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칼 크라우스

번역: 칼 크라우스의 "언어" - 싸가지론 논쟁에 대한 단상을 대신하여

언어의 형태(Gestalt)가 아니면 의미전달(Mitteilung)에 입각하여 언어에서의 말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둘 다 [언어를 사용하는] 탐구수단에 의해서 [언어란] 질료의 일부가 되지만, 그 어는 점에서도 공통의 인식으로 만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시구의 청진과 언어사용의 퍼켜션 사이에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위의 두 갈래 시도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는 일은 둘 다 언어란 유기체와 동일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모든 영역에서, 시편에서 시작해서 지역보도기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연법칙성이 의식(Sinn)에 의미(Sinn)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입자인] 불변화사가 논리적인 전체를 포괄한다는 규범을 관통하는 것은 저 자연법칙성 외의 그 어떤 원소(Element)도 아니며, 어떻게 한없이 한찮은 것을 위해서 한 시구가 피어나고 시들어지는지 그 비밀을 관통하는 것 역시 저 자연법칙성일 뿐이다.  

 

최근의 언어학은 [언어의] 규칙성을 넘어서 창조적인 필연성을 인정하는데까지 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창조적인 필연성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Sprachwesen)과의 연관을 알아차리고 읽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규칙성에서도 [언어의] 정형과 기형을 기록하는데에는 공을 세웠지만 본질적인 인식에는 제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 언어학과 같이 인간과의 연관을 읽어내지 못했다.

 

저들이 시적 자유라고 일컫는 게 단지 운율법상으로만 구속된 것인가? 아니면 보다 깊은 합법칙성에 의존하는 것인가? 그게 언어사용에서 작용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이런 작용의 연속하에 마침내 언어사용이 규칙이 되어서] 결국 규칙이 언어사용에 의존하게 되는게  아닌가? 말의 선택에 대한 책임성 –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야 할 이 선택, 하지만 실지로는 가장 쉽게 행해지는 이 선택 – 이런 책임성을 갖는 것, 이 건 글쓰는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요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이 책임성을 깨닫는 일, 바로 이 일에 있어서 언어교육자들이 부족하다. 이 일의 요구에 충족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자칫 심리학적인 문법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학교문법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언어교육자의 부족함은 말의 심적 공간에서 논리적으로 사유할 줄 모르는데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관계하는 훈계의 활용은 절대 말하기(sprechen)를 배우는 사람이 또한 언어(Sprache)를 배워야 한다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이건 분명 말형태(Wortgestalt)를 파악하는 가운데 직접 유용한 것 저편 (jenseits des greifbar Nutzhaftenen)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근하는데 있다. 이런 도덕적인 수확의 보증은 벌 받지 않고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언어를 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기준으로 책임성을 책정하는 정신의 훈육(Disziplin)에 있다. 삶을 좋게 하는 모든 것(Lebensgut)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는데 이런 훈육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다.

 

과연, 언어적인 주저(Zweifel/의심, 회의)보다 더 강력한 도덕적인 것의 보호(Sicherung)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주저에 모든 물질적인 소망에 앞서 사유의 아버지가 되는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오늘날의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는, 전문이의 그것을 포함해서, 경솔한 결정의 진수가 되어서 언어를 사건과 체험을, 있음과 그러함을(ihr Sein und Gelten) 신문이 하라는 데로 하는 시대의 쓰레기(Wegwurf)로 만들었다. 주저(Zweifel)는, 언어의 덕택일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경멸의 대상이 된 커다란 재능으로서의 주저는 틀림없이 문명의 종말로 이끄는 진보를 제지하는, 문명에 봉사한다고 망상하는 진보를 제지하는 구원[의] 힘일 것이다.

