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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9/04
    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ou_topia
  2. 2012/09/03
    학문하기 - 레오나르도 다빈치
    ou_topia

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고 베를린 자유대 철학 거장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Ringvorlesung이 있었다. 80년대 말로 기억된다. 그중 참신한 보수이며 학자보다는 선생이었던 미하엘 토이니쎈(Michael Theunissen)의 강의 일부를 번역 소개한다. 이 강의는 "시간의 부정신학"(Negative Theologie der Zeit)이라는 묶음집에 발표되었다. 역자는 받아 쓴 것을 번역했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이제] 철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각인한 두 번째 경험을 이야기할 순서입니다. [역사의 아프리오리(A priori)를 사유하려다 거의 미쳐버린 예나 시기의] 헤겔을 [다시] 기초철학(Fundamentalphilosophie)으로 내 밀고 [논리학으로 떨어지게 했던 첫 번째 경험처럼] 이 두 번째 경험도 사유의 [현실]접근(Denkansatz)에 있어서 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르크스 사유에서의 단절(Bruch), 즉 곧바로 [철학에 몰입하는] 철학적인 저서에서 경제비판적인 저서로서의 전환을 말하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토록 명망을 상실한 오늘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1844년 <파리 수고>와 1867년 <자본론> 사이에 일어난 마르크스 이론의 변화가 철학을 이런저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도 인정하는 오늘날의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기 마르크스에서 후기 마르크스로 넘어가면서 철학은 비판이, 비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철학이 역사철학이라면, 철학은 동시에 유적인간의 발전경로의 청사진(Entwurf)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이론에서 이젠 거꾸로, 당시 알려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헤겔에 무의식적으로 접목하면서, 현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으려는 이론으로 변합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는 것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영박물관에 처박혀 자기 생애의 10년을 투자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 10년 사이 철학은 예전에 전혀 없었던 [예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연구(Forschung)가 되었습니다. 철학적 연구는 자신을 부정하는 양태로서의 철학입니다 (Philosophische Forschung ist Philosophie im Modus ihrer Negation.)

유감스럽게도 마르크스 후의 철학이 계속 연구로 머물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오늘날 두루 연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철학은 - 최소한 이것은 주장하고 싶네요 - 연구여야 한다는 혹은 (...) 연구로 시작해야 한다는 요구아래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이 견실한 것이 되려면 달리 할 수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부정양태입니다. 이것은 또한 철학의 첫걸음이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 대목에서만,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굽혀 받아들이는 요구를 다른 사람에게도 할까 합니다. 이 요구를 명확하게 하기위해서 철학적 연구라는 보편적인 개념과 특수한 전제 때문에 철학이 철학적 연구가 된 마르크스의 특수한 상황을 구별해야겠습니다. 저 자신에겐 이런 특수한 의미로서의 연구로 시작하는 철학을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찌되었던 간에 그들이 철학을 연구이상에 맞추기를 기대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추측컨대 마르크스가 [철학을 철학적 연구로 만듬과] 동시에 모든 철학적 연구에 적용되는 잣대를 정립했습니다. 마르크스 후의 모든 철학이 그의 부정된 철학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 잣대는 마르크스가 출발점으로 삼은 특수한 전제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고려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첫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이고 이런 것으로서 모든 철학적 청사진을 앞서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제는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을 까뒤집어] 밖으로 향하게 하고 실재하는 사실(Realien)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강제합니다. 둘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으로서, 지적 활동의 성과로, 특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전공학과의 연구결과(Erkenntnisse)로 매개된 것으로서 역시 모든 철학에 선행되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전제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현실로서의 정치경제학을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거쳐서 서술하게 강제했습니다. 이 자리는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를 토론할 자리는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적용한 방법의 모범성에 주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연구]진행방법의 모범성은 그가 철학을 그렇게 진행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전공학과에 빌어 붙어 [연구하게] 한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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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기 -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히(곰브리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학문하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달인이 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반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게 전통적인 학자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연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가능했던 건 어쩌면 [역설적으로] 바로 그가 [전통적인 학자가 되는 교육을 받아] 어느 한 학자공동체에 속하는 지성인이(zünfiger Gelehrter) 된 것이 아니라 피렌체의 [자유로운]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그 선배들이 이미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다 탐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는 탐구를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깊게,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했다. 그는 당대의 [교양]학자들처럼 책지식(Buchweisheit) 답습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는 한 대목에서 학자들이 자기를 못 배운 사람이라고 얕보고 가볍게 처리하려 했다고 한다. 당대의 학자들은 성경과 고대 글쟁이들의 권위에 기반하지 않은 지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로지 자신의 눈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그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먼저 옛날 글쟁이들의 문헌을 뒤적거릴 생각은 않고 문제해결을 위한 실험에 바로 착수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의 탐구심을 자극했다. 그는 인체의 비밀을 탐구했다. 핏줄, 근육, 힘줄이 어떻게 뻗어나가는가를 그리고 서술하기 위해서 30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했다. 그는 자궁 속 태아의 신비스러운 성장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에 속한다. 그는 물과 공기의 흐름과 소용돌이를 관찰했으며, 곤충과 새의 비상 탐구에 수년을 투자했다. 그는 비행기구를 만들기 원했고 그 계획이 언젠가는 현실화될 거라고 확신했다. 암석과 구름의 포메이션, 물체가 먼 곳에 있을 때 대기가 그 빛깔에 미치는 영향, 꽃과 나무의 성장법칙, 음의 조화 등등 이런 것들과 다른 많을 것들이 멈출 줄 모르는 그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탐구가 그의 예술적 창조의 바탕이 되었다.

(...)

무엇보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탐구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은 욕심이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자연을 하나하나 힘들여 탐구하는 것은 그에게 단지 시각세계를 더 잘 이해하여 그림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회화를 평범한 수공업에서 명예로운, 아니 고귀한 직업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회화예술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기를 원했다. (...) [당시 손을 쓰는 일은 천하게 여겨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자유예술과 자유롭지 않은 예술로 구분함으로써 이미 고대 스노비즘의 전통이 세워졌다. 자유로운 예술은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자유문예에 속하는] 수사학, 논리학, 문법, 기하학 등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유인의 교육에 어울리고 그가 비천한 노예처럼 손에 침 뱉고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하게 강제하지 않는 예술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사람들의 야심은 회화가 이런 '자유로운' 예술이며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손을 놀리는 것은 예를 들어 시인이 시를 쓸 때 손을 놀리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를 후원했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아마 [육체노동이 필요한] 예술의 존엄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주 주문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개나 소나 다 와서 그림을 주문할 수 있는 가게주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서양미술사> 독어 제16판을 참조하여 번역함, 강조 역자] 


<모나리자> 그림 한 장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 그 모든 탐구를 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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