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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첫 질문에 대한 답이 어렵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고 있는가?
우선 뭘 청원하는지 보자. 살구씨를 세는 일. 똑같이 반복되는 손동작이다. 시간은 흐르지만 달라지는 게 없다. 뭔가에 붙잡혀 그만 둘 수 없는 일 같다. 마치 공장에서 그저 흐르는 시간에 맞춰 같은 손동작을 반복하듯이. 걷어 차버리고 일어 섰으면 하는 바램이 굴뚝 같다.
주지하다시피 이 시의 배경은 쇼아(홀로코스트)다.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은 쇼아를 살아남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쇼아의 ‘경험’(여기서 경험이란 말을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이 어쩜 시간을, 인간이 본원적으로 향유하는 시간을,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합성된 시간을 파괴하여 순차적으로 그저 흐르기만 하는 선형시간으로 만들었는지 모른다. 선형시간의 지배아래 그저 순차적인 시간을 모방하여 하나, 하나 세기를 반복하는 멜란콜리아의 지배아래 있는 쇼아 생존자가 시적 주체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아닌지.
그렇다면 청원이 아니다. 청원하는 일이 이미 현실이다. 청원이 아니라 최소한 안쓰러운 마음이다. ‘그래, 그렇게라도 해라. 그게 달램이 된다면...’
그래, 살구씨를 세어라 [일일이]
그래, 널 갈기갈기 찢고 잠못이루게 했던 걸 세어라 [반복해서]
나도 그래,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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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1 Zähle die Mandeln,
2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3 zähl mich dazu:
II
4 Ich suchte dein Aug, als du’s aufschlugst und niemand dich ansah,
5 ich spann jenen heimlichen Faden,
6 an dem der Tau, den du dachtest,
7 hinunterglitt zu den Krügen,
8 die ein Spruch, der zu niemandes Herz fand, behütet.
III
9 Dort erst tratest du ganz in den Namen, der dein ist,
10 schrittest du sicheren Fußes zu dir,
11 schwangen die Hämmer frei im Glockenstuhl deines Schweigens,
12 stieß das Erlauschte zu dir,
13 legte das Tote den Arm auch um dich,
14 und ihr ginget selbdritt durch den Abend.
IV
15 Mache mich bitter.
16 Zähle mich zu den Mandeln.
시 연 I)
3개의 청원하는 명령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청원하는 것인지 그 주체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시 행 1)
zähle
- 모델 독한사전 : (수를) 세다; 헤아리다, 일일이 세다; ...의 수에 달하다, ...의 수를 이루다; 계산에 넣다, … 속하다; 값이 나가다, 효력이 있다, 가치를 인정하다, 의미를 갖다; 믿다, 기대하다
- 어원사전 : 영어의 ‘to tell’과 어원이 같음. ‘보고하다’, ‘이야기하다’
- 연상 : 화창한 늦가을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은행을 일일이 씻고 있는 할머니. “이거슨 내 일 이랑께.” 신동엽의 ‘조국’.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zähle die Mandeln
- ‘살구씨를 일일이 세어라’ 왠 뜬금없는 살구씨야?
시 행 2)
bitter
- 모델 독한사전 : 쓴; 괴로운, 아픈; 찌르는
- 어원사전 : beißen (깨물다), Beil (도끼)와 어원이 같음. 상처를 입히는 것, 둘로 쪼개는 것
zähle, was bitter war und dich wachhielt
- 아팠던 것과 널 깨어있게 했던 것을 일일이 세어라.
아팠던 것과 깨어있게 한 것과의 관계
- 예레미야 1장 살구나무 가지 비유 :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9절)하고 나서 주님이 묻는다. “예레미야야,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는냐?” 내가 대답하였다.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 “네가 바로 보았다.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지켜 보고 있다.”(11-12절) 원문 schkd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서 schaked (샤케드 : 살구나무) 아니면 schoked (쇼케드 : 지켜보다)가 됨.
