 스테레오타입를 사용하여 이번에도 신속히 또 하나의 이야기를 찍어냈다.
‘거대한 문화권력에 맞서 힘없는 무명 르포 작가의 권리를 수호하는 싸움.’
이로써 공지영은 밤의 여왕이 되고, 이선옥은 착취당한 민초가 되고, 하종강은 정의의 기사가 되고, 트위터러들은 그 뒤를 따르는 민중의 군대가 된다. 이 해방의 서사가 아무리 숭고해 보여도, 그것은 오직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순도 100%의 허구다.”
“삽살개의 정체”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라 사냥개로.
그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등록, 임대, 임대료, 공동소유주, 권리, 양도 등 법률용어가 난무한다. 이런 용어들이 뭘 의미하는지는 법대생들에게 맡기고 자본주의 법체계 시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이런 용어들처럼 겉만 도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아주 단순한 내면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칸트는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시원/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Rechtslehre" 첫 조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민]법체계의 기본명제다.
“법적 내 것(meum juris)이란 나와 붙어있는 것인데, 어떻게 붙어 있느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 동의 없이 그것을 사용할 경우 나를 찢는 행위가 될 만큼 붙어있는 것이다. 사용 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을 통틀어 소유라 한다.” (Das Rechtlich-Meine (meum iuris) ist dasjenige, womit ich so verbunden bin, daß der Gebrauch, den ein anderer ohne meine Einwilligung von ihm machen möchte, mich lädieren würde.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s Gebrauchs überhaupt ist der Besitz..)
이선옥이 아픈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을 써본 사람은 글쓰기가 애 낳는 것과 같음을 알 것이다. 글쓰기를 좆까 배설하는 식으로 하는 ‘남성’은 모르겠지만. 그래 니들을 싸 질러대고 쾌감을 느끼겠지만 이선옥은 글을 낳으면서 아파했고 애를 호적에 안 올렸다고 지랄하고 비아냥거리는 걸 보면서 또한번 아파했을 것이다.
그래, 이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
사회주의적 관점의 기본은 어디에 있는가? 앞 칸트의 첫 명제에 함의되어 있다. 무산계급은 다른 사람에 의한 “법적 내 것” 사용에 있어서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굶어 죽음을 선택하면 몰라도.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공동소유다. 이게 뭔지 다시 칸트를 조회해 보자.
같은 책 20조항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래서 내가 계약을 통해서 취득하는 것은 (약속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속이다. (...) 계약에 의한 내 것의 양도는 항구성법(lex continui)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 이 항구성은 나아가 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것이 [계약당사자] 양자(promittents et acceptantis)의 특정한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통합된 의지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달리 표현하면, 약속하는 자가 먼저 자기 소유를 다른 사람이 선점할 수 있게 내버리는 (derelinquit), 혹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여(renunciat) 다른 사람이 바로 그 권리를 챙기는, 혹은 그 반대의 식이 아니다. 양도는 결국 행위인데, 그 안에서 대상이 한 순간 양자 모두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Durch den Vertrag also erwerbe ich das Versprechen eines anderen (nicht das Versprochene). (...) Die Übertragung des Meinen durch Vertrag geschieht nach dem Gesetz der Stetigkeit (lex continui). (...) Diese Stetigkeit aber bringt es mit sich, daß nicht eines von beiden (promittentis et acceptantis) besonderer, sondern ihr vereinigter Wille derjenige ist, welcher das Meine auf den anderen überträgt; also nicht auf die Art: daß der Versprechende zuerst seinen Besitz zum Vorteil des anderen verläßt (derelinquit), oder seinem Recht entsagt (renunciat) und der andere sogleich darin eintritt, oder umgekehrt. Die Translation ist also ein Akt, in welchem der Gegenstand einen Augenblick beiden zusammen angehört.)
