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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5) - 가재걸음

(§15)

 

[원문]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Ding aber, oder für sich seiendes Eins ist es nur, insofern es nicht in dieser Beziehung auf andere steht; denn in dieser Beziehung ist vielmehr der Zusammenhang mit anderem gesetzt, und Zusammenhang mit anderem ist das Aufhören des Fürsichseins. Durch den absoluten Charakter gerade und seine Entgegensetzung verhält es sich zu andern, und ist wesentlich nur dies Verhalten; das Verhältnis aber ist die Negation seiner Selbstständigkeit und das Ding geht vielmehr durch seine wesentliche Eigenschaft zugrunde.”

 

1. 첫 문장

 

“Diese Bestimmtheit, welche den wesentlichen Charakter des Dings ausmacht und es von allen andern unterscheidet, ist nun so bestimmt, daß das Ding dadurch im Gegensatze mit andern ist, aber sich darin für sich erhalten soll.”

 

[번역 첫 시도]

 

“이와 같은 사물의 (피)규정성(Bestimmtheit)은 이제 사물의 주된(wesentlich) 소갈머리(Charakter)를 이루고 사물을 모든 다른 사물들로부터 구별해 주는 [재귀적] 규정성으로서 다음과 같은 두 갈래의 축을 충족하도록 규정된 것인데, 바로 그 (피)규정성을 통하여 사물이 다른 사물들과 대립하는 한 쌍을 이루지만 그 대립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독자적으로 지켜 유지하도록 하는 (피)규정성이다.”

 

[문법적으로 이상한 표현]

 

- “im Gegensatz mit”

 

이 표현이 생소하다. 일반적으로 ‘im Gegensatz zu’을 사용한다. 영어에서는 ‘in contrast with’와 ‘in contrast to’란 표현이 둘 다 문법적으로 맞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의미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im Gegensatz mit’란 표현이 단지 문법적으로 좀 이상한 표현인지, 아니면 전치사 ‘zu’가 ‘mit’로 대치된 배후에는 사태적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문장구조상 좀 이상한 것]

 

‘A가 B가 되게 하는 게 C인데, C는 다시 A가 B가 되게끔 규정되어야 한다.’란 구조다. 뭔가 뱀이 자기꼬리를 먹어 들어가는 것 같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정신’이란 것이 태동하나?]

 

헤겔은 <엔치클로페디아> 3권 <정신철학> §381/382에서 정신을 “im anderen bei sich selbst sein”이라고 한다.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를 대하듯 있는 상태다. 이걸 자유라고 하고. 이런 정신과 유사한 구조가 위 문장에서 엿보인다.

 

첨언하자며 미샤엘 토이니쎈(Michael Theunissen)은 위의 표현에서 자유와 함께 사랑의 구조를 읽는다. “im anderen bei sich selbst sein”에서 타자를 강조하면 ‘타자 속에서 [비로소] 자기를 찾는 사랑’이란 해석이 가능하고, 자기 자신을 강조하면 ‘타자 속에서[도] 자기를 대하는 자유’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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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4)

[아도르노]

 

아, 이제 똥 싸고 x 까는 짓이 펼쳐지겠네. [이런 쌍욕은 항상 품위를 유지하는 아도르노가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의식아, 넌 사물을 순수한 하나로 고수하기 위해서 사물로 하여금  ‘Das Anderssein’(=‘Nichtidentische’)을 배설하게(absondern) 하지만, 사물이 똥 싸고 아무리 뒤를 닦아도 똥이 떨어지지 않는다. 의식이(헤겔이?) 사물로 하여금 똥 닦기를 어떻게 하게 하는지 보자. 역겨운 ‘본질-비본질’을 운운하겠지, 꼬리에 계급장 딱지를 달아주듯이 ...

 

[의식과 이중창을 하기 시작하는 보이스 오버]

 

