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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자아가 [그저] 수용하는(aufnehmen) 대상은 순수한 일개로 등장한다. [여기서 "Aufnehmen"의 주역은 시각인 것 같다. 뭔가를 ‘일개’로 지각하지 위해서는 감각기관의 sensation 혹은 impression 안에 배경으로부터 뭔가가 선명한 윤곽선에 의해서 구별되어 드러나야 한다. 청각, 후각, 촉각 등보다 시각에 이런 윤곽선을 그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뭔가가 윤곽선에 의해서 [외적인] 형상(Form)으로 나타날 때 일개로서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의식의 대상은 이미 가공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자아는 그런 일개에서 개별성을 초탈하는 보편적인 {성질}도 지각한다(gewahr werden). [여기서 {성질}은 “이것은 한 그루 나무다.”에서처럼 형상을 분류하는 의식행위가 아닌가 한다. 이때 형상을 지각하는 일과 그것을 분류하는 것 사이의 구별은 분석상의 구별이지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의식행위는 아닌 것 같다. 형상지각과 그 분류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이킬 수 없게(immer schon) 이미 확정되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다시 말을 배우는 갓난아이의 상태로 떨어진다면 몰라도. 그래서 코끼리의 꼬리만 보고도 “이것은 코끼리”하는 것 같다. 근데 지각하는 의식은 이런 진술을(logos apophantikos) 가능하게 하는 transzendental한 배경을 테마로 정립하려고 하는 주제넘은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결과 의식은 [대상이 본질의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고 자긴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드리기만 한다는 고귀한 뜻(?)을 품고서] 일개[형상]으로 등장하는 대상의 본질이 바로 그 일개(성)라고 했는데 대상의 그런 첫 존재가 대상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고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의식은 대상의 이런 존재-존재론적 차이를 대상 쪽에 두지 않고, 개별적인 것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고만 생각한다.] 이어서 의식은 대상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참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답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결론 짖고 자기가 대상을 잘못 파악하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되면 자아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식으로(마태 9, 16-17)]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대상으로 그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가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전반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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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6) 이런 상황이 지각이 마주하는 대상의 기질(器質)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에 한해서 의식은 지각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때 의식은 대상을 그저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대로(rein=순수하게)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의식에게 안겨지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의식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뭔가를 [자의적으로] 행한다면, 이런 행위는 [대상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를 왜곡할 것이다. 대상은 참답고 보편적인 것이며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되는 반면 의식은 자기가 보더라도 가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의식에게는 대상을 잘못 담아내어 착각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은 자신의 지각행위에 [이것저것을 혼동하는 quid pro quo란] 착각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의식하고 있다1.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보편성 내에서는[한밤중에는 소들이 다 시커먼바(정신현상학, 서설 §16) “별다른 소”(=시커멓지 않는 소)가 있을 수 없듯이] 별다른 존재(Anderssein)가 존립할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뜬금없이(unmittelbar) 별다르게(selbst) 등장하는 것이고, 그 별다름이란 [곧바로] 소멸되고 파기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한편으론 대상의] 자기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론 그런 자기동일성에 어떤 변경도 가하지 않고] 자기동일성 그대로 담아내려는 의식의 태도에 있게 된다. 