사회주의적 관점이 지향하는 것이 뭔가. 자본주의에서는 한순간만 가능한 공동소유를 최소한 장기화하자는 것이다. 이 요구는 허구가 아니다.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이론상 필연적이고 그래서 가능한 가능한 것에 실질적, 실천적인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것을 실천적으로 이룩하자는 것이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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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Man sagt, daß die dialektische Methode darum geht, der jeweiligen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ihres Gegenstandes gerecht zu werden. Aber das genügt nicht. Denn ebensosehr geht es ihr darum, der konkret-geschichtlichen Situation des Interesses für ihren Gegenstand gerecht zu werden. Und diese letztere Situation liegt immer darin beschlossen, daß es selber sich präformiert in jenem Gegenstande, vor allem aber, daß es jenen Gegenstand in sich selber konkretisiert, aus seinem Sein von damals in die höhere Konkretion des Jetztseins (Wachseins!) aufgerückt fühlt. Wieso dies Jetztsein (...) an sich schon eine höhere Konkretion bedeutet – diese Frage kann die dialektische Methode freilich nicht in der Ideologie des Fortschritts sondern nur in einer, an allen Teilen diese überwindenden Geschichtsanschauung erfassen. In ihr wäre von der zunehmenden Verdichtung (Integration) der Wirklichkeit zu sprechen, in der alles Vergangene (zu seiner Zeit) einen höheren Aktualitätsgrad als im Augenblick seines Existierens erhalten kann. Wie es als höhere Aktualität sich ausprägt, das schafft das Bild als das und in dem es verstanden wird. Und diese dialektische Durchdringung und Vergegenwärtigung vergangener Zusammenhänge ist die Probe auf die Wahrheit des gegenwärtigen Handelns. Das heißt: sie bringt den Sprengstoff, der im Gewesenen liegt (…) zur Entzündung. So an das Gewesene herangehen, das heißt nicht wie bisher es auf historische sondern auf politische Art, in politischen Kategorien behandeln."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 in: Rolf Tiedemann (Hg.): Walter Benjamin - Gesammelte Schriften, Band V.1, Frankfurt am Main 1991, S. 494f.
"사람들은 말하기를 변증법적 방법은 [대상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대상이 처해있는, 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충실하게 담아내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방법에서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방법이 대상으로 삼는 것에 개입하는 존재가(Interesse) 처해 있는 구체적-역사적 상황을 또한 충실하게 담아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근데 둘째 상황은 개입하는 존재(Interesse)가 항상 스스로 [변증접적 방법의] 대상 안에서 자신을 미리 형성한다는데, 특히 그 대상을 자기 안에서 구체화한다는데, 그 대상이 옛날있기에서 지금있기(깨어있기!)로, 보다 높은 구체화로 한자리 더 올라온 것을 느끼는데 내포되어 있다. 어떤 이유로 이 깨어있기 (...) 자체가 이미 보다 높은 구체화를 의미하는가? - 이 질문은 사실 변증법적 방법이 진보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아니 오히려 오직 바로 그 진보이데올로기를 모든 부분에서 극복하는 역사관에서만 제기되고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역사관에서 [비로소] 증가하는 현실의 농축(통합)이 이야기될 수 있겠는데, 이건 지나간 모든 것들이 그들이 존재했던 순간보다 더 높은 현실성수준을 취할 수 있는 현실의 농축(통합)이다. 지나간 것이 자기를 보다 높은 현실성으로 드러나게 각인함에 따라 이미지가 창조되는데, 이때 지나간 것은 바로 그 창조된 이미지로, 그 이미지 안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나간 연관성들의 변증법적인 삼투(滲透)와 재-현재화가 [우리가 지금 맞서고 있는] 현재 실천의 진리에 대한 판가름인 것이다. 이게 의미하는 것은 이런 삼투와 재-현재화가 지나간 것 안에 있는 폭탄에 (...)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나간 것에 접근하는 것, 다시 말해서 지나간 것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 (historisch) 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지나간 것을 정치적인 카테고리로 다룬다는 말이다." (ou_topia)
<의자놀이>란 폭탄을 만들어 놨는데, 왜 뇌관을 때리지 않고 거기다 물총질만 하지?
2021/05/15 |
2021/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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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하종강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논쟁을 보면 까깝하기만 하다.
왜 <의자놀이>의 이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지?
난 <의자놀이> 출간과 관련해서 공지영이 한 일이 “의자놀이”란 제목을 만들어 낸 일 외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공지영의 기여보다 더 큰 기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념의 노동이 엿보이는 제목이다. 이게 “교양시민”이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성찰”의 결과라고 해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애플사를 한 번 봐라. “i-pad"란 이름을 완전히 자기 걸로 하기 위해서 중국 모 기업에 어떤 액수를 지불했나? 조중동이 왜 이리도 조용하나? “의자놀이”란 책 제목이 가지는 파워 때문이 아닐까?
“의자놀이”란 이미지를 평하는 글은 노정태의 “공지영, '쌍용차의 눈물' 보며 <도가니>에 빠지다!” 밖에 없다.
“공지영의 <의자놀이>(휴머니스트 펴냄)는 아주 좋은 제목이다. 이 책이 쌍용자동차 파업 사태를 다룬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제목이 '사람 수보다 적은 의자를 놓고 빨리 앉는 사람이 살아남는 놀이'의 은유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분석이다. <의자놀이> 이미지를 은유의 수준에서 처리하고 있다.
구글에서 “벤야민”을 검색해보니 35만 8천개 등록이 검색된다. “변증법적 이미지”는 무려 239만개의 등록이 검색된다. 근데 “변증법적 이미지 ∧ 의자놀이”는 0 이다.