- 살구씨, 즉 날 둘로 쪼개는 아픔과 깨어 지켜보는 일은 질료적으로 같은 것.
깨어 지켜보는 이는? 시적 주체의 대화의 대상은?
시 행 3)
zähl mich dazu:
- 연상 : 할머니, 나도 씻어 줘. 나도 씻어 거기어 더해 줘.
- 시적 주체는 몸소 어떤 프로세스를 거치는가? 씻김?
- 연상 : 1986년 (1987년 이었던가?) 베를린 세계문화(들)의 집(Haus der Kulturen der Welt) 'Horizonte'(지평들)에서 선 보였던 진도씨낌굿. 기나긴 하얀 원단을 몸으로 둘로 가르면서(찟으면서) 나가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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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카운터펀치에 "Blood, Oil and the Geopolitics of the Gulf"라는 글이 실렸습니다.http://www.counterpunch.org/2014/09/22/blood-oil-and-the-geopolitics-of-the-gulf/
이 글은 최근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냥 대충 훑어보긴 했지만 중국과 카타르의 부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각주를 보면 미국사 저널에 실린 논문 세 개가 있습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이 논문들을 차례대로 번역한 뒤 이 글도 번역해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중인데 계획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 사정으로 이걸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 극복했습니다. 조만간에 끝날 겁니다. 첫번째로 번역하는 글의 각주는 필요한 부분만 옮길 예정입니다.
http://jah.oxfordjournals.org/content/99/1/208.full
“우리는 확고한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는 어떠한 외세의 시도도 미국의 사활적 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될 것이며, 군사력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러한 공격을 물리쳐야합니다.” 지미 카터의 1980년 1월 23일 연두교서
20세기 초 이래로 중동의 석유는 세계 열강과 세계 자본을 매혹시켰다. 중동의 석유는 특히 미국에게 매력적이었다. 미국의 로맨스는 캘리포니아 스탠다드 오일(옮긴이: 줄여서 소칼이라고 함)의 지질학자들이 사우디 아라비아 동부 해안에 상업적 규모의 석유를 발견했던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후로 미국은 석유의 매력에 중독되었다. 2차 대전 직후 석유는 단순히 탐이 나는 산업용 원자재 그 이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945년 2월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이집트 그레이트 비터 호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인 ‘압둘 알’ 아지즈 이븐 사우드(옮긴이: 줄여서 이븐 사우드라고 함)를 USS 퀸시에 초대한 것은 이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유명한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만남 이후로 중동의 석유와 미국의 국가안보는 영구히 연결되었다. 그 뿐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관계 중 하나가 구축되었다. 사우디는 세계 시장에 석유를 싸게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의 보호를 받게 된다. 협상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재앙의 불씨도 생겨났다.
20세기에는 사우디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페르시아만 지역 전체의 안보와 중동 석유의 공급을 확보하는 것은 미국의 주된 정치경제적 관심사에 속했다.2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권력추구는 위험투성이였고 생명과 재산의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석유는 공급되었다. 1970년대 말 이래로 걸프지역은 혁명과 거의 영구적인 전쟁으로 요동쳤다. 충돌의 부재라는 의미에서 안보는 찾아볼 수 없었고, 페르시아만과 지역의 석유생산자들에 대한 보호는 미국의 개입이 점점 더 직접적이고 더 많은 대가를 치루는 형태가 되었다.