그러나 서로 다른 것이 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그의 파악이 갖는 서로 다른 계기들을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불일치가 발생하면, 그건 -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바 - 대상의 비진리가 될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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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5)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현 단계에서 요구되는(=지각하는 의식이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어떻게 발버둥 하는지 볼 수 있는) 범위까지만 전개해 보면(=거미줄을 쳐 보면), 이상의 둘로 갈라지는 축(Moment) 그 어는 한쪽에만 있지 않고 양쪽에 있을 때 비로소 지각의 진리로서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사물의 진리는 α) 서로 아무런 구애를 주고받지 않는 수동적인 보편성, 즉 다수의{성질}들이, 여기에 더 적합하게는 소재들이, 병존하는<또한>이라는 테두리이며, β) [감각적 규정들이 서로 무관하게 펼쳐지게 하는 즉자적인 부정이] 단순하다는 차원에서 다를 바 없는[대자적인] 단순한 부정, 달리 표현하면 대립적인(=반정립된) {성질}들을 배제하는[대자적인] 하나이며, 그리고 γ) 다수의{성질}들이[존재하는 모습] 그 자체로서 첫 두 계기[간의 아니면 안의] 관계, 즉 부정운동이 어떻게 무심한 터전(Element)과 관계하여[그 안에 구별이 생기게 하고] 그런 구별의 집합으로서 자신을 개진해 나가는지,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떻게[감각적 확신의 손가락이 지향하는] 독자적인[바로 그] 한 점이 그가 존립하는 매체 안에서[한 점에 머무르지 않고] 다수로 뻗어 나갈 수밖에 없는지에 있다. 이와 같이 구별들이[<또한>이라는 긍정적인=정립된] 무심한 매체에 속한다는 면에서 그들 역시 단지[즉자적으로] 자기와만 관계하고,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는[무심한] 보편적인 것이다. 반면, [대자적인] 부정적인(=반정립된) 통일에 속한다는 면에서 구별들은 동시에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와 같은 구별들의 대립적인 관계는<각자의 또한>에서 제거된{성질}들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감각적 보편성, 달리 표현하면 존재와 [감각적 확신이 행해지는 순간 바로 그 행위 자체에서 나타나는] 부정의 직접적인 통일이 곧바로{성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 보편성이 진정 성질이 되기 위해서는] {성질}(=독립체란 의미의Eigenschaft)로부터 하나(=단일성)와 순수한 보편성이 전개되어 서로 구별되어야 하고{성질}이[동시에] 이 둘을 다시[극과 극으로 치닫는 선을 굽혀 원을 만들듯이] 하나로 엮어야만 비로소 성질이 되는 것이다. 성질이 이와 같이[사물의 단일성과 보편성이라는] 순수한 본질적인 양 축(Momente)과 이렇게(=통일과 모순의 통일) 관계할 때 비로소 사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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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4) 위와 같은 [감각적 확신의 결과에서 드러난] 관계에서는 단지 긍정적인(=정립된) 보편성의 성격만이 관찰되고 전개되었다. 그러나 [감각적 확신의 결과에는]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다른 면도 드러나 있다. [이 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보자.] 다수의 [감각 규정으로만=즉자적으로만] 규정된 {성질}들이 아예 서로 무관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과의 관계에만 침몰되어 있다면, 그들은 {규정된} {성질}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규정}이란 [반성적/대자적] {규정}으로서 한 {성질}이 자신을 따로 구별하고 다른 {성질}과 대립(=반정립)적으로 관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대립(반정립)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반성적으로 규정된] {성질}들이 단순한 통일체라는 매체 안에서 함께 있을 수 없다. [{성질}들이 이렇게 대립(반정립)을 이루는 이유는 부정이 “순수한 본질”을 이루는 너나할 것 없는 무관한 부정(eine die Negative der anderen)만이 아니라, 타자에 대하여 “너는 아니다”라는 부정운동(die Nagation)을 하는 부정이기 때문이다.] 부정은 이러한 부정운동으로서 {성질}들에게 [또한] 본질적인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 이중성과 함께 구별도 “Hier ist nicht ein Baum" 등 그저 일련의 부정을 통해서 정립된 구별과 대립(반정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반성된 구별이라는 이중성을 띠게 된다.] 그래서 구별은 {성질들을} 무관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다른 것을 부정하는 구별이라는 한도 내에서 [부정운동에 의하여 부정된 {성질}들이] 단순한 매체 밖으로 떨어지게 하는 구별이 된다. 그래서 단순한 매체란 단지 <또한>이라는 아무런 구애와 속박이 없는 통일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로서 배타적인 통일체이기도 하다. — 하나, 이것은 부정운동의 [자신을 굽혀 자기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능동적인(selbst) 힘(Moment)으로서 자기와 단순하게 관계하는 가운데 다른 것을 배척하는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다. 이런 작용을 통해서 물성이 사물로 규정된다. [여기서 부정운동의 존재양식을 더 살펴보고 지나가야 하는데] {성질}에서 드러나는 부정운동은 [감각적 확신의 감관에 의해서 규정되는, 즉 수동적인] 규정성으로서 [존재의 직접성에 매몰되어 있는바] 존재의 직접성과 직접적으로 하나를 이룬다. 그리하여 존재의 직접성은 [감각적 확신이 생각하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운동과 이런(=직접적인) 통일을 두루 이루는 가운데 보편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부정운동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 하나로서 [보편적인] 통일에서 해방되어 보편적인 통일과 그에 대립하는 것이 한 짝(=통일과 모순의 통일/Einheit der Einheit und des Widerspruchs)이 되게 하는 부정운동으로서 스스로 [주체성이 깃든(selbst)] 즉자대자적인 것이다.
붙임:
이 단락의 마지막 부분 번역이 어렵다.