<의자놀이>가 바로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변증법적 이미지”가 아닌가? 벤야민 전문가들은 많은데 왜 이리도 <의자놀이>에 대한 “변증법적 이미지” 접근이 전무하지? 물총 쏘는 것만 배웠나?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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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스케치
1. 도로시아 랭의 사진 <이주 어머니/Migrant Mother>의 뉴딜의 사회공학( social engineering)에서의 기능/역할
2. <의자놀이>와 박근혜의 사회공학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관련링크
http://www.zeithistorische-forschungen.de/site/40208749/Default.aspx
http://paulturounetblog.files.wordpress.com/2008/09/case-study-migrant-mother.pdf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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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의자놀이>를 놓고 이상야릇한 대립구도가 빚어졌다. 애기했다시피 난 이 대립구도에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난 처음부터 공지영의 <의자놀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명제형식으로 정리해 본다.
1. 공지영의 <의자놀이>는 진보가 말하는 “배제 서사”의 발전형이다.
르포하면 얼른 생각나는 책이 있다. 귄터 발라프의 <가장 낮은 곳>이다. 이런 책이다.
“『가장 낮은 곳 Ganz unten』은 귄터 발라프 Günter Wallraff가 1983년 3월부터 2년 동안 국적과 신분을 위장하고 터키인 노동자, 알리(레벤트 시니르리오글루)로 살면서 독일 사회와 노동 현장에서 겪은 차별과 착취에 관한 체험르포이다. 1985년 첫 출판 된 이 책은 지금까지 독일어판으로만 35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으며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독일 출판 역사상 가장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1) 르포 형식의 이 책은 13장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장마다 발라프는 자신의 체험 보고를 묘사하고 다른 동료들이 겪은 체험도 함께 끼워 넣으며 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대화체 형식으로 표현하였다.”(서정일(한국외대), 변장과 위장을 통한 사회 비판과 폭로 - 귄터 발라프의 르포 『가장 낮은 곳』, http://brecht.german.or.kr/jungbo.net/Hwizard/contents/ jahrbuecher/22/3-2%EC%84%9C%EC%A0%95%EC%9D%BC.pdf)
이 르포는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폭로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귄터 발라프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발라프 르포의 핵심은 [몸소]체험이다. 근데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현실을 인식 저편의 즉자(an sich)로 규정하고 그걸 꾀를 사용하여 고스란히 취하려는 직관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정신현상학 서론)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이 행한 비판의 논지는 현실이란 인식 저편이 아니라 대상과 인식이 항상 어우러져 있는 총체성(Totalität)이라는 것이고, 그것을 수고하여 투명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은 ‘까 발라진 팩트’(factum brutum)들이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은 그런 것들을 주워 모아 [인과성에 따라] 엮어 꿰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이란 수없이 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문이란 그런 “원들의 원”(Kreis von Kreisen)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헤겔 철학의 정점은 시스템이 아니라 엔치클로페디아이다.
외국인이 이주 노동자가 처한 현실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총체성’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탁월한 사람이 몸소(authentisch), 원천에 가서 (originell) 찍어 올리는 factum brutum이 아니다. 이런 총체성들이 현존하는 양식은 자료다. 수많은 신문기사, 법원판결, 병원기록, 경찰서 기록, 이주노동자외국인단체 상근자의 진술, 외국인의 이주노동자의 일기 등등 널리 펼쳐져 있다. 이 걸 “원들의 원”으로 만드는 것이 ‘외국인 이주노동자 현실’의 진리다. 여기에 수고가 있다. 역사를 학문으로 만드는 첫 마당에 이런 수고가 있었다. 진리는 찍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노동의 고삐를 채워”(“ἐπιπόνως”) 수많은 자료를 “탐색하는”(“ηὑρίσκετο”) 과정의 결과였다. (“ἐπιπόνως δὲ ηὑρίσκετο”,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 22장).
“[몸소]체험”은 진짜 수고하는 척 한다. 모습뿐만 아니라 말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들여 변장하고 위장하여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찍어 올리지만 이건 "개념의 노동"(Arbeit des Begriffs)이 결여된 놀이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공지영과 휴머니스트사의 <의자놀이>가 최소한 이런 맥락에서 싹수가 있는 것이고 공지영의 “나 고생 했어”는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되는 것이다.
2. 쌍용차 해법을 두고 공지영/휴머니스트사식 르포와 김기원식 학문하기 사이에 진검승부가 있어야 한다.
김기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쌍용차의 해법”에서 하종강으로 매개된 공지영과 이선옥간의 대립을 빗나간 논란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립은 자연 소멸되든지 양자가 소통하든지 해서 암튼 해소될 것이다.
맞다. 쌍용차 해법이 문제다.
이걸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져야 한다.
첫째, 경제학 문제다.