각주2) 티모시 미첼(옮긴이: 콜롬비아대 중동문제 연구자)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람들 생각과는 달리, [석유는] 너무 많다. 석유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풍부한 액체이기 때문에, 어떤 생산자라도 항상 또 다른 생산자가 저가로 공급할 위험에 처해 있다. 생산자가 원하는 것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석유를 공급할 수 있는 시장이 전부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석유산업은 시장이 아니라 수익에 관한 것이고, 이런 경쟁적인 조건하에서 큰 수익은 불가능하다. 잠재적 지대는 - 또는 그들이 말하는 ‘희소성에 대한 프리미엄’ - 희소성을 창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실행된 이후에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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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미국이 주도한 이라크 침략과 미군 점령은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주의의 가장 최근 단계를 보여줄 뿐이다. 규모, 지속기간, 파괴 면에서 볼 때 지역에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군사적 과실이었지만, 이라크전은 석유에 관한 수십 년간의 전략적 사고와 정책결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테러리즘과 특히 2001년 9월 11일 공격이 2003년에 전쟁을 추진하는 동력을 가속화하는데 기여한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9/11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석유와 석유 생산자들의 군사화, 거의 40년간의 지역대립에서 석유의 역할, 가장 최근에 이라크와의 대립과 과거의 대립들에 대한 연관을 간과하고 무시하는 것이다.3 석유와 전쟁은 중동에서 갈수록 상호연관되고 있다. 확실히 이 관계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구적이 된 것 같다. 이런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수렁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석유에 대한 미국의 접근방식이 그러한 결과를 낳았다.각주 3) Sheila Carapico(옮긴이: 리치몬드대 정치학교수)와 Chris Toensing(옮긴이: Middle East Report 편집장)은 200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 정치인들과 상업언론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정보 실패와 꽃다발과 사탕을 주며 사랑을 고백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환상에 의해 분별없는 침략을 서둘러 감행했다. 2001년 9월 11일 백악관 복도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달리 표현하면, 마치 역사는 바로 그 날 시작되었으며 그 전에 있었던 일은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마치 미국이 ‘전방위 지배’라는 세계적 전망에 대해서나 걸프지역에서 패권적 야심에 따라 조치를 취하거나 이라크에서 강제로 ‘정권교체’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더 넓은 지역적 맥락에서 안보에 대한 미국의 강조와 접근방식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에세이는 미국-이스라엘 관계에 대해서 상세히 다루지 않지만, 미국의 걸프정책과 지역의 석유생산자들과의 관계는 미국-이스라엘 동맹과 종종 부딪쳤다. 지역에서 미국의 정책이 만들어낸 긴장 때문에 더 전반적인 지역안보 추구에 대한 미국의 주장은 힘을 잃었다. 이러한 모순은 1973년 석유위기 동안 가장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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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의 전략적 논리미국은 석유가 풍부한 걸프지역에서 전쟁의 역사를 가진 유일한 서구 열강이 아니다. 지역에서 자국의 물자를 확보하고 확대하는 일에 급급했던 영국은 1914년 지금의 이라크 영토인 바스라 부근에 군대를 파견했다. 1918년경에 영국은 바그다드를 차지했고 영국인들과 그들의 동맹이 자리를 잡은 뒤, 수십 년간 아래를 내려다보며 권력을 행사했다. 그 후 걸프지역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군사주의와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지배자들과는 달리, 미국은 구시대적 제국의 계산이나 야심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미국의 석유전쟁은 유전지대를 직접 장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해방이나 자유에 관한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지역의 민중들의 정치적 자유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우호적인 석유생산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 넓게 계산해보면 기본적인 국내 에너지 수요는 여전히 필수적이었지만, 중동의 석유가 반드시 미국에 진출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가격을 안정적으로(낮지 않게) 유지하고 친미 정권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전략적 정책의 중심이었다.
1970년대에 걸프지역에서 시작된 군사주의 유형은 부분적으로는 미국이 야만적이고 취약한 권위주의 정권을 의도적으로 군사화하고 지원한 결과였다. 석유군주들에 대한 대량무기판매, 미국이 권한을 준 이 지배자들의 손에 달려 있는 걸프지역에 지정학적인 군사질서를 수립하려는 결정은 매우 군사화되고 깨지기 쉬운 힘의 균형을 낳았다. 1970년대부터 석유생산국들은 국내외로부터 거듭되는 위협에 직면했는데, 이러한 위협은 국내불안, 침략, 지역전쟁이나 내전, 또는 최소한 언제 혼란이 발생할지 모르는 정국이었다. 물론 이런 불안정과 충돌은 국내적 정치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었고, 그 중 일부만이 외부의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감시 하에 진지하게 시작된 군사화로 인해 이러한 불확실성은 악화되고 가속화되었으며, 석유생산국들과 지역을 더욱 더 불안정하게 했다.
