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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언어의 형태(Gestalt)가 아니면 의미전달(Mitteilung)에 입각하여 언어에서의 말의 가치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둘 다 [언어를 사용하는] 탐구수단에 의해서 [언어란] 질료의 일부가 되지만, 그 어는 점에서도 공통의 인식으로 만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시구의 청진과 언어사용의 퍼켜션 사이에는 말에 포함되어 있는 수많은 세계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위의 두 갈래 시도에서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는 일은 둘 다 언어란 유기체와 동일한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의 모든 영역에서, 시편에서 시작해서 지역보도기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연법칙성이 의식(Sinn)에 의미(Sinn)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입자인] 불변화사가 논리적인 전체를 포괄한다는 규범을 관통하는 것은 저 자연법칙성 외의 그 어떤 원소(Element)도 아니며, 어떻게 한없이 한찮은 것을 위해서 한 시구가 피어나고 시들어지는지 그 비밀을 관통하는 것 역시 저 자연법칙성일 뿐이다.
최근의 언어학은 [언어의] 규칙성을 넘어서 창조적인 필연성을 인정하는데까지 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창조적인 필연성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Sprachwesen)과의 연관을 알아차리고 읽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규칙성에서도 [언어의] 정형과 기형을 기록하는데에는 공을 세웠지만 본질적인 인식에는 제몫을 다하지 못한 과거 언어학과 같이 인간과의 연관을 읽어내지 못했다.
저들이 시적 자유라고 일컫는 게 단지 운율법상으로만 구속된 것인가? 아니면 보다 깊은 합법칙성에 의존하는 것인가? 그게 언어사용에서 작용하는 것과 다른 것인가? [이런 작용의 연속하에 마침내 언어사용이 규칙이 되어서] 결국 규칙이 언어사용에 의존하게 되는게 아닌가? 말의 선택에 대한 책임성 –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야 할 이 선택, 하지만 실지로는 가장 쉽게 행해지는 이 선택 – 이런 책임성을 갖는 것, 이 건 글쓰는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요구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러나 이 책임성을 깨닫는 일, 바로 이 일에 있어서 언어교육자들이 부족하다. 이 일의 요구에 충족해야 [한다고 느끼면서] 자칫 심리학적인 문법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학교문법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언어교육자의 부족함은 말의 심적 공간에서 논리적으로 사유할 줄 모르는데 있다.
언어뿐만 아니라 말하기와 관계하는 훈계의 활용은 절대 말하기(sprechen)를 배우는 사람이 또한 언어(Sprache)를 배워야 한다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이건 분명 말형태(Wortgestalt)를 파악하는 가운데 직접 유용한 것 저편 (jenseits des greifbar Nutzhaftenen)에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영역으로 접근하는데 있다. 이런 도덕적인 수확의 보증은 벌 받지 않고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것, 즉 언어를 대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기준으로 책임성을 책정하는 정신의 훈육(Disziplin)에 있다. 삶을 좋게 하는 모든 것(Lebensgut)에 대한 경의를 가르치는데 이런 훈육보다 더 적합한 것은 없다.
과연, 언어적인 주저(Zweifel/의심, 회의)보다 더 강력한 도덕적인 것의 보호(Sicherung)를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주저에 모든 물질적인 소망에 앞서 사유의 아버지가 되는 권리가 있는 게 아닐까? 오늘날의 모든 말하기와 글쓰기는, 전문이의 그것을 포함해서, 경솔한 결정의 진수가 되어서 언어를 사건과 체험을, 있음과 그러함을(ihr Sein und Gelten) 신문이 하라는 데로 하는 시대의 쓰레기(Wegwurf)로 만들었다. 주저(Zweifel)는, 언어의 덕택일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 경멸의 대상이 된 커다란 재능으로서의 주저는 틀림없이 문명의 종말로 이끄는 진보를 제지하는, 문명에 봉사한다고 망상하는 진보를 제지하는 구원[의] 힘일 것이다.
