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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크라우스: 인류의 마지막 날들 - 서설

지구의 시간개념(Zeitmaß)으로 할 것 같으면 한 열 밤이 필요한 이 극의 공연은 [전쟁의 신 마르스의 위성] 화성극장(Marstheater)의 몫이다. 이 세상의 극장관객들은 이 극을 견딜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애기되는] 피는 그들의 피에서 쥐어짠 것이며, 내용은 상상 불가능한, 깨어있는 감관이라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어떤 기억으로도 접근 할 수 없는, 오직 피비린내 나는 꿈에만 보관되어 있는 몸쓸현실의(unwirklich) 나날들(ᅠJahre)의 내용에서, 하찮은 인간들이(Operettenfiguren) 인류의 비극을 연출했던 그 나날들의 내용에서 쥐어짠 것이기 때문이다.    

 

수백의 현장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줄거리는 저 나날들과 마찬가지로 몸쓸가능성의(unmöglich) [연속이며], 협곡에서 협곡으로 이어져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긍정으로 인도하는] 영웅이 없는 [줄거리 아닌] 줄거리다. 이걸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기질(Humor)은 오직 이런 시대의 일들에 대한 증언을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이 무사히 견디어 냈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도 광인이 되어버리지 않은 자의 자책에 있다. 이런 [1차대전이란 비극을 증언하면서 미쳐버리지 않았다는] 자책에 있는 불명예를 후세에 노출하는 자외의 그 어떤이도 이런 기질(Humor)을 가질 권리가 없다. 저런 일이 일어날 때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동시대의 사람들은 웃을 권리를 울어야 할 의무의 뒷편에 세우기 바란다.

 

여기서 보고되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들은 정말 일어난 일들이다. 난 저들이 했던 일만을 그렸다. 여기서 나누어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대화들을 문자 그대로 뱉어진 말들이다. 가장 강렬한 [허구와 같은] 창작은 인용들이다.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과 감각은 다 빠져 나가고] 상실할 수 없도록 귀에 새겨진 광기에 의해서만 [문장의 모양을 갖춘] 문장들이 [서로 붙어서] 삶을 충동질하는 장단(Lebensmusik)이 된다. [이 장단에 맞추어] 문헌이 춤을 춘다. 기사(記事)들이 일어나 등장인물(Gestalt)이 되었다가 생을 마감하고 논설이 된다. 문예란은 독백하는 입이 되어 짓거린다. 껍데기 빈만들은 두발로 서 있다  – 사람들은 단지 하나만 가지게 됐다.

 

음의 높고낮음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시대를 한바퀴 시끄럽게 돌고난 후 재앙을 [촉구하는] 행위의 성가로 부풀어 오른다. 인류의 구성원으로 살았다가 [파괴된] 인류를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은 없지만 그래도 피가 있다는, 피가 없다면 그래도 먹물이 있다는 현세대의(Gegenwart) 가해자와 대변인이 되어 살가죽이 벗겨진채 환영과 꼭두각시가 되었고 움직이는 부실(不實)이란 공식으로 전락하였다.

 

비극적인 사육제의 가면인 유충과 유혼은 살아있는 [자들의] 이름을 갖는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우연에 기대고 있는 이 현세에 아무것도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모든 것은 지역으로 제한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동네구멍가게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도 역시 우주의 일개 [관]점으로 지배된다.

 

신경이 약한 사람은, [공연]시간을 참을 수 있는 신경이야 강하고 충분하다 할지라도, 이 놀이(Spiel/극)에서 사라지기 바란다. 저런 놀이를 가능하게 했던 세대가(Gegenwart) 말이 된 공포를 재미외의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얼마 전에 체험하고 [겨우] 살아남은 것을 고안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저 공포가 가장 소름끼치는 사투리[=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침강하여 편안한 느낌을 주는 말[=오스트리아사투리의 특유한 리듬]로 저 세대에 다시 되돌려 질 때 더욱 그렇다. 그래서 전쟁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진행중인 전쟁은 견디면서 지나간 전쟁은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치욕은 어떤 전쟁의 치욕도 넘어선다. 전쟁을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전쟁은 저들을 살아남았다. 가면들은 재의 수요일[에 걸려 사라지지 않고 무사히] 통과했지만 [그 전에 있었던 일들은] 서로 상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체험의 능력뿐만 아니라 체험한 것에 대한 그 어떤 표상의 능력까지 전무(全無)한 시대의 각성을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붕괴해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아무런 느낌없이 [전쟁을] 저질렀던 것처럼 속죄에 대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는 이 시대, 그러나 자기보호능력은 충분해서 그들이 불렀던 영웅적인 멜로디들을 틀어주는 축음기 앞에서는 귀를 틀어막지만, 그러나 희생정신은 [아직] 충만해서 상황이 허락하면 그런 멜로디들을 다시 부르는 이 시대! “지금은 전쟁이다!”라는 구호는 그 어떤 파렴치한 짓도 가능하게 해주고 덮어주었던 것으로, 반면 “지금은 전쟁이었다!”라는 경고는 살아남은 자의 매우 지당한 평온을 방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있을 거다”란 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락은 역자가 매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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