20세기에 석유와 걸프지역에 대한 미국의 접근방식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와 그것의 한계 모두를 보여주었다. 대리인들(미국의 명령에 따르는 걸프지역의 종속국들)을 만들어서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미국의 군사력을 더욱 직접적으로 투사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지미 카터가 1980년 연두교서에서 미국은 걸프지역에서 “사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군사력을 포함하여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는 경고는 명백히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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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는 걸프지역의 안보와 군사주의에 대한 미국의 접근방식이 변형되는 시기였다. 1968년 1월 영국정부는 지역에서 오랫동안의 제국적 주둔을 끝내고 정치적, 군사적 자원을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잠재적인 권력공백에 대해 불안해졌다. 다른 압력들도 가중되기 시작했다. 십년 전부터 석유생산국 정부들은 이미 주요 석유기업들의 불공정한 지배적 관행에 발끈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국의 선언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이 석유기업들은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생산수단과 가격책정에 대해 독점적 지배를 행사해왔다. 1960년 몇몇 주요 석유생산국들은 가격인상을 위한 첫수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설립했다. OPEC은 초기에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주요 생산자들이 석유기업 활동을 국유화하기 시작한 1970년대에 이르면 석유생산자들의 자기주장은 커졌다.더 중요한 사실은 미국의 중동안보전략의 모순은 지역의 석유생산자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도전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과 지역의 석유생산자들에 대한 지원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했으나, 석유생산자들은 오래전부터 미국의 친이스라엘 외교정책을 눈엣가시로 생각했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를 재장악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한 1973년 10월 전쟁으로 그들의 짜증은 격분으로 변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미국이 사면초가에 몰린 이스라엘군의 재장비를 도와주자 걸프 석유생산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주도로, 아랍 석유생산자들과 석유기업들은 미국에 대한 엠바고를 조직했고, 그로 인해 공급이 줄어들면서 가격이 올랐다. 1973년 위기의 결과로, 석유생산국들은 마침내 서방의 석유재벌들에게서 생산과 가격책정 메커니즘에 대한 직접 지배권을 빼앗았고, 이 나라들의 석유수입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엠바고와 그것이 국내정치에 미친 영향 때문에 곤경에 처한 미국 관리들은 석유생산 동맹들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석유에 대한 미국정책의 모순이 만들어낸 불안이 미국의 지역안보정책의 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지역의 질서에 더욱 더 헌신하게 되었다.
사실 엠바고로 인한 최초의 충격 이후 가격은 급상승했지만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너무 불안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란을 비롯한 걸프 지도자들에게 서구의 유가폭등으로 거두어들인 수입을 재투자하라고, 즉 최근에 얻은 부의 일부를 서구 상품에, 그리고 특히 미국 무기에 지출하라고 설득했다. 무기 파이프라인이 생겨나면서 미국과 걸프 석유생산자들 사이의 유대는 더욱 깊어졌지만, 국유화의 물결은 과거 미국의 석유이익에 봉사했던 지정학적 틀을 해체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체제를 통해 서구 석유기업들은 자국정부와 협력하여 중동 석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행사했다. 이 기업들과 석유생산 정부들 사이의 관계는 주기적으로 격렬해졌지만, 대체로 협조적이었다. 지역의 정부들은 석유판매 수익분배에서 쥐꼬리만한 형평성이라도 얻으려고 싸웠지만, 그들은 여전히 추출, 정제, 유통, 판매에서 이 기업들에게 거의 완전히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합의였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활동했던 아람코 같은 기업들은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미국 정계와 정보계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다.9
