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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보이스 오버]:
잠깐.
지각함을 되풀이 하는 의식의 결론은 사실 이렇다 (aber).
이와 같이 의식이 짊어지는 차별된(verschieden) 측면들은 각자 일반매체 안에서 따로따로 발견되는 것으로 있다는 간주아래 규정된 것이다. 여기서 흰 것은 오로지 검은 것과의 대립관계에서만 그럴 뿐이다. 다른 측면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마찬가지로 사물이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다른 것들에게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이 하나인 것 그 자체만을 놓고 보면, 하나인 사물이 자신의 힘으로(von sich aus) 다른 것들을 자기 밖으로 따돌리는 것이 아니라 규정성의 힘을 빌려(durch die Bestimmtheit) 그리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로 있음(Eins zu sein)은 [모든 것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자기-자신과의-관계함(Aufsichselbstbeziehen)이며 사물이 하나로 있음으로써 [독특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와 똑 같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also) [즉자적인 하나와 여러 대자적인 규정성(=성질)들이, 의식의 생각하는 것처럼 대상과 반성하는 의식으로 분리․분포되어 있지 않고, 이와 달리] 사물들 자체가 즉자대자적으로 규정되어 있다(=사물들 자체에서 즉자대자적인 규정성이 드러난다.) 사물들은 이렇게 [스스로] 성질들을 가짐으로써 각자 다른 것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그리고 [여기서] 성질이란 [한편으로는] [사물이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사물 고유의 성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에서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대자적인] 규정성들 중 그 하나이기 때문에, 사물은 다수의 성질들을 갖는다.
[역자의 몰이해]:
원문:
“Denn vors erste ist das Ding das Wahre, es ist an sich selbst; und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sein eigenes Wesen, nicht um anderer willen;”
1) “Es (=das Ding) ist an sich selbst.” 무슨 말이지?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은 것과 상관이 있는가? 이건 대상이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은 말인데, 이런 자기동일성을 존재와 본질 간에 아무런 분리가 없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을까?
2) “Was an ihm (=dem Ding) ist, ist an ihm(=dem Ding) als sein eigenes Wesen.” "was an ihm ist"를 대상의 성질로 읽고, 성질이 대상의 본질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번역했는데, 이건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 이 문장의 주어(부)는 “was an ihm ist”다. 그리고 뒤 부분의 소유대명사 “sein”은 주어(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 ‘본질’은 대상의 것이 아니라 성질의 것이다. 이 문장의 소유대명사 “sein”이 그 앞의 “an ihm”의 "ihm"(=대상)을 받으려면 문법상 ‘dessen’이 와야 한다. 즉 'Was an ihm ist, ist an ihm als dessen eigenes Wesen.'이 되어야 한다. 소아시절부터 라틴어 문법을 신물 나게 훈련받은 헤겔이 이런 구별을 안 했을 리 없다.
3) 여기서 키포인트는 성질이 대상의 본질(Wesen)이 된다는 게 아니라, 성질이 어떤 양식으로 대상에 와 있는지(동사적인 의미로서의 wesen)에 있다. 이걸 흘렸다.
4) 성질을 대상의 본질로 읽으면, “um anderer willen”을 이해할 수 없다. 성질이 대상에 와 있는 상태는 연인들이 만날 때 자기 짝만 바라보는, 서로 푹 빠지는 모습과 같다. 다른 여성/남성에게 한 눈 팔지 않는다.
[보이스 오버]
[상황이 왜 이렇게 되는지 다시 한 번 쭉 훑어보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의식이 지각을 이해하려는 첫 되풀이의] 디딤돌로 [자기는 변하지만] 사물은 [불변하는] 참다운 것으로 내 놓았는데, 이것은 우선 사물이 [존재와 본질이라는 분리가 없는, 자기동일성으로 일관하는] {자기직접태}(an sich selbst)가 되고 이런 사물에 안겨진 것은 거기에 온통 푹 빠지는 양식으로 실재하는 것으로서 다른 것들을 전혀 염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규정된 성질들도 [역시] 다른 사물들을 염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물들에게 눈짓하여 그들 앞으로 나아가는 {für(위하여)의 원래 의미인 vor(앞으로)에 기대에 이렇게 번역했다.} 법이 없이 오직 [한] 사물 자체에 안긴 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 그리고 각기 서로 구별하는 성질이 되어야만 비로소 [한] 사물에 안기는 규정된 성질들이 된다. 그리고 셋째로 규정된 성질들이 이렇게 물성 안에 존재함으로써 즉자대자적인 것이 되어 서로 무관한 [독립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지각을 이해하려는 의식이 첫 되풀이에서 사물은 하나이고 성질들은 의식의 반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 것과는 달리] 사실 사물 자체가 희고, 또한 입체적이고, 또한 톡 쏘는 짠맛이고, [이렇게 또한으로 이어지는 여러 성질들을 갖는다.] 달리 표현하면, [지각함을 되풀이 하는 의식의 추상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라] 사물이 또한, 즉 일반매체가 된다. 이런 일반매체 안에서는 다수의 성질들이 서로 겹치는 일이 없이 떨어져 존립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하거나 파기하는 법이 없다. 사물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참답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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