(이어짐)
2021/05/15 |
2021/03/10 |
2021/03/09 |
2021/03/08 |
2021/02/06 |
지구의 시간개념(Zeitmaß)으로 할 것 같으면 한 열 밤이 필요한 이 극의 공연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위성] 화성극장(Marstheater)의 몫이다. 이 세상의 극장관객들은 이 극을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애기되는] 피는 그들의 피에서 쥐어짠 것이며, 내용은 상상 불가능한, 깨어있는 감관이라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어떤 기억으로도 접근 할 수 없는, 오직 피비린내 나는 꿈에만 보관되어 있는 몸쓸현실의(unwirklich) 나날들(ᅠJahre)의 내용에서, 하찮은 인간들이(Operettenfiguren) 인류의 비극을 연출했던 그 나날들의 내용에서 쥐어짠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의 현장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줄거리는 저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몸쓸가능성의(unmöglich) [연속이며], 협곡에서 협곡으로 이어져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긍정으로 인도하는] 영웅이 없는 [줄거리 아닌] 줄거리다. 이걸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기질(Humor)은 오직 이런 시대의 일들에 대한 증언을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이 무사히 견디어 냈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도 광인이 되어버리지 않은 자의 자책에 있다. 이런 [1차대전이란 비극을 증언하면서 미쳐버리지 않았다는] 자책에 있는 불명예를 후세에 노출하는 자외의 그 어떤이도 이런 기질(Humor)을 가질 권리가 없다. 저런 일이 일어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웃을 권리를 울어야 할 의무의 뒷편에 세우기 바란다.
여기서 보고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은 정말 일어난 일들이다. 난 저들이 했던 일만을 그렸다. 여기서 나누어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을 문자 그대로 뱉어진 말들이다. 가장 강렬한 [허구와 같은] 창작은 인용들이다.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과 감각은 다 빠져 나가고] 상실할 수 없도록 귀에 새겨진 광기에 의해서만 [문장의 모양을 갖춘] 문장들이 [서로 붙어서] 삶을 충동질하는 장단(Lebensmusik)이 된다. [이 장단에 맞추어] 문헌이 춤을 춘다. 기사(記事)들이 일어나 등장인물(Gestalt)이 되었다가 생을 마감하고 논설이 된다. 문예란은 독백하는 입이 되어 짓거린다. 껍데기 빈만들은 두발로 서 있다 – 사람들은 단지 하나만 가지게 됐다.
음의 높고낮음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시대를 한바퀴 시끄럽게 돌고난 후 재앙을 [촉구하는] 행위의 성가로 부풀어 오른다. 인류의 구성원으로 살았다가 [파괴된] 인류를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은 없지만 그래도 피가 있다는, 피가 없다면 그래도 먹물이 있다는 현세대의(Gegenwart) 가해자와 대변인이 되어 살가죽이 벗겨진채 환영과 꼭두각시가 되었고 움직이는 부실(不實)이란 공식으로 전락하였다.
비극적인 사육제의 가면인 유충과 유혼은 살아있는 [자들의] 이름을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우연에 기대고 있는 이 현세에 아무것도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모든 것은 지역으로 제한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동네구멍가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우주의 일개 [관]점으로 지배된다.