이제 [의식 내재적으로] 실재하는 대상의(gegenständliches Wesen) 모순은, 갈라져, [두 개의] 분리/차별된 사물들에게로 할당된 상태다. [이렇게 모순이 하나의 사물에서 말소된 걸 두고 구별까지 말소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구별은 분명(doch) [사물이 자기를 순수한 하나로 고수하기 위해서 구별을 자기를 ‘더럽히는’ 모순(물)로 간주하고  배설해(absondern) 버렸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darum)  [그 배설물은 말소되지 않고] 유리되어(absondern) 고립된(einzeln) 사물(=Anderssein)에게 뚝(selbst)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자(also). 분리/차별된(verschieden) 사물들은 대자적으로 정립된 것들로서(=따로따로 노는 것들로서) [이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때 충돌은 각 사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분리/차별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물과 분리/차별된 것이 되게 하여 서로(자기 자신과의 대립이 아니라 타자와) 대립하게 하는 충돌이다. 이런 관계상 각 사물 자체는 일개의 구별된 것으로 규정된 상태이며 [이런 상태에서 구별이 실재한다면] 이 실재하는 [꼰대-들러리라는] 구별은(wesentlicher Unterschied) [사물 자체에서 기인할 수 없고 단지] [마치 갓난아이가 똥 싸고 자신을 똥으로 범벅되게 하듯이] 사물이 [배설하고/absondern] 직접 거느리는 다른 사물들로부터(von den andern an ihm) 취한 것이다. 그래서 이 취함은 사물 자체에(an ihm selbst) 대립이 있는 것처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자적인 사물이 [독자적인 하나라는] 단순한  규정으로 고수(유지)되게 취하는 것이며, 이런 단순한 규정은 [주시하다시피] [배설하는] 사물을 [배설된] 사물들로부터 구별하는 [배설하는] 사물의 꼰대적인(wesentlich) 성격을 이루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배설하는] 사물에 차이(Verschiedenheit)가 [직접] 안겨져(an ihm) 있기 때문에, 바로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형형색색한 짜임새(Beschaffenheit)를 갖춘 현실적인(wirklich) 구별로 [배설하는] 사물에서 드러나야 한다. 단(allein), [하나라는] 규정성이 [배설하는] 사물의 꼰대(Wesen)를 이루고, 또 바로 이 규정성에 기대어 [배설하는] 사물이 자신을 다른 사물들과 구별하고 독존하므로 위와 같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sonstig:<=>umsonst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염두(念頭)한’(für nichts)이란 의미임), 형형색색한 짜임새(Beschaffenheit)는 [아도르노가 주목하고 눈을 떼지 않았던 ‘하루살이 존재’(ephemeroi)와 같은] 있으나마나한 것(das Unwesentliche)이다. 이런 관계로 [배설하는] 사물이 그의 통일성 안에서 이중의 <하는 한에서>(das gedoppelte Insofern)를 직접 거느리는(an ihm) 게 틀림없지만 단지 그 둘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갖는다[!!!]. 이렇게 가치를 [마치 worth ⊥ value로 대립시키듯이] [이리저리] 달리 함으로써 이중의 <하는 한에서> 간의 대립관계(Entgegengesetztsein)가 결국 [배설하는] 사물 자체 [안에서 일어나는] 진정한(wirklich) 대립(Entgegensetzung)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배설하는] 사물이 대립관계를 빗는 것은 절 대 적인 구별(a b s o l u t e r Unterschied=극으로 치닫는 Für sich/‘독자성’)에 의해서 대립[관계]에  들어가는 한에서만 그렇고, 이때 [배설하는] 사물은 이런 대립을 그 밖의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갖는 것이 된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sonstig:<=>value상) 형형색색함(Mannigfaltigkeit:<=> 사용가치상)은 사물의 필연적인 [구성요소]로서, [마치 교환관계에서 교환이 이루어지게 하는 사용가치가 필연적이듯이] 사물에 없어서는 안 되지만, [value상] 있으나마나한(unwesentlich)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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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3)

[보이스 오버]

(aside)

불쌍한 의식. 네가 가는 길은 필히 정신분열증으로 가는 길이다. 봐라. 네가 자기동일성이라고 했던 사물이 자기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 Il n'est pas comme il est. Il est l'autre. 이건 사실 네 분열이다. 넌 아직 네 안의 분열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다려. 너도 ‘Je suis l'autre.’할 날이 머지않다. 그때 네가 어떻게 처신할지 궁금하다. 당당하게 나 정신분열환자 할지, 네 정신분열증을 ‘건강한 생각’(gesunder Menschenverstand/상식)으로 가장할지, 아니면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나인 것으로 존재하지 못하는’(zu sein, was man nicht ist, und nicht zu sein, was man ist) 실존의 구렁텅이 앞에서 공포에 질린 나머지 키에르케고르와 같이 믿음으로 도주할지, 아니면 공포에 질린 뒷걸음질(Rückkehr)이 아니라 네 자신을 뒤집어(Umkehr:<=>복음서에서는 ‘회개’, 유물론적으로는 머리로 걷지 않고 발로 걷게 하는 뒤집기) 역사적인 유적존재로 널 바로 세울지 궁금하다.