각주 9) 아람코의 정식 이름은 Arabian American Oil Company이며, 미국기반의 석유대기업들인 쉐브론, 텍사코, 엑손, 모빌이 설립한 컨소시엄이다. 아람코는 이 기업들 소유 하에 운영되었으나, 1980년에 사우디 아라비아는 아람코를 완전히 국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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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를 둘러싼 기업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지역과 그 주변의 정치적 권위의 성격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들은 루스벨트 이후로 미국 지도자들이 지역 안정에 사활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는 아랍 군주들과 일련의 관계를 구축하고 방어하는데 기여했다. 미국은 1953년 CIA가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 총리를 전복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조직해서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를 지배자로 되돌려놓음으로써 독재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석유기업들은 지역의 다른 곳에서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미국정부 관리들과 석유기업 중역들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잠재적 힘과 그들이 아랍 석유를 국유화해서 미국과 서방의 이익에 호소하길 거부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기업들과 미국 정부는 이러한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미국의 냉전과 걸프지역의 물질적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걸프 석유에 대한 기업과 미국의 직접 지배는 1970년대에 끝나긴 했지만, 권위주의 정권은 계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무장시키고 미국의 이익과 권력을 위한 대리인으로 배치시키면서, 그들과 새로운 종류의 사업을 하려고 했다. 리처드 닉슨은 1969년에 새로운 전략적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군사화전략을 위한 자극을 제공했다. 미국을 베트남의 수렁에서 꺼내라는 압력 하에서, 닉슨 독트린은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자국의 방위를 위해 더 큰 부담을 요구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미군 병력을 “수평선 너머에” 위치시킴으로써 지역에서 독트린을 준수했다. 지역에서 힘의 균형을 보존해야 할 영국은 철수했기 때문에, 미국은 지역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현지 군대를 창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국 정부는 이란과 사우디 아라비아를 지역의 새로운 지정학적 전략의 두 기둥으로 만들기 위해 주로 이들을 강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은 이란에 220억 달러 이상의 무기판매를 했는데, 이 금액은 십년 간 이란의 무기구매의 약 4분의 3에 해당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무기판매는 십년간 35억 달러 미만에 불과해서 이란에 비하면 가벼운 편이었지만, 미국이 1972년에야 비로소 (사우디) 왕국에 무기판매를 시작한 것을 고려하면 여전히 상당한 금액이다.
군사주의의 위험
새로운 군사주의 정책의 결과는 대단했다. 이 정책들이 즉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계속되는 폭력과 불안정의 시대를 위한 토대를 놓는데 분명히 기여했다. 군사주의가 지역적 현상이 되면서, 대담해진 걸프 독재자들은 서로에게 점점 더 독선적이고 위협적이 되었다. 걸프 지역, 특히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긴장고조는 복잡한 국내, 지역 정치의 결과였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걸프국 지도자들은 수십억 달러의 무기 구매를 통해 안보를 확보하려고 했고, 미국 정부와 미국 무기산업은 기꺼이 응했다. 그 결과 지역의 군사화는 훨씬 더 심각해졌고 군산복합체에게는 특혜였다. 70년대 말경에 걸프지역의 최대 석유생산자들은 본격적인 무기경쟁에 들어갔다. 소련은 지역의 주요고객이며 이란의 주된 경쟁자인 이라크에 백억 달러가 넘는 무기를 판매하면서 무기경쟁을 거들었다. 그러나 지역의 군사화를 촉진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미국이었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이란,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는 중동에 판매된 전체 무기의 56%를 구매했으며, 이것은 전세계 무기구매의 약 4분의 1에 해당했다. 