신경이 약한 사람은, [공연]시간을 참을 수 있는 신경이야 강하고 충분하다 할지라도, 이 놀이(Spiel/극)에서 사라지기 바란다. 저런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세대가(Gegenwart) 말이 된 공포를 재미외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얼마 전에 체험하고 [겨우] 살아남은 것을 고안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저 공포가 가장 소름끼치는 사투리[=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침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말[=오스트리아사투리의 특유한 리듬]로 저 세대에 다시 되돌려 질 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쟁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진행중인 전쟁은 견디면서 지나간 전쟁은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치욕은 어떤 전쟁의 치욕도 넘어선다. 전쟁을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전쟁은 저들을 살아남았다. 가면들은 재의 수요일[에 걸려 사라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지만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은] 서로 상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체험의 능력뿐만 아니라 체험한 것에 대한 그 어떤 표상의 능력까지 전무(全無)한 시대의 각성을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붕괴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아무런 느낌없이 [전쟁을] 저질렀던 것처럼 속죄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는 이 시대, 그러나 자기보호능력은 충분해서 그들이 불렀던 영웅적인 멜로디들을 틀어주는 축음기 앞에서는 귀를 틀어막지만, 그러나 희생정신은 [아직] 충만해서 상황이 허락하면 그런 멜로디들을 다시 부르는 이 시대! “지금은 전쟁이다!”라는 구호는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가능하게 해주고 덮어주었던 것으로, 반면 “지금은 전쟁이었다!”라는 경고는 살아남은 자의 매우 지당한 평온을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있을 거다”란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락은 역자가 매김 것임)
2021/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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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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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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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연합뉴스 기사를 읽게 되었다."세월호 비극 후 시를 쓴다는 것은…"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4/08/21/0914010000AKR20140821155200005.HTML)
알만한 사람은 알 수 있는 인용이다.
"아우슈비츠 후 시를 쓴다는 것은 ..."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등가가치에 익숙한 문화거래상들...
아우슈비츠 = (X) 세월호 ?
바로 이런 등식이 불가능하다는 게 '아우슈비츠 후'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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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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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감성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제가 이걸 보고 대구지하철 참사가 생각났어요. 제가 왜 이걸 기억하냐면 그해에 제가 어느 인터넷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같이 일하던 분이 시인이었어요. 그 분이 그 참사때문에 시를 썼는데 그게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그 다음달에 이라크전이 터졌어요. 그런데 대구지하철 참사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엔하위키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관사의 행위가 용서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기관사가 모든 것을 뒤집어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관련자들의 처벌이 어떤가 하면 1080호 기관사 최상열은 열차의 출입문을 닫아버려 승객들의 탈출을 막아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한 점에서 금고 5년이, 1079호 기관사 최정환과 가장 먼저 화재 사실을 연락 받은 관제사 방정민에 대해서는 초동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각각 금고 4년, 홍순대 등 나머지 관제사들에 대해서는 각각 금고 3년에서 1년 6월이 선고되었으며 그 밖의 역무원이나 시설 책임자들에 대해서는 직접 책임이 없다고 하여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에 대해 '다른 국가라면 이런 약한 처벌은 없었을 것이다' 등의 비판이 가해지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총체적 부실인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자꾸 잊어먹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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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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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 혹은 시를 쓰는 행위에 삼투되어 있는 앙가지망의 시간성입니다.제가 여기서 블로그를 만들면서 'nach Ausschwitz'(아우슈비츠 후)에서 사용되는 전치사 'nach'의 번역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nach'의 시간성은 '후'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눈 앞에 두고, 아우슈비츠의 시간에서 시를 쓰는 건 야먄적인 행위, 예 그렀습니다. 문법을 파괴하는 크라우스의 "지금이 전쟁이었다"란 말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인용아닌 인용은, 아우슈비츠 자리를 등가물로 대신하여 인용하는 인용은, 아우슈비츠뿐만 아니라 세월호도 눈앞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교환가치만 남아 있습니다. 그게 '아름다운 혼'(schoene Seele/마르크스, 자본론)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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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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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시보는 4월 18일자 사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http://www.onbao.com/news.php?mode=view&num=40815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강력한 역량을 발휘한 구조는 사실이 해내기 어려운 것이다. 현대인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영향을 깊이 받아 기적은 종종 발생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서투른 구조가 냉정한 현실이며 훌륭한 구조는 실제로 보기 어렵다. [...] 많은 인명피해를 불러오는 사고를 방지하는 것은 현대사회의 끝없는 도전이다. 한국의 해난은 중국에게 이번 도전의 결과가 사회 발전 수준과 결코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현대화라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경제침체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우슈비츠 이후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와 같은 정치공방을 하는 겁니다. 아도르노가 말한 아우슈비츠 이후의 글쓰기라는 문제는 제가 다룰 수가 없습니다. 앞에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태고 뒤에 것은 심층적인 질문인데 이건 유럽의 역사를 모르면 얘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자기성찰이 존재했습니다. 한국은 지금 박정희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박정희는 한국에서 가부장 질서를 만든 사람입니다. 군대나 공장, 학교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라 전체를 군대식으로 개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수한 정치공방 속에서 민주화세력은 탄압의 피해자로서만 존재하지 그 가부장질서의 수혜자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그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이건 그들의 침묵에 동조하는 여자들에게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딸들의 항거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 박근혜를 위한 변명은 일체 존재해서는 안되는 불순한 것이 됩니다. 솔직히 제가 보기엔 이건 마녀사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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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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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민주주의 혹은 시민사회를 사유하면서 가부장적인 마인드로 꽉 차 있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1755년 리스본의 대지진은 라이프니츠의 신의론(神義論)까지 쓰러뜨리죠. '좋으신 아버지가 어떻게 저런 걸 허락해...' 신의론은 가부장적이죠.