원문은 이렇다.
“An der Eigenschaft ist die Negation als Bestimmtheit, die unmittelbar eins ist mit der Unmittelbarkeit des Seins, welche durch diese Einheit mit der Negation Allgemeines ist; als Eins aber ist sie, wie sie von dieser Einheit mit dem Gegenteil befreit und an und für sich selbst ist.”
우선 관계문 "die unmittelbar ... Seins"의 주어가 Negation인지 아니면 Bstimmtheit인지 불분명하다.
그 다음 "als Eins aber ist sie"에서 sie가 Eigenschaft를 받는지, Negation을 받는지, 아니면 Bestimmtheit를 받는지 불분명하다.
둘다 Negation을 받는 것으로 번역했다. 전체 흐름의 구조상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그 구조는 die Nagation als로서 첫째는 die Negation als Bestimmtheit고 둘째는 die Negation als Eins 다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3) 그래서 [지각에서의] <이것>은 [직접적인 <이것>이 아니라 사상(=반성)규정으로서] <이것이 아닌 것>, 달리 표현하면 <이것을 거둬 치운 것>으로 정립된다. [지각의 부정은 이런 거둬치우기이기 때문에] 그 부정의 결과는 공허한 무(無)가 아니라, 규정된 무, 달리 표현하면 어떤 내용, 즉 [지시된] <이것>의 무인 것이다. 이런 관계로(=감각적인 <이것>을 거둬치운 것이기 때문에) 이 무에는 감각적인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직접적인 확신이 사념하는(=지시된) 개별적인 것으로 남아있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런 보편적인 것이 자신을 성질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거둬치우다/das Aufheben>는 우리가 부정[행위]에서 보았듯이 참으로 그 이중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아내는 표현이다. <거둬치우다>는 <거둬치워 없애버리다>라는 부정임과 동시에 <거둬치워 두다>라는 간직이다. [<이것이 아니다>라는 부정행위의 결과로 나타난] 무는 [감각적 확신의 <이것>의] 직접성을 간직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감각적인 것이다. 다만, 이 무(無)가 간직하는 직접성은 [모든 <이것>을 품는] 보편적인 직접성인 것이다. — [직접적 확신이 지시하는 <이것>이 사상규정상 모든 <이것>의 존재(= 모든 <이것>이 있다는 것)외 아무것도 아닌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감각규정이 첨가되어야 한다.] 존재가 보편적인 것에 속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존재에는 직접an ihm 매개 혹은 부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보편적인 것에는 사상규정과 함께 감각규정이 어울려 있다). 존재는 이런 관계를 그 직접성에서 바로 표현하는 가운데 일개의 구별된, 규정된 ["Das Hier ist ein Baum"과 같은] {성질}이 된다. 이와 같은 일개의 {성질}이 정립됨과 동시에 다수의 ["Das Hier ist ein Haus", "Das Hier ist ein Wald" 등] 그런 {성질}들이, 서로 부정하는(="Das Hier ist nicht ein Baum, sondern ein Haus"둥) 관계를 이루면서 정립된다. [그러나] 이 모든 {성질}들이 보편적인 것의 단순성 안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규정이 하나 더 추가되어야만 본래의 {성질}이 되는 이런 규정성들은 각기 자기와만 관계하고(=자기동일성만을 주장하고), 서로 무관하고, 다들 따로따로, 다른 이들로부터 구애받는 일 없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앞에서 말한 사상규정적인] 단순하고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보편성에 있는데, 이 보편성은 다시 그들과 구별되고 그들에 얽매어 있지 않다. 이 보편성은 [모든 직접적 <이것>이 사상(捨象)된= <이것>의 <나무>하고의 관계에 구애하지 않고, 오로지 <이것>과 <이것>과의 관계에서 <이것>이 <이것이 아닌 것>으로서 <지양된 이것>이 되는] 순수한 자기 자신과의 관계함, 달리 표현하면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모두 함께 널려있는 매체다. 이렇게 [감각적인] 규정성들이 보편성 안에 함께 있지만, 이 보편성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접촉하는 법이 없이 제각기 그 안을 채우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테두리 밖에서 따로 놀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위와 같은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보편성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함께 있지만] 서로 관계[간섭]하는 법이 없이 따로따로 논다. — 이런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매체를 하여간 물성 혹은 [감각적인 확신이 말하고 지시하는 <이것>에 보편성이란 가상으로 항상 따르는 사상규정상의] 순수한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매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감각적 확신이 말하고자/지시하고자 했던 것의 부정의 결과로 나타난] <여기>와 <지금>이다. 즉, [감각적 확신이 말하는 지시하는] 다수의 <여기> 혹은 <지금>이 단순하게 [한군데] 모여 있는 것이다. [근데 문제는 이런 다수의 규정성에 있다. 직접적 확신은 <이것>이 단순한 통일체일 뿐이라는 것에 대항하여, “그건 진부한 것이다. 그건 대명사 <이것>의 사용법을 부정이니 매개니 지양이니 등 알아먹기 힘든 말을 사용하면서 설명한 것일 뿐이다. 너는 내 손가락만 보고 내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내 손가락이 지시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헤겔 왈: “그것 역시 가상에 불과하다.”] [직접적 확신의 생각과는 달리] 다수의 [감각적인] 규정성 역시 단순한 보편적인 것일 뿐이다. [직접적 확신의 손끝에 달린 것을 살펴보자.] 여기 이 소금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여기>이면서 동시에 다층․다각적인 것이다. 그것은 하얗고 또한 찌르듯이 짜고, 또한 입방체이며, 또한 일정한 무게를 갖는 등 이렇게 계속 <또한>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다수의 {성질}들은 모두 단순한 <여기>라는 하나의 [테두리] 안에 있는데, 이때 각 {성질}은 그런 하나의 일부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온통 두루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소금이 일정 부분만 짜지 않고 온통 짜다.] 