 

 

결국 의식은 두 번째 (첫 번째 되풀이) 지각함에서의 처신(태도)양식, 즉 참다운 것으로서의 사물은 자기 동일한 것으로, 반면 자기 자신은 자기 비동일적인 것으로, 즉 [지각함에 ‘feeling’으로 찰싹 붙어 지각함과 무분별한 상태인] 자기동일성에서 벗어나 자기 안으로 뒷걸음질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도 역시 스스로 벗어난 상태로서 이제 사물이란 그에게(의식에게) 이전에는 사물의 몫과 의식의 몫으로 분리되어 나뉘어졌던 운동의 전체가 된다. 사물은 자기 안으로 반성된 하나다. [그래서] 사물은 대자적이다. 나아가(aber) 사물은 동시에(auch/또한:<=>동시에) 대타적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und zwar)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볼 때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이 내가 내 자신에게 낯선(=다른) 사람이 되듯이] 사물은 자기가 마치 타자에 대하여 있듯이(als es für Anderes ist/대타적) 자기 자신에게(대자적으로) 타자가(ein Anderes für sich) 된다. 따라서 사물은 대자적이면서 동시에(auch) 대타적인 이중의 분리된(=‘이중’간 아무런 매개가 없는) 존재다. 근데 사물은 하나이지 않았던가? 하나(로)있음(Einssein)은 분명(aber) 이와 같은 사물의 분리(Verschiedenheit)와 모순을 빗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의식이 [사물의 이런 모순을 파기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하나-안으로-정립함(In-eins-setzen)을 자기 탓으로 돌려 사물에서 멀리 해야 하지 않는가? 그래서 의식은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즉 사물이 대자적으로 있는 한(insofern) 대타적으로 있지 않다고? 그러나 [의식이 사물을 이런 모순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아무리 요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를 해도] 이것 하나에 걸리는데(allein), 그건 아무튼 사물 자체에 역시, 의식이 [스스로] 경험한 것처럼, 하나(로)있음(Einssein)이 귀속된다는 점이다. [즉] 사물은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을 [의식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wesentlich) 소유한다(Das Ding ist wesentlich in sich reflektiert). [그래서] 결국 서로 아랑곳하지 않는(무관한) 구별, 즉 <또한>은 틀림없이 하나(로)있음(Einssein)으로서의 사물과 맞닿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Einssein ⊥ das Auch)가 [전체 안에서 통일체를 이루는 Momente로서 서로 구별된 것이 아니라] 차별된/분리된(verschieden) 것이므로 똑같은(=일개의) 사물과 맞닿아 떨어질 수 없고, 어디까지나 차별된/분리된 사물들과 맞닿아 떨어진다. [의식 내재적으로] 실재하는 대상(an dem gegenständlichen Wesen)에서 추상적으로(überhaupt) 드러나는 모순은 [두 갈래로] 찢어져서 두 개의 대상에 할당된 모순이다. 다시 말해서(also) 사물은 즉자대자적, 즉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임이 틀림없지만 이런 자기 자신과의 통일(Einheit mit sich selbst)이 다른 사물들에 의해서 [요동되어] 파괴되는(stören/‘어지럽게 하다’, '흩어지게 하다', '파괴하다'등의 어원적 의미가 있음) 것이다. 이렇게 사물의 통일성(Einheit)이 고수(유지)되고, 동시에 [추상적인] 통일성을 파괴하는 [자기 자신과의 통일이 아닌 모습으로 현존(할 수밖에 없는)하는] 다른 존재(das Anderssein)도 허락(유지)되는데, [단지] [추상적인 대상인] 사물 밖으로뿐만 아니라 의식 밖으로까지 [추방된] 상태로(만) 허락(유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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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2)

[보이스 오버]

 

자 이제 의식이 이전에 [대상과 지각간 불일치가 발생할 때의 비진리를] 자기의 탓으로 돌렸던 것과 지금 자기의 탓으로 돌리는 것, 그리고 이전에 [진리인] 사물의 전유물(專有物)로 확정했던 것과 지금 확정하는 것을 돌이켜보자. 그러면 의식이 번갈아가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물을 똑 같이 두 갈래의 것, 즉 여럿이 없는 순수한 하나와 [이에 대립되는] 독자적인 물질들로 해상(解像)된 또한으로 만든다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국 의식은 이와 같은 비교를 통해서, 그가 진리를 취할 때, 받아들임(Auffassen)자기-안으로-뒷걸음질함(In-sich-zurückgehen)이란 차이(Verschiedenheit)가 자기에게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다운 것 자체, 즉 사물이 이와 같은 이중적인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함께 [사물에 대한] 경험으로 [의식에게] 남게 되는 것은 사물이 나타날 때, 받아들이는 의식(das auffassende Bewußtsein)에게는 단지 특정한 양식으로(auf eine bestimmte Weise) 나타나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런 [의식에게 자신을 드러냈던] 양식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반성된 것, 달리 표현하면  사물이 [하나의 진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립되는 진리를 그 자체에서(an ihm selbst=사물에서 진리와 이에 대립하는 진리가 아직 분별되지 않은 상태/Ungeschiedenheit, 즉 아직 für sich가 아닌 상태) 갖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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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1)