우선 경제학이란 게 뭔지 논쟁해야 한다. 경제학이 수학인지 아니면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는 철학이고 정치인지, 다시 말해서 정치경제학인지 사투해야 한다. 실존사회주의 붕괴와 함께 정치경제학이 폐기처분된 후 경제학은 수학이 되었다. 근데 그게 가져다 준 게 뭔가? 세계를 말아먹는 금융위기가 아닌가? 정확한 수학에 기댄 경제학이 왜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하는가? 수학에 기댄다는 게 자본에 기댄 것을 감추는 이데올로기였나?
둘째, 학문하기 문제다.
여기 진보넷 바깥블로그 <Social and Material>의 heesang님은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기”를 권한다.
마르크스는 어떤 학자인가? 수고하여 현실세계의 ‘총체성’들을 “원들의 원”으로 만든 학자다. 10년 이상 별 볼일 없는 상업편지까지 검토해 가면서 자본론을 집필한 학자다. 어찌 보면 공지영이 마르크스처럼 학문하고 있다. 현실을 직접 찍어주는 뭔가에 의존하지 않고 ‘총체성’으로 널려있는 자료들을 최소한 한 곳에 모은 것이다. 정치경제학 싹수가 있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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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놓고 의자놀이가 진행 중인가?
모르것다.
아는 것은 단지 의자놀이는 계급의식이 없는 집단에 먹히는, 그리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노동자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이다. 먹고 뱉어내는 자본의 행패를, 비 피해 가듯이 피해 갈 수 있는 찬스가 있다는 <룸펜 자유주의자>들에게 어울리는 놀이다. 우산을 준비할 수 있다고도 한다. 아니, 우산 몇 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한다.
공지영이 재능기부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메스껍다.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식의 발현인가, 아니면 룸펜자유주의자의 의식이 깔려있는 발언인가?
계급, 계급의식? 고리타분한 말과 분석틀?
레닌의 계급정의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인 생산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대부분 법규로 고착되고 문서화된)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노동의 사회적 조직에서의 역할에 따라, 그리고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마르크스가 말한 잉여가치의 다른 표현] 취득양식과 그 몫의 크기에 따라 서로 구별되는 인간의 대집단들을 계급들이라고 칭한다. 계급들은 규정된 사회적 경제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자리의 차이의 결과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인간집단들이다.” (레닌, 위대한 대안, 1920.4.11 신문 “공산주의적인 수보트닉”에 게재, http://www.erich-koehler-ddr.de/dokumente/initiative.html, 2012.8.16)
계급의식?
레닌이 계급정의에서 말한 자리는 체화될 것이다. 뭉크의 그림 <길가는 노동자들>을 사유하는 페터 바이스의 <저항의 미학>은 노동자계급의 체화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체험한 것이 모두 다 이 그림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잠이 덜 깬 다리를 터벅터벅 힘겹게 옮기면서 공장을 향하는 길, 교대작업시간을 마치고 나서 혼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작업장에 꽉 묶인 상황, 그리고 이런 예속과 주는 일자리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강제에 대한 증오, 다른 사람 좋은 일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노여움과 그 노여움을 참아 삼키는 일, 일자리 상실에 대한 불안 등 내가 몸으로 느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 그림에는 끝없는 반복으로 마비된 정신과 몸의 고립이 있었다. 그 그림에는 쓰러뜨려진 자의 낙심이, 무능력하고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모했다는 느낌이, 더없이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썩혔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동시에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것을 또한 모색하고 있었다. 이젠 말문이 막히고 기계의 단조로운 동작 안에서 분리된 개인들이지만 그들이 가는 길은 함께 하고 사용하지 못한 힘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는 길이었다. 그 힘은 아직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잠재하고 있었고 높은 담으로 장식된 쭉 뻗은 길을 가는 노동자대중의 대열을 걷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었다.” (ou-topia)
계급의식은 계급이 자기 자리를 떠날 때 생기는 의식이다. 민족의식은 민족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다. 생물학적인 것과 개별 인간의 카테고리에 근거한 의식은 자기의 존속을 주장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계급의식은 완전히 다르다. 계급의식은 계급을 부정한다. 자기 자리를 떠나면서 자기부정을 하는 운동이며, 그리하여 인간의 유적존재를 실현하는 유일무이한 휴머니스트 의식이다. 계급의식의 노동자는 “공지영으로서” 뭘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 뭔가를 요구한다. 사회를 다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과 자부심에 근거한 요구다. 노동자는 기부금 수혜자가 아니다. 인간의 유적존재를 물질적으로 담보하는 계급이며, 만인을 위한 부를 요구하면서 “계급사회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을 하는, 계급투쟁을 하는 계급이다.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했다.
