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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기 -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히(곰브리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학문하기를 이렇게 서술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달인이 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반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게 전통적인 학자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연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게 가능했던 건 어쩌면 [역설적으로] 바로 그가 [전통적인 학자가 되는 교육을 받아] 어느 한 학자공동체에 속하는 지성인이(zünfiger Gelehrter) 된 것이 아니라 피렌체의 [자유로운] 예술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을, 그 선배들이 이미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세계를 다 탐구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는 탐구를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깊게,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정확하게 했다. 그는 당대의 [교양]학자들처럼 책지식(Buchweisheit) 답습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어는 한 대목에서 학자들이 자기를 못 배운 사람이라고 얕보고 가볍게 처리하려 했다고 한다. 당대의 학자들은 성경과 고대 글쟁이들의 권위에 기반하지 않은 지식은 상상할 수 없었다. 이와 달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로지 자신의 눈에만 의존하려고 했다. 그는 어떤 문제에 부딪히더라도 먼저 옛날 글쟁이들의 문헌을 뒤적거릴 생각은 않고 문제해결을 위한 실험에 바로 착수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그의 탐구심을 자극했다. 그는 인체의 비밀을 탐구했다. 핏줄, 근육, 힘줄이 어떻게 뻗어나가는가를 그리고 서술하기 위해서 30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했다. 그는 자궁 속 태아의 신비스러운 성장을 과학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에 속한다. 그는 물과 공기의 흐름과 소용돌이를 관찰했으며, 곤충과 새의 비상 탐구에 수년을 투자했다. 그는 비행기구를 만들기 원했고 그 계획이 언젠가는 현실화될 거라고 확신했다. 암석과 구름의 포메이션, 물체가 먼 곳에 있을 때 대기가 그 빛깔에 미치는 영향, 꽃과 나무의 성장법칙, 음의 조화 등등 이런 것들과 다른 많을 것들이 멈출 줄 모르는 그의 탐구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탐구가 그의 예술적 창조의 바탕이 되었다.

(...)

무엇보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자연탐구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은 욕심이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자연을 하나하나 힘들여 탐구하는 것은 그에게 단지 시각세계를 더 잘 이해하여 그림으로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회화를 평범한 수공업에서 명예로운, 아니 고귀한 직업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회화예술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기를 원했다. (...) [당시 손을 쓰는 일은 천하게 여겨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을 자유예술과 자유롭지 않은 예술로 구분함으로써 이미 고대 스노비즘의 전통이 세워졌다. 자유로운 예술은 예를 들어 [일곱 가지 자유문예에 속하는] 수사학, 논리학, 문법, 기하학 등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자유인의 교육에 어울리고 그가 비천한 노예처럼 손에 침 뱉고 몸으로 힘쓰는 일을 하게 강제하지 않는 예술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사람들의 야심은 회화가 이런 '자유로운' 예술이며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손을 놀리는 것은 예를 들어 시인이 시를 쓸 때 손을 놀리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그를 후원했던 사람들 간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아마 [육체노동이 필요한] 예술의 존엄성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주 주문자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개나 소나 다 와서 그림을 주문할 수 있는 가게주인으로 여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  [<서양미술사> 독어 제16판을 참조하여 번역함, 강조 역자] 


<모나리자> 그림 한 장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 그 모든 탐구를 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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