[보이스 오버]

 

허참, 저놈 봐라! 제법인데. 우주의 신비를 깨닫네. 처음엔 달이 지구에 찰싹 붙어서 지구와 함께 원을 그리듯이 다람쥐 체 바퀴돌기만 하더니, 이젠  달이 지구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원을 그리듯이 지각함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도 원을 그리네! 그러나 “원들의 원”(“ein Kreis von Kreisen”, 논리학, 절대적 이념)은 소원하기 그지없다.

 

 

위와 같이 개진된 지각함에서는 이제 의식이 지각함과 동시에 [단지 진리(=대상)로부터 꺾여 나와 자기 안으로 뒷걸음질하는 가운데 지각함으로부터도 떨어져 나와 지각함과 대상(=진리)을 마주하는데 그치는 일직선의 반성운동만을 하지 않고] [직선의 처음과 끝을 굽혀 연결하여 원을 그리듯이] 자기를 자기 자신 안으로  다시 한 번 더 꺾어 들어가는 반성[운동]을 하고, 그러는 가운데 지각함에서 <또한>에 대립되는 모멘트(Moment)가 발견됨을 스스로 의식한다. 이 모멘트(Moment)를 명명하자면(aber) 사물의 자기(자신과의)통일성(Einheit des Dings mit sich selbst)으로서 모든 구별을 자기 밖으로 따돌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것을 의식이 짊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가 되는 사물 자체는 [자기(자신과의)통일성이 없고, 단지] 다수의 차별된 그리고 독립적인 성질들의 존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언명이 있다. 예컨대 사물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그리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 있다는 등 갖가지로 언명된다. 그러나 사물이 흰색인 한에서 입체적이지 않고, 그리고 흰색이고 입체적인 한에서 톡 쏘는 짠맛이 아니다. 이런 성질들을 하나-안으로-정립함(In-eins-setzen)오직 의식이 떠맡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의식은 사물(안)에서는 성질들이 [안쪽으로 붕괴되듯이] 하나로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앞에서 개진된 사물에 따르면 진리인 사물에서 성질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의식은 ‘한에 있어서’(das Insofern)란 표현을 차용하는데, 의식은 이 표현의 힘을 빌려 성질들을 겹치지 않게 펼쳐 사물을 [일반매체가 되는] <또한>으로 유지한다. 그러나 의식이, 성질이라고 명명된 것이 자유로운 물질(freie Materie)로 표상되게끔 통일(Einssein)을 [사물에서는 말끔히 말소하고 오로지 자기의 것으로만 하여] 짊어질 때 비로소 의식이 진정한 의미로 통일을 짊어지게 된다. 사물은 이렇게, 물질들의 집합이 되고, 그리고 하나가 되는 대신 그저 에워싸는 표면만이 되는 가운데 진정한 <또한>으로 우뚝 추켜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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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10)

(§ 10)

 

[보이스 오버]:

 

잠깐.

 

지각함을 되풀이 하의식의 결론은 사실 이렇다 (aber).

 

이와 같이 의식이 짊어지는 차별된(verschieden) 측면들은 각자 일반매체 안에서 따로따로 발견되는 것으로 있다는 간주아래 규정된 것이다. 여기서 흰 것은 오로지 검은 것과의 대립관계에서만 그럴 뿐이다. 다른 측면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다른 것들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이 하나인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하나인 사물이 자신의 힘으로(von sich aus) 다른 것들을 자기 밖으로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규정성의 힘을 빌려(durch die Bestimmtheit) 그리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로 있음(Eins zu sein)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자기-자신과의-관계함(Aufsichselbstbeziehen)이며 사물이 하나로 있음으로써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와 똑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also) [즉자적인 하나와 여러 대자적인 규정성(=성질)들이, 의식의 생각하는 것처럼 대상과 반성하는 의식으로 분리․분포되어 있지 않고, 이와 달리] 사물들 자체가 즉자대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사물들 자체에서 즉자대자적인 규정성이 드러난다.) 사물들은 이렇게 [스스로] 성질들을 가짐으로써 각자 다른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고 [여기서] 성질이란 [한편으로는]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사물 고유의 성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대자적인] 규정성들 중 그 하나이기 때문에, 사물은 다수의 성질들을 갖는다.