리 해밀턴 민주당 의원은 1973년 의회 연설을 통해 지역에 대한 무기판매의 잠재적인 과격성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는 이 걸프국들이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팔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샀다. 특히 이란은 최첨단 무기는 무엇이든 손에 넣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란 국왕은 1974년에 미 해군 주력 전투기인 F-14 톰캣 79대를 포함하여, 구매 가능한 최신 무기 시스템을 미국 제조사로부터 사들였다. 1970년대 중반 경 미국은 걸프지역의 안보개념이 거의 완전히 전쟁무기를 구매할 수 있는 석유생산자의 능력에 기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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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지역의 군사화는 기존의 불안정을 악화시켰으며 지역분쟁의 시대를 앞당겼다. 무기판매의 전성기에 일부 미국관리들과 선출된 대표들은 불안해졌다. 1970년대 내내 그리고 80년대 초반에, 국회의원들은 걸프지역의 대규모 군사화의 잠재적 위험을 구체화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다. 국회의원들의 우려는 새롭게 무장한 아랍 석유생산자들이 이스라엘에 제기할 잠재적 위협에 주로 집중되었다. 해밀턴은 경고했다. “우리가 우려해야할 정당한 문제는 마땅히 중동의 극도로 불안한 지역에 정교한 무기를 대량으로 쏟아 붓는 전반적 정책이어야 한다. 이 지역은 지역적 협력의 모범이 아니라 지난 수백 년간 영역, 종족, 가족, 정치 분쟁의 과잉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해밀턴의 불안에 공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미국의 걸프정책을 감독하는 책임을 진 자들은 이러한 우려를 묵살했다. 해밀턴을 비롯한 이들의 경고는 신중함을 촉구했지만, 정책결정자들이나 무기제조사들은 오랫동안 동맹이었던 권위주의 정권의 안정에 대해 의문을 품을 생각이 없었다. 특히 첫 번째 오일붐 이후 걸프 석유국들은 전보다 훨씬 더 장악력을 갖춘 것으로 보였다. 1970년대 중반 무렵에 수십억 달러의 새로운 석유수입으로 두둑해진 걸프 석유생산자들은 십년간 계속해서 사회, 경제, 잠재적 정치문제 해결을 위해 돈을 마구 뿌렸다. 지역 정권들은 현대화와 개발 프로그램과 평생에 걸친(요람에서 무덤까지) 사회서비스 확대를 위해 수십억 달러를 썼다.
지출 의도는 잠재적 반항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석유 수입을 재분배하는 것이었다. 사회불안의 잠재력은 상당했다. 대부분의 걸프군주들은 정복이나 제국주의 세력과의 동맹, 또는 양쪽 모두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미국이 선호하는 대리인들인 이란과 사우디 지배자들은 권력 수립과 유지를 위해 강압과 회유를 결합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시민들의 눈에 신뢰나 정당성을 확보한 정권은 없었다. 어느 국가든 정치적 붕괴의 조짐이 분명했다. 사우디와 이란인 대부분이 새로운 부와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받아들였지만, 지배자들의 관행에 계속 저항하는 이도 많았다. 사우디와 이란정권 모두 전반적인 부의 재분배가 사회의 표면 아래서 폭발하기만을 기다리는 어떠한 적대감도 진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정권 모두 중대한 개혁을 실시하거나 시민의 정부참여를 확대하지 않았다. 인구가 더 적은 사우디는 전보다는 덜 강압적이 되었지만, 정권타도의 위협은 어디에나 있었다. 대조적으로 이란 국왕은 여전히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군이었다. 마틴 애널스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은 1977년에 이란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사형선고율, 유효한 사법제도의 부재,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고문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란은 세계에서 최악의 인권침해 기록을 갖고 있다.” 양국 지도자들은 치솟는 석유수입과 새로운 소비력 덕분에 자국에서 전제정치를 갱신할 권한을 갖게 된 것처럼 행세했다. 그들의 사회 프로그램은 피치자들과 새로운 거래를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거래는 국부 재분배와 완전한 정치적 침묵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란과 사우디 내외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회계약과 석유수입의 유입으로 정권이 강화되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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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와 이란 둘 다 협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두 정권 모두 석유붐으로 더 강력해진 것이 아니라, 1970년대 말경에는 심각한 국내 압력으로 취약해졌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1979년 11월에 두 개의 소요에 휘말렸다. 