근데 계급투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건들이 많다. 아마 능력이 부족해서 계급투쟁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근데 가끔, 계급투쟁이 고리타분한 것이 된 현재 다시 민족, 종교, 개별 인간 등의 카테고리가 난무하는 것을 보면서 야만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계급투쟁의 인간역사가 개시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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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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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님! 진중권하고 얼른 손 끊고 이선옥님하고 손 잡으세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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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님, 당신 "적"의 적이 당신의 친구가 아닙니다. 당신 "적"의 적은 또한 당신의 적입니다. 당신을 맴도는 허접쓰레기입니다.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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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적 관점은 모르겠습니다.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 글은 이선옥 글입니다. 공산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들의 연합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공익적 콘텐츠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선옥을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하종강에게 증여했습니다. 공지영은 하종강에게 이선옥의 글을 증여받아 가공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글은 이선옥 글입니다. 그렇다면 공지영은 이 글이 이선옥 글에 기초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공지영, 하종강, 이선옥 개인들의 문제로 보지 않고 관계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사태의 핵심일 겁니다.공산주의는 공동 소유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소유는 역사적 형태가 있습니다. 로마사회와 게르만 사회는 소유형태가 다를 겁니다. 게르만 사회는 오래동안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가격, 구매, 판매라는 개념도 없었습니다. 반면 로마의 파밀리아(가족)는 어원을 따지면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최초의 소유관계들의 변화는 매뉴팩처의 출현 때문입니다. 직인과 장인 사이에 가부장제적 관계가 매뉴팩처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화폐관계로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적 소유는 새로운 것이지 공동 소유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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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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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공산주의에서는 "소유"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없겠죠...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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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개그를 하고있는게 분명해요. 공산주의에서 왜 의자놀이같은 책이 나올까요. 공장은 노동자들의 것인데.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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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서는 욕구와 욕망의 충족이 소유로 매개되지 않겠죠.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충족과 개발이 되겠죠. 사회주의는 좀 보이는 것 같은데, 공산주의는 아직 잘 안보이네요....부가 정보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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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논지는 공지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카테고리를 사용하는데, 자본주의 카테고리상 공지영에게 하자가 없다는 거죠. 제 논지는 진중권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소극적인 비판입니다. 좀더 적극적인 비판이 이루어져야 할텐데, 이건 인지자본주의, 지적노동의 자본하의 subsumtion등을 더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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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진중권의 개그가 왜 가능하고 통하는 가를 충분하게 설명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능력 부족이네요.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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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예술가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창작의욕을 꺾어놓았다고 해요. 패러디인 것 같은데..부가 정보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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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전 애초에 이선옥씨 심정을 이해못했던게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자기가 쓴 글 교정을 부탁했는데 글이 너무 운동권적이어서 그냥 제 스타일로 바꿨어요. 그런데 쓰다가 너무 힘들어서 쓰다말고 돌려줬는데 그 사람이 제가 쓴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부분은 거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넘겨줬거든요. 그 사람 이름으로 출간됐죠. 짧은 글이었어요. 그런 일 아마 많을거에요. 제가 아는 분은 유학할 때 아주 유명한 교수 논문 대필도 해줬어요. 그 새끼 인간말종이라고 그러면서 욕을 하는데. 그래서 전 처음에 좀 황당했죠.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제가 이 문제를 완전히 잘못 이해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더라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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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인지 반사적 방어인지(Abwehrreflex) 구별해야 할 것 같네요. 대충 이런 이야기입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육체노동자(물질노동자)의 생산품은 누가 만들었다는 Index가 없습니다. 자동차 부품에 “ou_topia가 만듬”이라는 딱지가 안 붙어 있습니다. (최근에 명품에 최종 컨트롤러가 누구임이라고 적혀있는 딱지를 보긴 했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육체노동자의 구체노동은 추상적인 노동으로 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Index가 있을 수가 없고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밖에 계산되지 않습니다. 반면, 지적노동의 전유자로 생각하는 시민, 특히 교양시민은 자기들의 노동이 육체와 구분된 추상적인 노동, 달리 표현하면 가치실체(Wertsubstanz)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만드는 (창조하는) 구체적인 것에는 반드시 “누가 만들었음”이라는 Index를 갖다 붙였죠. 그들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성찰의 시간(Reflexionszeit)이라고 하고 그 가치를 달리 계산했죠. 근대 이것이 지적노동의 자본하의 실질적 종속(reelle Subsumtion)에 따라 희박해지고 있죠. 