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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43-48의 실체는?
삐딱하고 쓸모없는 나를 견딜 수 있는 공동체, 내가 견딜 수 없는 자를 견딜 수 있는 공동체, 나와 내 적을 견딜 수 있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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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코트랜드가 살림을 따로 차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Scotland National …’ 의 번역이 쉬워지겠다. ‘스코트랜드 국립 … ‘
2.
오늘 독일 브란덴부르크주와 튀링엔주에서 주총선이 있다. AfD(Alternative für Deutschland/독일을 위한 대안)의 ‘약진’, 과연 어디까지 갈까? 그 배경은 무엇일까?
녹색당은 다양한 ‘신사회운동’을 집결하고 ‘대안’이란 이름표를 달고 출범했다. 정체성정치였다 (die Grünen).
독일에선 프랑스의 ‘정체성 연합’(bloc identitaire)을 모방한 ‘정체성 운동’(identitäre Bewegung)이 AfD와 같은 신극우주의의 배경이 되었다. “Die Identitären”이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특히 페이스북을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런 신극우는 진보의(?) 정체성정치의 이면인가?
남한의 ‘일베’도 ‘정체성정치’의 산물?
왜 진보로 간주된 정체성정치가 극우의 것이 되었을까?
스피노자로 떨어져 내려가 진리를 실체화(Essentialisierung)했기 때문인가?
“진리는 실체이며 주체다”란 헤겔의 말을 반추하고 다시 내재화해야 하는가?
3.
사랑 …
“하나님은 사랑이다.” 뭔말?
야훼의 사랑은 계약에 근거한 사랑. 사랑하겠다고 약속.
불화를 극보하는 결합의 원칙이 아니다. 실체가 아니다.
약속이다.
‘이를 악물고’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걸 알아 차리고 이렇게 가르쳤던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 ‘이를 악물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랑도 이와 유사하다. 우린 연대라 한다. 연대(蓮帶, solidarité)가 로마 민법 ‘obligatio in solidum’(연대채무)에서 유래하지 않는가?
4.
오늘 베를린에 대대적인 反-반유대인주의 시위가 있다. 브란덴부르크문 앞 교통을 차단하고 대형 행사장을 만들어 놓았다. 정권이 동원한 시위라는 인상이 떨쳐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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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롭셔의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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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무신경체에 대한 견디기 힘든 경험을 한 후 도미코는 합리적으로, 철저히 원인 규명을 해 오즈딘이 행한 일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즈딘은 두려움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초월해 버렸다. 오즈딘은 자신을 외계에 스스럼없이 내던져 버렸고 거기엔 악한 것이 들어찰 수 없었다. 오즈딘은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그러므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의 어휘로는 쓸 수 없는 이야기였다.극한 지방 탐사팀 대원들은 생의 거대한 식민지를, 꿈꾸는 침묵에 둘러싸인 곳을, 대원의 존재를 반쯤은 자각하면서도 대원들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고요 속을 관통해 나무 아래를 걸었다. 시간이 없었다. 거리는 문제 되지 않았다. 세계가 아닌 우리에게 여유와 시간이 있었다면...
행성이 햇빛과 위대한 어둠 사이에서 돌았다. 겨울의 바람 그리고 여름이 고운 꽃가루를 불어 조용한 바다 위로 날려보냈다."
--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1971, The Wind's Twelve Quar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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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He had taken the fear into himself, and, accepting, had transcended it. He had given up his self to the alien, an unreserved surrender, that left no place for evil. He had learned the love of the Other, and thereby had been given his whole 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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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자유 - „denn die Freiheit [des Geistes] ist eben dies, in seinem Anderen bei sich selbst zu sein“ (Enz.1, § 24, Zusatz 2)헤겔: 사랑 - "Wenn in der Ehre [Anerkennung/Freiheit] die persönliche Subjektivität, wie sie sich in ihrer absoluten Selbständigkeit vorstellt, die Grundbestimmung ausmacht, so ist in der Liebe vielmehr das Höchste die Hingebung des Subjekts an ein Individuum des anderen Geschlechts, das Aufgeben seines selbständigen Bewußtseins und seines vereinzelten Fürsichseins, das erst im Bewußtsein des anderen sein eigenes Wissen von sich zu haben sich gedrungen fühlt. In dieser Beziehung sind sich Liebe und Ehre entgegengesetzt. Umgekehrt aber können wir die Liebe auch als die Realisation dessen ansehen, was schon in der Ehre liegt, insofern es das Bedürfnis der Ehre ist, sich anerkannt, die Unendlichkeit der Person aufgenommen zu sehen in einer anderen Person. Diese Anerkennung ist erst wahrhaft und total, wenn nicht nur meine Persönlichkeit in abstracto oder in einem konkreten vereinzelten und dadurch beschränkten Fall von anderen respektiert wird, sondern wenn ich meiner ganzen Subjektivität nach, mit allem, was dieselbe ist und in sich enthält, als dieses Individuum, wie es war und ist und sein wird, das Bewußtsein eines anderen durchdringe, sein eigentliches Wollen und Wissen, sein Streben und Besitzen ausmache. Dann lebt dies Andere nur in mir, wie ich mir nur in ihm da bin; beide sind in dieser erfüllten Einheit erst für sich selber und legen in diese Identität ihre ganze Seele und Welt hinein. In dieser Rücksicht ist es dieselbe innerliche Unendlichkeit des Subjekts, welche der Liebe die Wichtigkeit für die romantische Kunst gibt, eine Wichtigkeit, die durch den höheren Reichtum, den der Begriff der Liebe mit sich führt, noch gesteigert wird." (Vorlesungen über die Ästhetik, Begriff der Liebe)
