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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0/05
    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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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5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에 갔다. Nach Auschwitz.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nach Ausschwitz”-철학이다.
 
“문화비평은 [오늘날] 문화와 야만 간의 변증법이 다다른 마지막 단계에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다. 이런 문화비평은 오늘날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발언하는 인식 역시 부식(腐蝕)한다.”(„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어렵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전치사 nach 뒤에 지역이름이 따르면 보통 방향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Nach Jerusalem!”(예루살렘으로!)에서와 같이 특별한 지역이나 도시이름이 따를 경우에는 그 도시나 지역이 상징하는 것을 취하려 간다는 긍정적인 방향성의 의미가 있다.

 

“nach Ausschwitz.” 그럼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이다. 정말 그렇다.

 

추상과 보편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건이 아우슈비츠다. 정리하여 뒤로 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거기에 가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는 아우슈비츠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가  과연 통과할 수 있는 문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아우슈비츠에 간 첼란은 ‘우리’가 되어 함께 죽음의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죽음의 푸가’를 쓴다.

 

“아우슈비츠가 개별적인 인간성의 역사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란의 글이 여하튼 여전히 시로서 가능하려면 개별적인 인간성의 지속가능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또한 출발점으로 삼으면 죽음의 푸가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름끼치는 것을 필연적으로 놓친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필연적인 일탈에 고귀한 도덕적, 감성적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그 가치는 시에 스며있는 의식, 즉 바로 저 모순이야말로 지양될 수 없다고 철두철미하게 두루 인식하는 의식을 통해서 규정된다. 죽음의 푸가는 제목과 형식에서 이 모순을 받아들였다.” ("Geht man davon aus, dass Auschwitz das geschichtliche Ende der individuellen Humanität bedeutet - doch sie hat viele Enden, sie geht nicht auf einmal zugrunde -, Celans Text ihre fortdauernde Möglichkeit aber voraussetzen muss, um als Gedicht überhaupt noch möglich zu sein, so wird man zwar zugeben müssen, dass die Todesfuge das Grauen, von dem sie spricht, mit Notwendigkeit verfehlt; zugleich aber wird man diesem notwendigen Verfehlen einen hohen moralischen und ästhetischen Wert zuerkennen. Er ist bestimmt durch das volle Bewusstsein, welches das Gedicht selbst von der Unaufhebbarkeit dieses Widerspruchs besitzt. Ihm verdankt die Todesfuge ihren Titel und ihre Form." Peter Horst Neumann: Schönheit des Grauens oder Gräuel der Schönheit? In: Geschichte im Gedicht. Texte und Interpretationen. Herausgegeben von Walter Hinc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79. Seite 230-237. 재인용: http://www.celan-projekt.de/)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모르고 바흐의 푸가를 즐기는 건 역겹다. 윌프리드 오웬의 시를 소화한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진홍곡’(War Requiem)을 모르고 카톨릭 ‘진홍곡’을 즐기는 건 역겹다.

 

사회주의는 이런 지양불가능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다 자본주의 아래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 일몽님이 레닌의 ‘어쩌고 저쩌고’하는 만트라에 구토하는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에 간 부르주아의 사유에 한 참 뒤져 있다. 사회주의 지속가능성 혹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유해야 하는 사회주의의 지양불가능한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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