어떤 성질도 이 <여기>외 다른 <여기>를 갖지 않고, 모두가 이 <여기>안 어디에나 있고, 이 {성질}이 있는 곳에 또한 다른 {성질}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여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각 {성질}이 하나의 <여기>에 온통 꽉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이 없다. 흰색이 입방체에 영향을 주거나 변형을 가하는 일이 없다. 또 흰색과 입방체가 짠맛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다. 이렇게 어떤 {성질}도 다른 {성질}에 영향을 주는 법이 없고, 저마다 [아무런 구김 없이 순진하게 자기만을 드러내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기 자신과만의 단순한 관계 속에 침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성질}을 가만히 놔두고, 관계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구애가 없는 <또한>에 의해서 일뿐이다. [이렇게 쭉 살펴보니 물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또한>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이 <또한>이 바로 순수한 보편적인 것, 달리 표현하면 매체, 즉 {성질=감각 규정성}들을 총괄하는 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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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은 보편성을 터전으로 삼는다는/삼을 수밖에 없다는] 원리는[헤겔/우리가 감각적 확신을 관조하는 가운데] 발생하여 헤겔/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대한 헤겔/우리의 태도는 더 이상[갓 등장하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지 않다. 거기서는 헤겔/우리 역시 갓 등장하였는바, [감각적 확신의 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이젠 그런 수용이 아니라[지각을 관통하는 엄연한] 필연성에 따른 수용이 되었다. 이런[지각이 존재하는 근거․터전은 보편성이라는] 원리의 발생과 동시에[위에서 이야기한] 두 갈래의 축이 감각적 확신의 등장에서는 단지 헤겔/우리가[말하려고 하지 않는 감각적 확신을 쿡쿡 찔러서 말하게 하여] 밖으로 드러나게 한 것이지만[지각에 와서는 돌이킬 수 없게/지각의 필연적인 구조로] 생성된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두 갈래 축의 하나는[감각적 확신이 헤겔/우리의 요구에 응해 뭔가 다른 것을 계속 들어 올려 보여주지만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저 반복일 뿐인] 들어 올려 보여주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똑 같은 운동이 단지[감각적 확신이<이것> <저것>을 들여 올려 보여주고 또 보여주지만 전혀 색다른 것이 드러나지 않는/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것으로 생성된 것이다. 전자가 지각함이고 후자가 지각함이 마주하는 대상이다. [이렇게] 대상과 지각 운동은[차이 없는 반복 혹은 아무런 접힘이 없는 단순한 것으로서의] 본질상 동일한 것이다. 지각 운동은[그때그때 들어 올려 보여주는] 국면들을Momente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고 대상은 이런 국면들이 하나로 묶여진 것이다. 우리만 알고 지각은 모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für uns oder an sich 보편적인 것이 지각의 본질이 되는 것은 보편성이야말로[지각이 존재하는 근거․터전이라는= 보편성 없이는 지각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지각 존재의 근거․터전으로서의 원리라는] 추상에 견주어 보면 지각에서 구별되는 양대 축, 즉 지각하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에 비해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쪽 다[보편성 집행의 결과로서] 그 자체 보편적인 것 또는 본질이므로 둘 다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모르는 지각하는 의식 안에서는] 양대 축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거기서는 둘 중 하나만이 본질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과의 차이가 이쪽저쪽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다. 이중 단순한 것으로 규정되는 쪽, 즉 대상이 본질이 되고, 이런 대상은 지각되든 안 되든 지각함에 구애 받지 않는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지각함은 운동으로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내구성이 없는 부수적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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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마음 한 뜻으로 {대상}을 향하고 그것을 온통 감싸려는] 직접적 확신은 [자기가 하는 일의 결과가 실지로 진정 뭔지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망태에] 담긴 것을 놓고 [그건] 자기가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망태에] 담긴 것은 항상 보편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그 마음과 뜻이 지향하는]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취하려고 욕망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각은 [{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기어들어가] 자기에 대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지각은 [감각적 확신 혹은 마음과 달리] 온통 보편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직접적 확신과 달리 한 마음 한 뜻을 품을 수가 없고 그 마음이 갈라져 있으며] [이런 갈라짐은] 지각 안에서 바로 [나타나고], 이런 [원시적인] 구별[갈라짐]의 양대 축 역시 항상 보편적인 것이 된다. 즉 <나>라는 것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자아이며 <나>가 마주하는 대상은 항상 보편자로서의 대상인 것이다.