진중권이 패러디를 하고 있다면 그가 지적노동의 실질적 종속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지적노동의 실질적 종속을 느끼는 반사적인 방어인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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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제가 이해한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쌍차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차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임금을 받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작가는 출판사와의 계약조건에 따라 원고료를 받거나 혹은 인세를 받겠죠. 작가들의 노동이 자동차 노동자들의 노동처럼 되려면 실제로 작가들의 노동에 기계제가 도입되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기 힘들것 같은데.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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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저도 생각이 어지럽습니다. 생산에 과학기술의 도입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거니가 직관적으로도 이해되는 부분인데... 우선 좀 간단한 것부터 보면 의사라는 계몽/교양시민의 대표적인 직업은 자유직업이었는데, 지금은 점점 더 임노동 직업으로 '전락'하고 있죠. 지금와선 노조도 만들고 독일의 경우 지난 몇년간 가장 치열한 파업을 한 직종이고... 우선 자본주의적 "형식규정(Formbestimmtheit)이 작가세계에도 도입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어쩌면 문학작품이 만화와 같은 serielle Produktion이 되지 않을까 하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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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직종과 관련해서 첨부하자면 독일의 경우 개원의사도 자기들이 하는 일의 가치를 임의적으로 책정할 수 있는 영역이 점점 더 축소되고 있죠. 환자치료하는 시간보다 저녁에 Kassenaerztliche Vereinigung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정리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고 불만이 팽배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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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한번 더 봤는데 결론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맑스가 주장했던 것은 이런 겁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수한 이해를 포기하고 보편적 이해를 위해 싸워야한다.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 맑스에게도 슬픔이 있었겠죠.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맑스는 장인과 직인, 도제들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부장적인 관계죠. 이 직인들은 스스로 장인이 된다는 이해를 통해 현존 질서에 연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이 어떤 것이건 상관이 없는 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자신의 노동 아래에 포섭되어 있었습니다. 맑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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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이렇습니다."따라서 중세의 수공업자들에게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특별한 노동 및 그 숙련에 대한 관심이 보여지며, 그 관심은 협의의 특정한 예술적 식견으로까지 고양될 수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 때문에 모든 중세의 수공업자는 완전히 자신의 노동에 몰두하였고 자신의 노동에 대해 하나의 안락한 예속 관계를 맺고 있었던바, 자신의 노동이 어떠한 것이건 상관이 없는 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자신의 노동 아래에 포섭되어 있었다." 독일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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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있는 곳 옆에 젊은 청년이 하는 신발수리가게가 있는데 지나갈 때 마다 짝지와 서로 저 청년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래요. 자기 [수공업] 일에 열중하는 모습 보기도 좋구요. 공장에서 일하면 기계 때려 부셔버리고 싶을 때도 있죠. 기계가 고장나면 제일 좋구. 기술자가 와서 얼른 못고치면 더 좋구. 님이 지적해 주신 부분은 노동의 자본하의 실질적 종속은 육체노동(장인의 손노동)과 정신노동 구분과 상관이 없다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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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기계제 도입에 반대하는건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영업자들입니다. 복사가게를 생각해봅시다. 복사가게는 최신형 기계를 들여놓지 않으면 장사가 안됩니다. 그러면 영세업자들이 몇년에 한번씩 기계 교체하면 남는게 있을까요. 이 사람들은 기계와의 싸움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왜 기계를 때려 부수고 싶어해요. 기계 없으면 일 못해요. 제일 짜증나는게 기계 고장나는거에요. 기계 고장나면 일 못하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어요. 전화해서 빨리 오라고 난리나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러다이즘 운동도 기계를 파괴한건 자본가들이 너무 악랄하게 나오니까 자본가들에게 치명적인 재산손실을 입히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한거지 러다이즘 운동은 그 본질에 있어서 기계 파괴 운동이 아니에요. 결국 기계 파괴하면 사형으로 다스리는 법이 나오게 됩니다. 물론 기계 도입되면 개별 사업장에서는 인원감축이 발생하겠죠.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기계의 도입으로 가장 피보는건 자영업자들이에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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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동자들은 기계가 하는 일을 사람한테 시키면 굉장히 싫어해요. 그리고 그런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업주를 경멸하고 멸시해요. 돈없다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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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가서 공장시설을 보호하는 사람들은 물론 노동자들이죠. 쌍차노동자들도 그랬고.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시간의 흐름과 노동에 초점을 맞춰 보려고요. 이게 무뭔지 알고 싶고. 때려 부수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건 나와 상관없이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 작업 중에 기계가 고장나는 수 밖에 없다는 거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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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독일엔 "슈타인 퀼러 휴식"이란게 있는데 1시간 노동에 5분 휴식이라 겁니다. 슈타인 퀼러가 금속노조위원장이었을 때 파업을 해서 도입한 거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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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들이 기계를 도입하는 것도 경쟁때문이고 노동자들이 기계가 멈추면 좋아하기보다는 짜증을 내는 것도 생존에 대한 불안때문입니다.다시 돌아가서 기계를 만드는건 노동자들인데 여기서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이 이루어지죠. 실제로 기계를 만들거나 그 기계를 가지고 조작하는 노동자들은 대체가능합니다. 작가들은 이 작품이 팔릴까 고민하죠. 자동차 노동자들은 이 자동차가 팔릴까 고민할 필요없습니다. 그 고민을 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올해 아반떼를 만들면 내년에는 아반떼 XD 만들면 됩니다. 