 

[역자의 몰이해]:

 

원문:

 

“Denn vors erste ist das Ding das Wahre, es ist an sich selbst; und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sein eigenes Wesen, nicht um anderer willen;”

 

1) “Es (=das Ding) ist an sich selbst.” 무슨 말이지?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은 것과 상관이 있는가? 이건 대상이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이런 자기동일성을 존재와 본질 간에 아무런 분리가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2) “Was an ihm (=dem Ding) ist, ist an ihm(=dem Ding) als sein eigenes Wesen.” "was an ihm ist"를 대상의 성질로 읽고, 성질이 대상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번역했는데, 이건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이 문장의 주어(부)는 “was an ihm ist”다. 그리고 뒤 부분의 소유대명사 “sein”은 주어(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본질’은 대상의 것이 아니라 성질의 것이다. 이 문장의 소유대명사 “sein”이 그 앞의 “an ihm”의 "ihm"(=대상)을 받으려면 문법상 ‘dessen’이 와야 한다. 즉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dessen eigenes Wesen.'이 되어야 한다. 소아시절부터 라틴어 문법을 신물 나게 훈련받은 헤겔이 이런 구별을 안 했을 리 없다.

 

3) 여기서 키포인트는 성질이 대상의 본질(Wesen)이 된다는 게 아니라, 성질이 어떤 양식으로 대상에 와 있는지(동사적인 의미로서의 wesen)에 있다. 이걸 흘렸다.

 

4) 성질을 대상의 본질로 읽으면, “um anderer willen”을 이해할 수 없다. 성질이 대상에 와 있는 상태는 연인들이 만날 때 자기 짝만 바라보는, 서로 푹 빠지는 모습과 같다. 다른 여성/남성에게 한 눈 팔지 않는다.  

 

[보이스 오버]

 

[상황이 왜  이렇게 되는지 다시 한 번 쭉 훑어보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았는데, 이것은 우선 사물이 [존재와 본질이라는 분리가 없는,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자기직접태}(an sich selbst)가 되고 이런 사물에 안겨진 것은 거기에 온통 푹 빠지는 양식으로 실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것들을 전혀 염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규정된 성질들도 [역시] 다른 사물들을 염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들에게 눈짓하여 그들 앞으로 나아가는 {für(위하여)의 원래 의미인 vor(앞으로)에 기대에 이렇게 번역했다.} 법이 없이 오직 [한] 사물 자체에 안긴 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 그리고 각기 서로 구별하는 성질이 되어야만 비로소 [한] 사물에 안기는 규정된 성질들이 된다. 그리고 셋째로 규정된 성질들이 이렇게 물성 안에 존재함으로써 즉자대자적인 것이 되어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지각을 이해하려는 의식이 첫 되풀이에서 사물은 하나이고 성질들은 의식의 반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는 달리] 사실 사물 자체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고, [이렇게 또한으로 이어지는 여러 성질들을 갖는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함을 되풀이 하는 의식의 추상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사물이 또한, 즉 일반매체가 된다. 이런 일반매체 안에서는 다수의 성질들이 서로 겹치는 일이 없이 떨어져 존립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하거나 파기하는 법이 없다. 사물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참답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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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9)

(§ 9)

 

[보이스 오버]:

 

불쌍한 의식. 확신의 줄이 끊어져 ‘이것’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이젠 확실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지각함’에서도 떨어져 나오는구나. ‘feeling’으로 거기에 찰싹 붙어(‘intimately’) 있더니. 근데 아직도 덜 떨어졌어. 필히, 탯줄이 완벽하게 잘려 뚝 떨어져(abtrennen) 나올 거야.

 

정신 차려. 네가 마주하는 것이 처음엔 ‘이것’뿐이었는데, 이젠 많아졌다.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이제 지각함만이 아니다. 대상을 지각함과 동시에 거기서 한 발 떨어져 나와 지각함을 보는 의식이다.

 

[보이스 오버]:

 

되풀이에서 벗어나는 키를 찾아군. 자신이 뭔지 뭔가 알아본 것 같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걸. 되풀이를 서너 번 더 해야 할 텐데...

 

암튼, 첫 되풀이가 어떤지 보자 (zuerst).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이제 나는 사물을 하나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라는 이 참다운 규정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각함의 운동 속에서 이와 모순되는 것이 발견되는 경우 나는 그걸 내 반성의 [결과로]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지각하는데 뜬금없이 사물의 성질인 듯이 보이는 차별된(verschieden) 성질들도 튕겨 나온다. 근데 사물은 오로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지 않았던가. [둘을 만드는] 차이(Verschiedenheit)가 사물에 있다면 사물은 더 이상 하나일 수 없으므로 우리는 앞의 차이가 우리 몫으로 떨어지는 일이라고 의식한다.