박근혜 정부 책임론에서도도 좋고 나쁜 게 다 위로부터 온다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엿봅니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정부책임론은 또다른 신의론인데, 다른 건 "나쁜 x이 어떻게 좋은 걸 할 수 있어? 정체를 밝혀."가 아닌지 ...
독일 해난구조의 선두에 있는 조직은 '독일생명구조협회'(Deutsche Lebens-Rettungs-Gesellschaft/DLRG)라는 민간조직입니다. 1913년 설립되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휴양지 도시들은 100미터 정도 바다 안으로 들어가 바다바람을 즐길 수 있는 다리가 있는데, 빈츠라는 휴양지에서 저런 다리가 무너져 14명이 익사합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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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민간조직은 해안에서의 사고에 집중.해상사고 구조의 선두에 있는 조직도 역시 민간조직: 독일난파구조협회(Deutsche Gesellschaft zur Rettung Schiffbrüchiger). 1854년 북해에서 독일 이민자들을 실은 배 Johanne가 침몰하여 이민자 84명이 숨진 게 창설의 결정적인 계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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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으로 정부의 척박함과 동시에 시민사회의 척박함이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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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난파구조협회(Deutsche Gesellschaft zur Rettung Schiffbrüchiger) 홈페이지 (www.seenotretter.de)에 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재정조달에서 세금, 다시 말해서 정부보조가 차지하는 부분은 0 유로라고 합니다. (총 3,620만 유로/ 2013년). 회비, 기부금, 그리고 정부업무(hoheitliche Aufgabe) 대행 보상금으로 운영됩니다. 정부도 준국가기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2013년 2081번 출동하여 718명을 구조했습니다. 직원은 180명의 상근자와 800명의 자원봉사자입니다. 크고 작은 구조순양함(Seenotkreuzer)이 20척 있으며, 구명보트 40개가 있습니다. (http://www.seenotretter.de/wer-wir-sind/kurzportrait/)대형교회는 자랑하지만 저런 민간구조조직이 없다는게 안타까운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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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들이 싸우는 박정희는 죽고 없다는게 함정이죠. 하루키가 쓴 1Q84에 대해서 한 일본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해요."1984년의 조지 오웰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제 빅 브라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틀 피플이란 단적으로 말해서 최근의 재특회다. 인터넷 공간에서 꿈틀거리다 나온, 깊이 없는 우익이다. 일장기를 짊어지고 뚜벅뚜벅 걷는 난쟁이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특권'을 배격하려는 얼굴 없는 프리 아르바이터 우익이다."
한국은 구 운동권은 박정희의 유령과 싸우고 신 운동권은 일베랑 싸우고 있어요. 이건 어떻게 보면 공지영이나 장하준이 말한 것처럼 가서 싸울 실체가 없기 때문이에요. 사람들보고 분노하라고 하는데 뭐에 분노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잡초들은 일어났다가 밟힐까봐 그냥 엎드려있는거에요. 저도 아르바이트해봐서 아는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간당 5천원 주고 그런 일 시키면 안돼요. 그런 사람들이 언제까지 참고만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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