 

(이어짐)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칼 크라우스: 인류의 마지막 날들 - 서설

지구의 시간개념(Zeitmaß)으로 할 것 같으면 한 열 밤이 필요한 이 극의 공연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위성] 화성극장(Marstheater)의 몫이다. 이 세상의 극장관객들은 이 극을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애기되는] 피는 그들의 피에서 쥐어짠 것이며, 내용은 상상 불가능한, 깨어있는 감관이라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어떤 기억으로도 접근 할 수 없는, 오직 피비린내 나는 꿈에만 보관되어 있는 몸쓸현실의(unwirklich) 나날들(ᅠJahre)의 내용에서, 하찮은 인간들이(Operettenfiguren) 인류의 비극을 연출했던 그 나날들의 내용에서 쥐어짠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의 현장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줄거리는 저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몸쓸가능성의(unmöglich) [연속이며], 협곡에서 협곡으로 이어져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긍정으로 인도하는] 영웅이 없는 [줄거리 아닌] 줄거리다. 이걸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기질(Humor)은 오직 이런 시대의 일들에 대한 증언을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이 무사히 견디어 냈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도 광인이 되어버리지 않은 자의 자책에 있다. 이런 [1차대전이란 비극을 증언하면서 미쳐버리지 않았다는] 자책에 있는 불명예를 후세에 노출하는 자외의 그 어떤이도 이런 기질(Humor)을 가질 권리가 없다. 저런 일이 일어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웃을 권리를 울어야 할 의무의 뒷편에 세우기 바란다.

 

여기서 보고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은 정말 일어난 일들이다. 난 저들이 했던 일만을 그렸다. 여기서 나누어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을 문자 그대로 뱉어진 말들이다. 가장 강렬한 [허구와 같은] 창작은 인용들이다.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과 감각은 다 빠져 나가고] 상실할 수 없도록 귀에 새겨진 광기에 의해서만 [문장의 모양을 갖춘] 문장들이 [서로 붙어서] 삶을 충동질하는 장단(Lebensmusik)이 된다. [이 장단에 맞추어] 문헌이 춤을 춘다. 기사(記事)들이 일어나 등장인물(Gestalt)이 되었다가 생을 마감하고 논설이 된다. 문예란은 독백하는 입이 되어 짓거린다. 껍데기 빈만들은 두발로 서 있다  – 사람들은 단지 하나만 가지게 됐다.

 

음의 높고낮음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시대를 한바퀴 시끄럽게 돌고난 후 재앙을 [촉구하는] 행위의 성가로 부풀어 오른다. 인류의 구성원으로 살았다가 [파괴된] 인류를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은 없지만 그래도 피가 있다는, 피가 없다면 그래도 먹물이 있다는 현세대의(Gegenwart) 가해자와 대변인이 되어 살가죽이 벗겨진채 환영과 꼭두각시가 되었고 움직이는 부실(不實)이란 공식으로 전락하였다.

 

비극적인 사육제의 가면인 유충과 유혼은 살아있는 [자들의] 이름을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우연에 기대고 있는 이 현세에 아무것도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모든 것은 지역으로 제한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동네구멍가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우주의 일개 [관]점으로 지배된다.

 

신경이 약한 사람은, [공연]시간을 참을 수 있는 신경이야 강하고 충분하다 할지라도, 이 놀이(Spiel/극)에서 사라지기 바란다. 저런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세대가(Gegenwart) 말이 된 공포를 재미외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얼마 전에 체험하고 [겨우] 살아남은 것을 고안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저 공포가 가장 소름끼치는 사투리[=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침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말[=오스트리아사투리의 특유한 리듬]로 저 세대에 다시 되돌려 질 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쟁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진행중인 전쟁은 견디면서 지나간 전쟁은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치욕은 어떤 전쟁의 치욕도 넘어선다. 전쟁을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전쟁은 저들을 살아남았다. 가면들은 재의 수요일[에 걸려 사라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지만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은] 서로 상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체험의 능력뿐만 아니라 체험한 것에 대한 그 어떤 표상의 능력까지 전무(全無)한 시대의 각성을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붕괴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아무런 느낌없이 [전쟁을] 저질렀던 것처럼 속죄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는 이 시대, 그러나 자기보호능력은 충분해서 그들이 불렀던 영웅적인 멜로디들을 틀어주는 축음기 앞에서는 귀를 틀어막지만, 그러나 희생정신은 [아직] 충만해서 상황이 허락하면 그런 멜로디들을 다시 부르는 이 시대! “지금은 전쟁이다!”라는 구호는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가능하게 해주고 덮어주었던 것으로, 반면 “지금은 전쟁이었다!”라는 경고는 살아남은 자의 매우 지당한 평온을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있을 거다”란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락은 역자가 매김 것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