동부 지방의 시아파 수만명이 사우디의 지배와 특히 이등시민으로서의 자신들의 지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러나 앞의 사건과는 상관없이, 반군 수백명이 메카 대사원을 장악한 뒤 점거했다. 사우드 왕가를 정통성이 없는 지배자라고 비난한 반군은 2주 동안 사원에서 버텼지만 사우디와 프랑스 특수부대에 의해 뿌리뽑혔다.그러나 석유에 힘입은 이란의 권위주의 정권이 가장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란 혁명가들은 1979년 국왕을 자리에서 내쫓았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관리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국왕의 퇴진으로 두 기둥 정책은 붕괴되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혁명은 미국의 전략적 동맹 이란을 위험한 경쟁자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지역적 힘의 균형을 급진적으로 변형시켰다. 지역에서 이란의 새로운 위치라는 현실이 어떻든 간에, 혁명은 지역의 질서 유지를 위해 매우 군사화된 현지 세력에 대한 미국의 의존에 극적인 종말을 고했다. 1980년대와 그 이후로도 미국은 계속해서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석유생산자들의 군사화를 장려하고 감독했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대리인들이 정치적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믿음을 잃었다. 이란 국왕의 퇴진 직후 새로운 냉전의 전개로 인해 중동의 석유가 취약하다는 불안 역시 심해졌고, 그러한 불안 때문에 지역에서 미국이 권력을 투사하는 방식의 변형도 가속화되었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자마자, 카터는 걸프지역에 대한 미국의 강한 애착과 석유 공급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미국은 기꺼이 군사력을 사용할 것을 밝혔다. 카터가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전략/군사적 전망을 세우더라도, 앞으로 몇 년간은 그러한 전망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직접 개입의 시대가 열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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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전쟁이란 혁명은 지역질서 변형과 미국정책의 재구성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걸프지역을 괴롭혀온 파괴적인 힘들의 많은 부분을 풀어놓는데 기여했다. 1980년 9월 이란의 취약성을 감지한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국내의 잠재적 도전을 우려한 끝에 이라크군에게 이란의 석유시설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1988년까지 지속된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전투로 수십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로 줄곧 걸프지역은 거의 전쟁에 휩싸였다. 물론 미국의 석유정책이 후세인이 이란을 공격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건 아니었다. 후세인은 자신이 수많은 국내적, 지역적 도전에 시달리고 있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그를 전쟁으로 이끈 생각은 부분적으로 병적이었지만, 그 생각을 형성한 것은 지난 십년 사이에 계속된 석유와 지역의 군사화였다. 극심한 군사화, 지역의 무기경쟁의 정치학, 역내 국가들 사이에서 서로에 대해 점점 더 커지는 대담성과 피해망상의 결합은 후세인의 정치적 계산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자신이 방심한 틈을 타 이라크가 이란을 침략했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의 많은 정책결정자들은 전쟁의 지속을 지역의 가장 군사화된 두 정권을 진창에 빠트리고 지역질서와 석유의 정치경제에 대한 단기적 위협을 저지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분쟁의 두 당사자에게 무기, 자금, 정보를 제공했으며, 이라크가 적군과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인정하고 용납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양국을 교전에 가두어둠으로써 역내 다른 곳의 안보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방조할 가치가 있는 유용한 분쟁으로 보기로 한 결정은 위험한 도박으로 드러났다. 불행히도 그 결정 때문에 카터 독트린과 걸프지역에서 미국의 직접개입이 실현되었다. 결국 미군을 지역에 끌어들여서 머무르게 한 것은 석유선적에 대한 위협이었다.