 

[역자 보이스]:

 

왜 ‘ich’(나)가 갑자기 ‘wir’(우리)가 됐지?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게 이렇게 쉬운가? 모두가 똑 같은 감성이라는 추상적인 우리인가? 투쟁의 결과인 상호인정으로서의 우리가 진정한 우리가 아닌가? 이런 추상적인 우리는 막다른 골목길이 아닌가?

 

[지각함을 되풀이하는 의식의 독백]:

 

사실 그렇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사물이 하얀 것은 오로지 우리 눈에 갖다 대서 그렇고, 우리 혀에 갖다  대면 또한  톡 쏘는 짠맛이 나고, 우리 손의 촉각에 갖다 대면 또한 입체적이다. 이런 측면들의 전반적인 차이는(gänzliche Verschiedenheit) 우리가 사물로부터 [추상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로부터 취하는 것이다. 사물의 측면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허물어져] 이리저리 갈라지는 일은 혀와 눈이 완전히 구별되어(ganz unterschieden) 있듯이 서로 완전히 구별되어 있는 다양한 감각기관을 갖는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일이다.

 

[역자 보이스]:

 

차이(Verschiedenheit)와 구별(Unterschied) 간의 차이가 말소되었다. 왜? 감각기관들을 통일체로 엮는 힘이 우리에게 있어서? 감각기관의 애당초의 상태는 감각기관들이 해체되는 치매상태가 아닐까? 감각기관들 간의 차이가 구별이 되려면 감각기관들이 어떻게 통일체로 역어지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그 설명이 없다.

 

[쇼펜하우어]:

 

그래서 나는 헤겔철학을 개똥철학(Afterphilosophie)이라고 했지. 의지야 의지. 욕망!

 

[추상적인 우리가 된 의식의 독백]:

 

그래서 이제 [다양한 감각기관의 집합체로서의] 우리가 일반매체(allgemeines Medium)가 되고, 이런 매체 안에서 [통․공시적으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이런저런 감각들이 [집합체의] 한 면으로(Moment) 고립되어 나와 [다른 감각과 전혀 관계를 맺지 않고] 자기와만 관계하는 대자적인 것으로 존재한다. [앞에서는 일반매체가 사물에서 드러나는 즉자적인 규정이었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일반매체로 존재한다는 규정을 우리의 반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사물의 자기동일성과 사물은 하나로 존재한다는 진리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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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8)

(§ 8) 결국 의식은 앞의 되풀이를 필연적으로 재개하여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통과하게 된다. 근데 첫 번째와 달라진 것이 있다. 의식은 이제 지각함이란 게 뭔지 경험한 의식이다. 즉 지각함의 결과와 진리가 지각함의 해체, 달리 표현하면 의식이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걸 경험한 의식이다. 이 경험에 의해서 지각함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짜여 진 것인지 [우리/헤겔뿐만 아니라] 의식에게[도] 분명해졌다. 지각함이란, 의식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달리, 단순하고 순수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대상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진리(=대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반성이란 게 분명해 졌다. 의식의 자기 자신 안으로의 뒷걸음질은(Rückkehr=Umkehr?) 순수한 받아들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진리(=대상)에 변화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뒷걸음질이 지각함에게 본질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의식은 지각함의 이런 면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인식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결과를 짊어짐으로써 참다운 대상을 순수하게 유지할 거라고 생각한다. — 일이 이렇게 되면, 지각함에서도 감각적 확신에서와 같이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가는 면이 [우리/헤겔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의식의 눈앞에[도] 놓이게 된다. 단지 지금 이 단계에서는 감각적 확신에서와 좀 다른 의미로 그렇다. 감각적 확신에서는 의식이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감으로써 진리가 의식 안으로 이동했다. 이 점에 기대어 여기서도 위와 같은 상황을 마치 지각함의 진리가 의식의 몫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의식은 오히려 지각함에서 일어나는 비진리가 자기의 몫이라고 인식한다.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의식은 동시에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파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의식은 진리(=대상)를 받아들임에서 지각함에서의 비진리를 구별하여 그 비진리를 정정한다. 이렇게 비진리가 의식의 몫이 되지만, 의식이 이런 수정을 스스로 수행하는 한에서, 지각함의 참모습이란 의미로서의 진리는 의식의 몫이 된다. 그래서 우리/헤겔이 이제 살펴볼 의식의 태도는 더 이상 [밖으로 향하는 눈길만 되는 몰아지경의] 그저 지각함만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의 반성을 의식하고 이런 반성과 단순한 받아들임을 엄격하게 분리하여 단순한 받아들임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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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 7)

(§7) 이제 의식이 지각행위를 펼쳐가는 가운데 실지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지켜보자. 다만, 지켜보는 우리들/헤겔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상과 대상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먼저] 전개해 봄으로써 그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의식이 체험할 경험을 내다보고 있다. 그래서 의식의 경험은 단지 [우리/헤겔이 알고 있는 필연적인] 전개 안에 널려있는 모순의 [의식에게 나타나는 현실적인] 전개가 될 것이다.

