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파울 첼란

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5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에 갔다. Nach Auschwitz.


아도르노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nach Ausschwitz”-철학이다.
 
“문화비평은 [오늘날] 문화와 야만 간의 변증법이 다다른 마지막 단계에 맞서있다: nach Ausschwitz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다. 이런 문화비평은 오늘날 왜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는지 발언하는 인식 역시 부식(腐蝕)한다.”(„Kulturkritik findet sich der letzten Stufe der Dialektik von Kultur und Barbarei gegenüber: nach Au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und das frisst auch die Erkenntnis an, die ausspricht, warum es unmöglich ward, heute Gedichte zu schreiben.“) („Kulturkritik und Gesellschaft“, (1951). In: Adorno: Gesammelte Schriften, Bd. 10.1. Frankfurt/M. 1980. S. 11-30)

 

Nach Ausschwitz. 번역하기 어렵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니다. 전치사 nach 뒤에 지역이름이 따르면 보통 방향의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Nach Jerusalem!”(예루살렘으로!)에서와 같이 특별한 지역이나 도시이름이 따를 경우에는 그 도시나 지역이 상징하는 것을 취하려 간다는 긍정적인 방향성의 의미가 있다.

 

“nach Ausschwitz.” 그럼 아우슈비츠에 가란 말인가? 그렇다. „Nach Ausschwitz ein Gedicht zu schreiben, ist barbarisch.“ 아우슈비츠가서 시를 쓰는 행위는 야만이다. 정말 그렇다.

 

추상과 보편으로 접근할 수 없는 사건이 아우슈비츠다. 정리하여 뒤로 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거기에 가야만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는 아우슈비츠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가  과연 통과할 수 있는 문인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아우슈비츠에 간 첼란은 ‘우리’가 되어 함께 죽음의 우유를 마신다. 그리고 ‘죽음의 푸가’를 쓴다.

 

“아우슈비츠가 개별적인 인간성의 역사적인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첼란의 글이 여하튼 여전히 시로서 가능하려면 개별적인 인간성의 지속가능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또한 출발점으로 삼으면 죽음의 푸가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름끼치는 것을 필연적으로 놓친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필연적인 일탈에 고귀한 도덕적, 감성적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그 가치는 시에 스며있는 의식, 즉 바로 저 모순이야말로 지양될 수 없다고 철두철미하게 두루 인식하는 의식을 통해서 규정된다. 죽음의 푸가는 제목과 형식에서 이 모순을 받아들였다.” ("Geht man davon aus, dass Auschwitz das geschichtliche Ende der individuellen Humanität bedeutet - doch sie hat viele Enden, sie geht nicht auf einmal zugrunde -, Celans Text ihre fortdauernde Möglichkeit aber voraussetzen muss, um als Gedicht überhaupt noch möglich zu sein, so wird man zwar zugeben müssen, dass die Todesfuge das Grauen, von dem sie spricht, mit Notwendigkeit verfehlt; zugleich aber wird man diesem notwendigen Verfehlen einen hohen moralischen und ästhetischen Wert zuerkennen. Er ist bestimmt durch das volle Bewusstsein, welches das Gedicht selbst von der Unaufhebbarkeit dieses Widerspruchs besitzt. Ihm verdankt die Todesfuge ihren Titel und ihre Form." Peter Horst Neumann: Schönheit des Grauens oder Gräuel der Schönheit? In: Geschichte im Gedicht. Texte und Interpretationen. Herausgegeben von Walter Hinc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79. Seite 230-237. 재인용: http://www.celan-projekt.de/)


첼란의 죽음의 푸가를 모르고 바흐의 푸가를 즐기는 건 역겹다. 윌프리드 오웬의 시를 소화한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진홍곡’(War Requiem)을 모르고 카톨릭 ‘진홍곡’을 즐기는 건 역겹다.

 

사회주의는 이런 지양불가능한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다 자본주의 아래서만 일어난 일이라고? 여기 일몽님이 레닌의 ‘어쩌고 저쩌고’하는 만트라에 구토하는 이유가 있다. 아우슈비츠에 간 부르주아의 사유에 한 참 뒤져 있다. 사회주의 지속가능성 혹은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사유해야 하는 사회주의의 지양불가능한 역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4

어떻게 자기 자신의 죽음을 표상할 수 있을까? 자신의 부재를 상상하는 에고(ego)가 주체로 살아 있고 현재하는데 이게 어찌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에 대한 표상은 항상 타자의 죽음이다. 사물(Ding)로 떨어진, 생명과 함께 주체가 사라진 것으로서의 타자다. 죽음의 실체는 주검이다.

파울 첼란은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표상하고 있는가?

먼저 자신이 남김없이 죽어서 완전한 타자가 되어야 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엄마의 아기가 되어서?