1986년 쿠웨이트는 미국과 소련 양국에게 석유 탱커에 대한 이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했다. 그 다음해 3월 미국은 쿠웨이트 탱커에 미국 국기를 게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은 탱커에 대한 공격이 미국의 이익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직접적인 보호를 위해 거대한 해군함대를 보낼 수 있게 해주었다. 1987년에 미군과 이란군은 여러 번 교전을 벌였다. 1988년에 미국이 이란 전함 여러 대를 침몰시키고 석유플랫폼을 손상시키면서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그해 여름 USS 빈센스가 이란 여객기를 격추시켜 탑승한 민간인 290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란은 이 사건으로 결정타를 맞고 전쟁을 계속하려는 의욕을 상실했다. 미국이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사상자를 내고 그 원인을 제공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큰 비밀도 아니다. 그러나 지역에서 또는 지역의 군사주의의 역사에서 미국이 개입한 유형들을 고려할 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포함되어야 한다. 이 전쟁은 1979년 혁명으로 시작된 우려들, 즉 이란의 힘과 야심에 대한 미국과 아랍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지역의 주요한 부기맨들(옮긴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The Real Ghostbusters에서 부기맨은 아이들의 두려움에 의해 힘이 커진다)과 “불량” 국가들 중 하나로서 이란의 지위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계속해서 지역의 미군주둔을 정당화하는 주요하고 반복되는 근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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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하기 힘든 안보미국의 개입 확대와 지역의 군사주의와 무력충돌의 역사는 일종의 지역안보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석유는 계속 공급되고, 석유생산자 연결망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지역에서 미국의 주된 이익에 봉사했다. 그러나 30년간의 전쟁은 이 주장이 거짓임을 말해준다. 전쟁은 안보, 안정, 평화에 해당하지 않는다. 심지어 지역에서는 전간기(戰間期)에도 정권들이 바로 자신의 피치자들에게 실행한 폭력은 평화는 반드시 평화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국과 특히 중동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30년간의 전쟁 동안 수십만명이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가난, 환경재난, 고문, 비참한 생활조건은 이라크, 이란, 그 외 다른 곳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물론 사망과 파괴의 책임이 전적으로 미국과 미국의 군사화 정책에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정치학은 주로 지역의 지도자들의 이익에 봉사했다. 그들은 종종 취약한 위치 때문에 자신의 권위에 대한 내부의 도전을 외부로 돌리려고 폭력을 수출했다. 그리고 특히 냉전시기에 국제적인 정치적 경쟁은 다른 세계 열강들을 끌어들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소련 역시 중동에서 불안정과 혼란의 원인을 제공하는데 기여했다.
지역의 독재자들은 여전히 정권을 쥐고 있다.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들 중 세 나라인 바레인, 사우디 아라비아, 오만에서 2011년 초 시민들이 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이 정부들은 주로 미국에게 구입한 전쟁무기를 자신의 피치자들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겨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 정권들이 전혀 안정적이지 않으며 국내와 지역의 충격에 취약하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사실도 명백하다. 이것은 진정으로 미국의 정책을 진퇴양난에 빠뜨린다. 전쟁이 앗아간 인명과 전쟁이 제기하는 도덕적 딜레마와 함께, 미국에서 석유의 진정한 가격을 결정하려는 미국인들은 걸프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주둔을 유지하는 것의 재정적 비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로저 스턴(옮긴이: 존스홉킨스대 경제지리학자)은 1976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이 걸프지역에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총비용이 약 7조 달러라고 추산했으며, 이 수치는 2003년 이라크전에 사용한 비용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이 점점 더 무력을 사용하려는 의지와 세계시장에 석유 공급을 확보하기 위한 폭력은 미국의 강력함이 아니라 오히려 한계의 표시다. 미국에서 인기 있는 정치담론은 종종 미국인들과 그들의 정부를 자기도 모르게 건강에 해롭고 지속이 불가능한 중독에 빠진 희생자나 사기꾼 같은 석유생산자들에게 속아 넘어간 바보로 상정한다. 석유에 대한 이런 중독을 끊는 것은 확실히 현명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중독의 역사와 그 중독에 따른 복합적 비용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검토가 이루어질 것인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오히려 미국은 익숙한 그 길을 계속 가기로 예정된 것처럼 보인다. 석유와 불안정한 석유생산자들과 관계를 마련하고, 이러한 관계의 운명을 미국의 국가안보와 연결시킨 까닭에, 거의 어쩔 수 없이 가장 최근의 석유전쟁을 마무리 짓고 있는 동안에도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전략가들은 이미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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