님은 지적 노동 역시 여타의 노동처럼 자본에 실질적으로 종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종속은 서로 다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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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죠. 다르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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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Arbeit를 소외된 노동, 강제노동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을 같아 보이게 하는것이 화폐입니다. 누군 백만원 받고 누군 천만원 받고 이 차이밖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개나 소나 다 노동이라고 하지.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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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 여기서 하면 안되는데 ^^성노동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노동은 너희의 노동과 다를바없다고 하죠. 이게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우리가 무슨 방에서 둘이 노동해요. 말도 안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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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노동/전 맑스의 핵심 카테고리가 소외된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844년 "파리 수고"와 1867년 "자본[론]"간에는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파리 수고"까지는 아직 헤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다시 말해서 철학 책만 보고 노동을 철학적으로 접근했다는 것. 1867년 자본론은 방대한 자료를 공부하고 연구하여 집필. 자본론에서는 노동을 그저 "Verausgabung"이라고 가치중립적으로 정의하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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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서 진중권 얘기를 해봅시다. 진중권은 이선옥 글의 인용에 대해 법적 하자가 없다는걸 강조합니다. 저도 사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법적으로는 문제 없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힘들다는겁니다. 이것이 민중적 상식입니다. 컨택터스 같은 용역회사 직원들은 어떨까요. 그 노동이 아무리 법적으로 하자가 없어도 사회적으로 노동으로 인정받기 힘들어요. 바로 민중적 상식 때문입니다. 이 민중의 상식이 근본적으로 틀리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의 머리를 개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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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법이 하나라고 생각하죠. 고대 철학자들은 법은 두개가 있다고 했습니다."법에는 개별법과 일반법이 있다. 개별법이란 각 공동체가 만들어서 그 성원에게 적용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과 기록된 것이 있다. 일반법은 자연에 따른 것이다."
"법은 개별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이 있다. 개별적이라 함은 적혀진 것에 따라 통치되는 것이고, 일반적이라 함은 적혀지지 않은 것으로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라 하겠다."
"법은 두 가지로 나뉜다. 기록된 것과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폴리스의 정치는 적혀진 것에 따른 것이고, 관습에 따른 것은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 이는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적혀지지 않은 법에 의해 금지되어 행해지지 않는다. 이렇게 법은 적혀진 것과 적혀지지 않은 것이 있다."
이걸 잘 생각해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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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법/ 이건 번역문제이기도 한데요, 아시다시피 법은 독어로 Gesetz 혹은 Recht로 번역되죠. 진중권 관련 저의 초점은 자본주의하의 "주체성형성"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가라는 것이고요. 그래서 칸트를 참조하고 운운하거구. 이어서 물질노동과 정신노동의 주체성형성이 같은가 다른가구요. 물질노동의 주체성이 연대라면 작가의 주체성은 소위 "작품"이란 걸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건가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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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과 "작품"의 차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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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문제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해보여요.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이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한단 말인가요. 제가 보기엔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도착증인 것 같아요. 무명 르포작가의 권리가 그토록 중요해서? 아마도 아닐겁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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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종강 칼럼에 달린 댓글 중에서 무명 작가들은 선생님의 싸움을 지지합니다 이런거 많이 봤습니다. 결국 이 사람들은 쌍차 문제를 밀어내고 자신들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었습니다. 지겹지도 않나요? 저도 지겨워요. 무명 노동자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해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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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떠들어 되는 정신노동자들이 혹시 반사적 방어(Abwehrflex)를 하고 있지 않나 했구요. "작품"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도착증?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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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외"의 경험은 물질노동자들은 이미 다 한건데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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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룸펜자유주의자"들의 뻘질이구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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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임을 부정하지못하는 사회주의자들도 가담했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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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군지, 어떤 딱지가 누구에게 붙어 있는지 잘 모륻구요. 롬펜 자유주의를 운운한 배경은 이렇습니다.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의 지배와 압력에 계급의식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그저 ‘없는 자’로 떨어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합니다. 제가 룸펜 자유주의자라고 한 것은 마르크스에 기대어 자유시민이 자본의 압력과 지배에 계급의식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인지자본주의와 함께 유행하게 된 자유시민의 ‘다중지성’, ‘Multitude’가 바로 자유시민의 ‘계급의식’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죠. 