일러두기
- 직접적 확신의 [바깥] 대상과 지각의 [내재적] 대상을 구별하기 위하여 직접적 확신의 대상은 {대상}으로 표기함.
- 강조는 역자
참조
http://blog.jinbo.net/ou_topia/181
http://blog.jinbo.net/ou_topia/267
http://blog.jinbo.net/ou_topia/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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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부활의 종교라고 한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헛 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한다(고전15장14절).
무슨 말일까?
우선, 기독교는 죽음을 믿는 종교라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시작이 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런데 종교는 죽음을 믿지 않는다. 어떻게든 저승이 있어서 계속 살게 된다고들 한다. 최소한 죽지 않는 뭔가가 있다고들 한다. 근데 기독교는 여지없이 통째로 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
근데 이렇게 통째로 죽는데 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인가?
부활을 믿지 않는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질문에서 부활에 대한 상상을 일면 접할 수있다. 일곱형제가 차례로 같은 여자를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들이 부활할 때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질문에서 부활은 생의 일부가 아니라 생전체의 부활이라는 상상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의 요는 서로 모순을 빗는 성질이 어떻게 한 몸에 있을 수 있냐는 말이다(마가12장18절이하).
비슷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에서도 거론된 모양이다(고전15장). 몸의 부활(carnis resurrectio/살의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문제가 된 모양이다. 사도바울은 자연을 본보기로 들어, 씨의 예를 들어 몸의 부활을 설명한다.
핵심구절은 고전 15장 38절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몸을 주시되, 그 하나 하나의 씨앗에 각기 고유한 몸을 주십니다.” (ὁ δὲ θεὸς δίδωσιν αὐτῷ σῶμα καθὼς ἠθέλησεν, καὶ ἑκάστῳ τῶν σπερμάτων ἴδιον σῶμα.)
부활한 몸은 다 다르다는 말인가? 거기엔 종과 유의 구별이 없다는 말인가? 헤겔이 말한 각 내용이 고유의 자기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말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한 개인의 삶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문학과 같은 것인가? 부활한 몸은 살아있는 문학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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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을 번역한답시고 불로그를 만들어 놓고 한참 동안 딴 짓(?)만 했다. 뭔가 콱 막히면 더 파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계속해야/해서 끝을 봐야 하는데’라고 생각만 할 뿐 한던 일을 방치해 둔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근데 하두 오래동안 방치해 두어서 다시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부터 다시 시작하지?
먼저 왜 정신현상학이지라는 질문을 지침삼아 지금까지 이해한 것을 한번 정리해 보자. 어쩌면 정신현상학 입문 같은 것이 되겠다. 철학에는 ‘어쩌구저쩌구 입문’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사태에 직접 도전하여 사태의 운동을 따라 잡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번역도 마찬가지로 문장 하나 하나를 놓고 씨름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몸싸움 후 어렴풋하게 총체적으로 잡히는 것이 있는데 이런 걸 정리해 놓은 것이 입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입문은 나중에 읽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물론 ‘close reading’과 ‘입문’ 간에는 다시 변증법적인 긴장이 있겠지만.