 


어느 한 촛불 앞에서
 

망치로 두들겨 편 금으로, 그렇게
하라고 내게 간곡히 당부한대로, 어머니,
촛대의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거기로부터
솟아 올라온 촛불 하나가 [독: 여성] 저를 어둠의 한가운데로
산산조각이 난 시간들의 한가운데로 인도합니다:
당신의
주검(Todsein)의 딸이.

(...)


Vor einer Kerze

Aus getriebenem Golde, so
wie du’s mir anbefahlst, Mutter,
formt ich den Leuchter, daraus
sie empor mir dunkelt inmitten
splitternder Stunden:
deines
Totseins Tochter.

 

 

(파울 첼란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에서 나찌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2

첫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고 있는가?

 

우선 뭘 청원하는지 보자. 살구씨를 세는 일. 똑같이 반복되는 손동작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달라지는 게 없다. 뭔가에 붙잡혀 그만 둘 수 없는 일 같다. 마치 공장에서 그저 흐르는 시간에 맞춰 같은 손동작을  반복하듯이. 걷어 차버리고 일어 섰으면 하는 바램이 굴뚝 같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의 배경은 쇼아(홀로코스트)다.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은 쇼아를 살아남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쇼아의 ‘경험’(여기서 경험이란 말을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이 어쩜 시간을, 인간이 본원적으로 향유하는 시간을,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합성된 시간을 파괴하여 순차적으로 그저 흐르기만 하는 선형시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선형시간의 지배아래 그저 순차적인 시간을 모방하여 하나, 하나 세기를 반복하는 멜란콜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쇼아 생존자가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닌지.

 

그렇다면 청원이 아니다. 청원하는 일이 이미 현실이다. 청원이 아니라 최소한 안쓰러운 마음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해라. 그게 달램이 된다면...’      

 


그래, 살구씨를 세어라 [일일이]
그래, 널 갈기갈기 찢고 잠못이루게 했던 걸 세어라 [반복해서]
나도 그래, 같이 하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시도: 파울 첼란 - Zähle die Mandeln (살구씨를 세어라)

I.
1    Zähle die Mandeln,
2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3    zähl mich dazu:

II
4    Ich suchte dein Aug, als du’s aufschlugst und niemand dich ansah,
5    ich spann jenen heimlichen Faden,
6    an dem der Tau, den du dachtest,
7    hinunterglitt zu den Krügen,
8    die ein Spruch, der zu niemandes Herz fand, behütet.

III
9    Dort erst tratest du ganz in den Namen, der dein ist,
10  schrittest du sicheren Fußes zu dir,
11  schwangen die Hämmer frei im Glockenstuhl deines Schweigens,
12  stieß das Erlauschte zu dir,
13  legte das Tote den Arm auch um dich,
14  und ihr ginget selbdritt durch den Abend.

IV
15  Mache mich bitter.
16  Zähle mich zu den Mandeln.

 


시 연 I)

3개의 청원하는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는 것인지 그 주체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시 행 1)

zähle
- 모델 독한사전 : (수를) 세다; 헤아리다, 일일이 세다; ...의 수에 달하다, ...의 수를 이루다; 계산에 넣다, … 속하다; 값이 나가다, 효력이 있다, 가치를 인정하다, 의미를 갖다; 믿다, 기대하다

- 어원사전 : 영어의 ‘to tell’과 어원이 같음. ‘보고하다’, ‘이야기하다’

- 연상 : 화창한 늦가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은행을 일일이 씻고 있는 할머니. “이거슨 내 일 이랑께.” 신동엽의 ‘조국’.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zähle die Mandeln
- ‘살구씨를 일일이 세어라’ 왠 뜬금없는 살구씨야?

 

시 행 2)

bitter
- 모델 독한사전 : 쓴; 괴로운, 아픈; 찌르는
- 어원사전 : beißen (깨물다), Beil (도끼)와 어원이 같음. 상처를 입히는 것, 둘로 쪼개는 것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 아팠던 것과 널 깨어있게 했던 것을 일일이 세어라.

 

아팠던 것과 깨어있게 한 것과의 관계
- 예레미야 1장 살구나무 가지 비유  :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하고 나서 주님이 묻는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냐?” 내가 대답하였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 보고 있다.”(11-12절) 원문 schkd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schaked (샤케드 : 살구나무) 아니면 schoked (쇼케드 : 지켜보다)가 됨.

- 살구씨, 즉 날 둘로 쪼개는 아픔과 깨어 지켜보는 일은 질료적으로 같은 것.
깨어 지켜보는 이는? 시적 주체의 대화의 대상은?
 

시 행 3)

zähl mich dazu:
- 연상 : 할머니, 나도 씻어 줘. 나도 씻어 거기어 더해 줘.
- 시적 주체는 몸소 어떤 프로세스를 거치는가? 씻김?

- 연상 : 1986년 (1987년 이었던가?) 베를린 세계문화(들)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Horizonte'(지평들)에서 선 보였던 진도씨낌굿. 기나긴 하얀 원단을 몸으로 둘로 가르면서(찟으면서) 나가는 장면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