 

[지각하는 의식의 독백]:

 

나는 나다. 나는 ‘Je suis l'autre’가 아니다. 대상과 마찬가지로 내 안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첫 문장 관계절에서 ‘ich’를 ‘Ich’로 표기했는데, 이런 내용을 함유하는 것 같다.] 내가 그저 받아들이기만(aufnehmen) 하는 대상은 순전히 일개의 개물(흄: “a single object”=“a unity”=“ein Einfaches”)로 등장한다. 나는 또한 일개의 대상에서 {성질}(=이 {나무})도 알아본다(gewahr werden). 근데 이 {성질}은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별성을 초탈(超脫)한다. 어, 뭔가 이상하다. 이제 보니까 일개의 모습으로 내 곁에 와 있었던 [명사 Wesen을 동사 wesen의 의미로 번역함] 대상의 첫 존재가 그의 참다운 존재가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지? 어떻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함께 있을 수 있지?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대상은 분명 참다운 것이다. 그럼 참답지 않는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란 말인데? 혹 내가 대상을 잘못 받아들이지 않았나? 맞아, 잘못 받아들인 게 틀림없어. 고쳐야 돼. 개별성을 버려야 해. {성질}의 보편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일개의 개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모든 개물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해. 안 그럴 수 없어. 근데 뭔가 좀 다른 {성질}도 보인다. 다른 개물과 대립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울타리를 쳐주는(=horizein=bestimmen=제한하다/정의하다/규정하다) {성질}(=body?)이네. 근데 뭔가 또 어긋난다.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모든 개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일반 공동체로, 달리 표현하면 개물과 개물의 연속성으로 규정했을 때 대상을 잘못 받아들인 게 아니었나? 그런 것 같다. [울타리를 치는] 성질의 특수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뭔가 달리 해야 해. 개물과 개물을 연속성으로 잇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연속성을 절단하여 다른 개물을 [울타리 밖으로 쫒아내고] 내 곁에 와 있는 것을 배타적인 하나로 자리매김해야해. 어, 근데 뭐야? 이렇게 단절되어 있는 <하나>에 서로 아무런 영향을 주고받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수의 {성질}(=쓴맛, 단맛 등)들이 있잖아. 뭘 또 잘못했지? 대상을 배타적인 <하나>로 받아들인 게 잘못이야. 대상은 그런 게 아니라 이젠 오히려 앞에서 이야기된 일반(=개물과 개물을 차별하지 않고 이어주는]연속성과 비교할 수 있는 일반적인(=갖가지 성질에게 접근이 허용된] 공동매체(allgemeines gemeinschaftliches Medium)가 아닐까? 맞아. 이런 일반적인 공동매체 안에서 [쓴맛, 크고 작음, 부드러움 등] 다수의 성질들이 존재하는 게 분명해. 근데 이 성질들은 감각적 보편성으로서 각기 홀로(jede für sich) 존재하고, [각 감각기관에 따라] 규정된 것으로서 다른 성질들을 배척하지 않는가? 그럼 결국 내가 지각하는 게 뭐지? [쓴맛이면 오로지 쓴맛일 뿐인] 단순하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das Wahre=참다운 것)이 아닌가? 일반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각적인] 성질 하나하나(einzelne)를 따로따로(für sich) 지각하는 게 아닌가? 그럼 [감각적인] 성질은, <하나>에 달려있지도 않고 다른 {성질}과 관계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야기된] {성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규정된 존재(bestimmtes Sein)도 아니지 않는가?

 

[보이스 오버]:

 

{성질}이 {성질}로 규정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에 달려서 (=이 {나무}=bestimmtes Sein/규정된 존재) 다른 {성질}과 관계하는 상황에서만 그렇다. [뚝 떨어져 홀로 있는 감각적] 성질은 더 이상 스스로 부정[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순수하게 자기 자신과만 관계하는 것(dies reine Sichaufsichselbstbeziehen)으로 머무르는, 온통 감각적 존재(sinnliches Sein)일 뿐이다. [지각하는 의식이 이 단계에 오면] 그는 [결국] 감각적 존재를 대하게 되어 다시 단지 하나의 사념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결국 지각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각의 태동상태인]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일이 따 끝나지 않는다. 서로 한 쌍을 이루는 감각적 존재와 사념이 스스로 지각행위로 다시 넘어가게 되어 있다.