Theunissen: 자유 - Bei sich sein [auch] im Anderen; 사랑 - [Erst] im Anderen bei sich s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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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니쎈: "이러한 점에서 미루어 보아 참다운 현실성은 사랑과 자유의 특수하게 신약적인 일치에 의해 각인된다. 헤겔은 "개념의 관계 방식"을 자유로 정의한다. 그러나 개념 자체는 사랑이므로, 개념과 더불어 출현하는 자유는 특정한 자유, 즉 의사소통적인 자유(die kommunikative Freiheit)임이 틀림없다. 의사소통적인 자유는 어느 하나가 타자를 한계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자기실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경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토이나쎈, 존재와 가상, 46쪽/번역본 51쪽)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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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Vernunft und Freiheit als Vernunftwesen ist nicht mehr Vernunft und Freiheit, sondern ein Einzelnes; und die Gemeinschaft der Person mit anderen muss daher wesentlich nicht als eine Beschränkung der wahren Freiheit des Individuums, sondern als eine Erweiterung derselben angesehen werden."(피히테와 셸링 철학체계의 차이)부가 정보
구글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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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Be with him [also] in the other사랑 - [First] being with one another in the other
자유의 [also]는 특정한 누군가와 함께 하되, 그건 다른 이들 내에서라야 한다는 뜻 같습니다.
사랑의 [First]는 다른 이들 중 먼저 누군가와 함께 하되, 또 다른 이들과도 함께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 같습니다.
사랑은 자신없지만, '의사소통적인 자유'에 의지하여. 누군가가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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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구글번역기에게 아직 자기반성을 요구할 순 없는 것 같네요. 독어의 bei sich는 불어의 chez moi ('자기 집, 낯설은 공간의 아닌, 나의 것으로 충만한 공간=내 집')의 의미와 유사. 독어의 auch는 여기서는 even though에 가깝고, erst는 eventually의 의미부가 정보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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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헤겔의 자유: for the freedom [of the spirit] is precisely this to be in oneself in one's other- 정신의 자유는 자신을 다른 이에게 두는 것이다. 맞게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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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관념론의 국가관, <민주주의 헌법론>, 국순옥 에서 재인용
자기결정은 아직 존재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불안과 활동이다. 인륜의 단계에 들어서야만 비로소 의지는 의지의 개념과 동일하여지고 후자를 자신의 내용으로 삼게 된다.
- 헤겔 Grundlinien, Zusatz zu $108
근대국가의 "강점과 깊이"는 "주관성의 원리를 특수한 인격의 자립성이라는 극한으로까지 밀고 나아가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이 주관성 원리를 실체적 통일성 속으로 돌려보내는 가운데 주관성의 원리 안에서 실체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 헤겔 [법철학] $260
주관성의 원리 안에서 실체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보안법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체적 통일성이 인륜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귀중한 원료를 수입해와서 비닐 쓰레기를 수출하는 질서 안에서 인륜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질서를 이북에게로 확장겠다는 것이 남쪽에서 인륜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부인할 능력은 없는데 그걸 인륜으로 인정은 못하겠어요.
대안적 질서를 만들면서 그 이치를 발견해나가는 것이 左이고, 이것은 인륜이 아니야라고 외쳐서 기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右라고 생각하는데, 左로 밀고 나가고 싶은데 혼자가 될 뿐더러 막막하고, 右에는 소질도 없을 뿐더러 흥미와 자신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右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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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가 미래의 양면성, 즉 인식 내재적이면서 파악이 안되는("nah ist/und schwer zu fassen ist Gott" 횔더린, 파트모스)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구원을 모방하는 현재의 확장으로 굴러 떨어져서?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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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 끄적....“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만을 발전시킬 뿐이다. 그러는 가운데 또한 모든 부의 분천(噴泉, Springquelle)인 지구(Erde)와 노동자를 [회생 불가능한 상태까지] 서서히 무너뜨린다(untergräbt)[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M530)
자본주의에 자기반성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자기동일성으로 점철된 자본주의 형식에 자기반성의 잠재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자기반성은 “모든 피조물이 [지구와 모든 생명체를 포함?]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22)에 있지 않을까?
우리는? “ … 성령을 받은 우리도 …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로마서 8.23) “ …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합니다.“(로마서 8.26)
자기반성과 미래와의 관계는?
“눈에 보이는 소망”(로마서 8.24)이 아닌 불안(Angst)과 간절함일
뿐인 기다림(apokaradokia, 로마서 8.19)의 대상이 되는 미래.
자본주의에 표현이 없는(ausdruckslos), 신음 뿐인 미래에 표현을 주는 자기반성이 있을까?
200년 전 오늘 태어난 마 선생은 지금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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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늑하지만 '위험이 있는 곳'이라 계속 오고 싶은 곳입니다.지금은 이것 밖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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