이 부분도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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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홈피에서 그러고있는 애들이 다중지성이면 위키가 웃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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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그건 그냥 짜증 문제인데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 있어요. [의자놀이]와 관련해서 가장 화가 났던 건 사실 “재능기부”란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함의하는 건 수직적 접근인데, 까놓고 말하자면 “나는 노동자가 아니야”, “니들 불쌍해”란 의식이 깔려있는 접근이죠. 그 의식이야 어찌 할 수 없겠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이,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원년으로 한다면, 42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 기부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는 생각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노동자정당이 아직 없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말이었습니다.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노동자 정당이 있었다면, 아니 참신한 보수정당이 있었다면, 여론이 살아 있었다면, 대체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제겐 쌍용 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 그들과 연대하는 투쟁이 외로운 투쟁이었다는 걸 증명하는 말이었습니다. 근데 갑자기 누가 찾아옵니다. 도와주겠다고. 이에 대한 우려를 이선옥작가가 2012.5.10 글에서 잘 표현하고 있고요.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20510112034&Section=03). <의자놀이>관련 상당히 많은 부분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고요. 자유시민과 노동자의 연대형식이, 바로 이것이 논쟁의 본질이라고,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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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가치마저 부정당한 쌍용차 사태나는 쌍용차사태가 근대의 가치마저 부정당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상황의 총체라고 생각한다. 근대는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이뤄낸 시대다. 개인의 합리성을 존중하고 시민권이 인정되는 민주주의가 근대의 핵심이며 자본주의를 합리적인 경제체제로 받아들인 것도 근대이다. 그러나 쌍용차는 노동자들의 시민권을 해고라는 칼로 유린했으며 이들의 합리적인 판단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회계조작, 정부와 자본의 유착, 먹튀자본 등 시장경제마저 위협하는 반시장적인 행위들은 자본주의에도 반하는 것들이다. 이는 모던이 아니라 퇴행이며 새로운 질서가 아닌 변형된 악습에 불과하다."
저는 이런 식의 현실인식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봉건사회에서 종복 내지 머슴은 넓은 의미에서 고용주의 가족에 속했습니다. 주인의 의무 및 권리와 종복의 의무 및 권리 사이에는 엄청나게 불평등한 관계가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예컨대 종복은 반죽음이 되도록 두드려맞은 경우가 아니면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계약에 의해 협정된 근무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합법적인 이유가 없이 직무를 버리고 떠나는 하인이나 하녀는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 책임을 지게 되며, 주인은 경찰력의 강제수단을 빌어, 직무를 계속 수행하게끔 이들을 압송해 올 수 있었습니다. 대신 종복은 늙으면 죽을 때까지 주인의 집에서 기거할 수 있었습니다. 쌍차 사태는 모던한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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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를 부리는 미국의 대농장 주인들이 필요에 따라서 노동자를 fire and hire 하는 자본자를 무척 부러워했죠. 인권을 그리도 이야기했던 토머스 제퍼슨은 흑인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고요.쟁점은 모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선옥은 모던을 실체가 드러나는 빛 (계몽, enlightment, Aufklärung, les lumières)으로 이해하고 공지영은 모던을 바로 그 반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계몽의 변증법"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선옥은 모던을 프로젝트로 이해하고 공지영은 상태로 이해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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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이선옥씨는 운동하는 사람이지 작가는 아닙니다.글을 읽고난후의 느낌일뿐이지만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없는것같네요. 스마트폰이라 불편하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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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개념은 어쩔 수 없는/실체가 행위자의 의식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를 전제합니다. 운동가로서/의식의 투명성을 지향하는 프로젝트 진행자로 이선옥은 당연히 공지영의 입장을 비판 안 할 수 없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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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첨언하자면 지적노동의 실질적 종속이 일반화되고 있다는 징후는 자본주의 비판이 독일 교양시민(정통보수)의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짜이퉁을 포럼으로 하여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게 아닌가 합니다. 동 신문 발행인 쉬르마허의 글을 이곳에 소개하기도 했는데.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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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계속 이어지네요. 실질적 종속아래 이런 자유시민(문화를 창조하는 교양시민/과학기술의 소시민)의 룸펜화가 진행되고 있고, 이들을 프롤레타이아트라 칭하지 않고 프레카리아트라고 칭하는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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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노동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은 작가는 무조건 팔리는 작품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키에슬로프스키가 폴란드에서 검열과 싸우다가 나중에 폴란드 정부가 오로지 돈이 되는 작품을 만들라고 해서 결국 망명합니다.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실현하기 위해.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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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얘기 나누고 싶지만 저도 자야하기 때문에 T.T혹시 공장에서 노동자가 일하는거 보셨는지. 기계 앞에 있다가 기계 뒤에 있다가 왔다갔다 하는데, 결국 노동자는 기계의 틈새를 메꾼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작가들이 하는 일은 이런 일이 아닌데 어떻게 자본에 실질적으로 종속될 수 있죠. 가능하지 않을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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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작가들이 어쩌면 해방에너지의 마지막 창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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