정신현상학 서론 일부에 따라 정신현상학을 최소한 인식론 비판이라고 하자. 헤겔은 당시 인식론 밑바닥에 깔려있는 전제를 인식(das Erkennen)과 대상(헤겔의 용어로는das Absolute)간에 이 둘을 어떤 경우에도(schlechthin) 따로 갈라놓는(scheidend) 분단선(Grenze)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회의주의적인 인식론을 비판하는 헤겔의 근본 입장은 이와 상반되게 대상(das Absolute)이 ‘완전 무결하게’(an und für sich)이미 우리 곁에 와 있고 또 와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도하 헤겔은 인식과 대상이 분리되지 않는 현상을 사례로 들면서 회의주의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안 그래’ 혹은 ‘그게 다가 아니야’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헤겔은 이 길을 택하지 않고 이른바 ‘내재적 비판’이라는 길을 택했다.
정신현상학은 회의주의적 인식론과 함께 인식과 대상간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른바 ‘직접적 확신’이라는 현상에서 인식과 대상간의 분단이 엄연히 존재함을 보여준다. 서로 뭉크러져 있는 ‘Dieses’와 ‘Dieser’의 이면에는 이미 보편적인 ‘나’와 보편적인 ‘그것’간의 분단이 존재하고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상태로 떨어지려고 하는 것이라고 야유한다.
근데 문제는 이런 분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있다. 이런 분단하에서는 인식이 끝이 안보이는 자기모순에 빠져서 뒤죽박죽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지각의 발버둥에서 보여준다. 이 발버둥을 완전히 소화하고 매끈하게 번역하는게 어렵다.
‘지각’ 번역에 다시 착수하기 전에 ‘직접적 확신’과 관련해서 몇마디 하고 넘어가겠다.
헤겔이 이야기하는 ‘직접적 확신’은 ‘직접적 확신’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따라 잡지 못한다는 느낌을, 즉 규정미달(under-determined)이라는 느낌을 준다. 최소한 그 동기를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구조에서, 특히 병적인 욕망의 구조에서 나타나는 ‘직접적 확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다. ‘그녀’를 향하는 내 성적 욕구의 구조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반대인 것 같다. 건강하지 못한(?) 병적인 성욕은, 혹은 사랑은 ‘그녀’를 취하려고 하지만 ‘그녀’를 취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그녀’를 취하면서 무의식으로 혹은 기억속으로 침강한 그때 ‘그녀’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헤겔이 서론에서 말하는 의식의 ‘기억’은 의식과 대상이 돌이킬 수 없게 분단되었다는 것이지만 욕망의 기억은 그 반대인 것 같다. 나와 ‘그녀’가 한때 하나였으며 그때 내가 정말 내 자신이었다는 확신이 아닌가 한다. 이런 확신이 현실화되어야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정신현상학 마지막 장 ‘절대지’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전개되지 않은 내용의 첫 상태에서 이미] (an sich) 확신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전개된 현상을 보더라도]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의 형태를 띤다. … 이런 일치는 내용이 자기형태를 부여받았다는 데 있다.” (Die Wahrheit ist nicht nur an sich vollkommen der Gewißheit gleich, sondern hat auch die Gestalt der Gewißheit seiner selbst … Diese Gleichheit aber ist darin, daß der Inhalt die Gestalt des Selbsts erhal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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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말 두 마디
„Es giebt (…) einen Hospital, wohin sich jeder auf meine Art verunglükte Poët mit Ehren flüchten kann – die Philosophie.“ (1798년 11월 12일 횔더린이 노이퍼(Neuffer)에게 쓴 편지에서 인용)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인이 되려다가 [방항하고] 실패한 시인이라면 누구나 다 쪽팔리지 않고 도망쳐 [칩거할 수 있는] 철학이란 병원이 있다.
„[Es ist] die Schwäche der Dichtung Schillers, dass sie die Philosophie Kants in dichterische Form [bringt, und] die Schwäche der Philosophie Hegels, dass sie die Dichtung Hölderlins in philosophische Form [bringt].“ (Walter Bröcker, Das was kommt, gesehen von Nietzsche und Hölderlin, Pfullingen 1963, S. 50, zitiert nach: Peter Szondi, Poetik und Geschichtsphilosophie I, Frankfurt am Main 1974, S. 215)
쉴러 시가 빈약한 점은 칸트의 철학을 시형식으로 옮긴데 있고 헤겔 철학이 빈약한 점은 횔더린의 시를 철학형식으로 옮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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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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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을 들어 태크를 제대로 달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내 글을 찾느라 한참 헤맸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