 

[지각하는 의식]:

 

내가 시시포스야? 애써 정상에 굴려 올려놓은 돌이 다시 원점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수용해야만 하는 시시포스야?

 

환장할 일이다. 내가 애써 지각한 것이 결국 감각적 존재가 되어 다시 지각의 원점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아 또 반복과 반복의 되풀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다시 똑 같은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걷잡을 수 없는 되풀이(Kreislauf)에 휘말려 들어가야만 하는가?

 

시시포스야, 넌 어땠어? 다음에 돌을 굴려 올라갈 때에는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하면 되고 전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고 좀 쉽게 할 수 없었어?

 

너도 나와 같이 매순간마다의 애씀과 모든 애씀이 아무런 흔적과 결과를 허용하지 않는 파기에 의해 남김없이 사라지는 걸 맛보았니

 

[보이스 오버]:

 

ㅋㅋ. 처음과 끝을 연결하여 원을 만들어 놓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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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현상학 A. 의식 II. 지각; 혹은 사물과 착각 (번역 재개) -가재걸음: (§ 6) 분석 및 번역 (6) 나머지

„Das Wahrnehmende hat das Bewußtsein der Möglichkeit der Täuschung; denn in der Allgemeinheit, welche das Prinzip ist, ist das Anderssein selbst unmittelbar für es, aber als das Nichtige, Aufgehobene.“


„지각하는 것은 Taeuschung(착각):<=>Tausch(교환)의 가능성을 [느낌으로=“intimately"]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각의 존재근거․터전이 되는 [자기동일성이란] 보편성(안)에서는 [자기비동일성(Anderssein)이 있을 수 없는데, 있다면] 다만 의식에 대해서만 의식도 모르게 (unmittelbar) 뜬금없이(selbst=아무런 관계없이) 등장하는 것일 뿐이지 보편성(안)에서는 [아무런 가치 없이] 거둬치워져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5)

„Sein Kriterium der Wahrheit ist daher die Sichselbstgleichheit, und sein Verhalten als sich selbst gleiches aufzufassen.“

 

„그래서 지각하는 의식이 갖는 진리의 기준은 [한편으론 대상의] 자기동일성이며, [다른 한편으론] 의식의 태도가 되는데, 이때 의식은 [대상의 자기동일성에 눈을 맞추고] 뭔가를 담아내는데 있어서 [모순을 빗는 일이 없도록] 자기 자신 [역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도록 처신한다.“


 

이 문장의 쉼표가 이상하다. 그저 잘못 찍은 쉼표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두 개의 문장인지 한 문장인지 아리송하다. ‘und'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보면 문법상 쉼표가 올 수 없다. 두 개의 문장으로 보면 두 번째 문장이 엉터리다. 그래서 'und' 로 연결된 한 문장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럼 쉼표가 올 수 없다. 만약 헤겔이 문법상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쉼표를 찍었다면, 왜 그랬을까? 지각에서 의식이 자신과 대상이 확고하게 분리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암튼 이런 분리를 ‚한편, 다른 한편’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의식이 여기서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뭔가를 뭔가로’(etwas als etwas) 파악하는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변함없는 그릇으로(als sich selbst gleiches) 뭔가를 그저 담아내는 것이다.

 

 

6)

 

„Indem zugleich das Verschiedene für es ist, ist es ein Beziehen der verschiedenen Momente seines Auffassens aufeinander; wenn sich aber in dieser Vergleichung eine Ungleichheit hervortut, so ist dies nicht eine Unwahrheit des Gegenstandes, denn er ist das sich selbst Gleiche, sondern des Wahrnehmens.“


 

„[그러나] [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차별되는 것이 함께/동시에 지각하는 의식에 대하여 있으므로 지각하는 의식이 취하는 태도는 결국 자기가 매순간 뭘 담아냈는지 서로 견주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교에서 모순이 발생하면, 그건 - 대상은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바 - 대상의 비진리가 될 수 없고 지각행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지각하는 의식은 받아들인다].“ 


 

"zugleich"와 "verschiedene Momente"을 일관성있게 번역하는 게 어렵다. 여기서 Momente는 통일체(Einheit) 안에서 구별되는(unterschieden) Momente가 아니다. 우선 원문에 “unterschiedene Momente"라 하지 않고 ”verschiedene Momente"라고 하고 있다. 우리/헤겔에게만 통일체 안에서, 통일을 이루게 하는 unterschiedene Momente이지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렇지 않다. 지각하는 의식은 통일을 이루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verschiedene Momente"는 단지 아무런 관계없이 갈라지는, 그저 흐르는 시간적인 의미밖에 없다 (물론 지각하는 의식에게). 그래서 ‘verschiedene Momente’를 ‘매순간’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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