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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15
    마르크스는 자본을 모른다?(3)
    ou_topia
  2. 2012/09/04
    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ou_topia

마르크스는 자본을 모른다?

$low님의 [맑스는 자본을 모른다] 에 관련된 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가 없었더라면 유럽의 과학은  어떻게 발전했을까?

 

아마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플라톤, 정치가/폴리티코스, 266e)이 난무했을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털을 다 뽑은 닭 한마리를 갔다 놓고 “ecce homo!”했을 때 플라톤의 낯은 뜨거웠을 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디오게네스의 해학으로 유럽의 사유는 다행히도 목전에 있는 것을 찍어 올려 보여주는 허섭스레기 학문의 길을 걷지 않게 되었다. 서막에서 넘 챙피를 당했기 때문에. 그러나 불행히도 그게 근절되지는 않았다.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그런 챙피주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도르노의 글엔 ‘허섭스레기’(Abhub, 목전에 있는 것을 들어 올린 것)에 대한 한숨이 곳곳에 서려 있다.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 “이성을 갖는 생명체” 혹은 “공동체(polis)를 이루고 사는 생명체”로 대체되었다.

 

인간에 대한 사유가 사물화(Verdinglichung)의 길에서 벗어났다. 인간이 관계와 실천의 범주가 되었다. 이성 혹은 합리성이 인간 내재적 성질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사물 간의 관계와 실천이 존재하는 영역의 문제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소재 막스 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의 실험결과에 따르면 인간과 영장류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회성에 있다고 한다. 양적 차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침팬지와 어린아이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물질적 세계 인식에서는 심지어 침팬지가 앞선다고 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침팬지는 타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어 숨겨놓은 맛있는 것을 찾는 중 ‘저기 있어’하는 손가락질에 어린아이는 반응하지만 침팬지는 그렇지 않는/못한다는 것 (참조: http://www.3sat.de/page/?source=/scobel/147999/index.html). 이런 능력을 두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 할 수 있고 지시와 맥락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성이 존재하는 관계와 실천의 영역에 대한 사유의 대열이 유럽 정신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야말로 그 사유의 at its best.

 

근데 마르크스가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 플라톤이라는 주장에 말문이 콱 막힌다.

 

맑스는 자본을 물질적 재화라고 보았다.”

 

자본을 사회적 관계에서 분석하고 서술했던 마르크스가 ‘자본은 이것이다’라고 찍어 올려 보여 주었단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자본에 대한 더 자세한 상술은 이곳 EM 님 참조).

 

‘안 그랬다’라고 서부 영화의 카우보이가 권총을 꺼내어 쏘듯이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건 물론 마르크스의 방법이 아니다.

 

관계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명제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건 내 명제와 상관없어’하지 않고 오히려 꾸정물처럼 탁한 현실에 뛰에 들어가 자기상실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신현상학 서설). 전체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온전히 아는 것(고린도 전서 13)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의 ‘마이너스 이자’ 정책에(참조: 유럽중앙은행 집행이사 베노와 쾨레의 2014.9.9 연설,https://www.ecb.europa.eu/press/key/date/2014/html/sp140909.en.html) ‘그건 게젤이 아니야’하는 것과 같은 순수성 지키기는 마르크스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자본의 사물화, 즉 자본을 사물(Ding)로 보는 걸 마르크스는 자본운동의 일정한 단계의 현상으로 주제화한다. ‘자본의 사물화 없어’ 혹은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어’ 하지 않는다. 자본론 324장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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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하기 - 칼 마르크스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놓고 베를린 자유대 철학 거장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Ringvorlesung이 있었다. 80년대 말로 기억된다. 그중 참신한 보수이며 학자보다는 선생이었던 미하엘 토이니쎈(Michael Theunissen)의 강의 일부를 번역 소개한다. 이 강의는 "시간의 부정신학"(Negative Theologie der Zeit)이라는 묶음집에 발표되었다. 역자는 받아 쓴 것을 번역했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이제] 철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을 각인한 두 번째 경험을 이야기할 순서입니다. [역사의 아프리오리(A priori)를 사유하려다 거의 미쳐버린 예나 시기의] 헤겔을 [다시] 기초철학(Fundamentalphilosophie)으로 내 밀고 [논리학으로 떨어지게 했던 첫 번째 경험처럼] 이 두 번째 경험도 사유의 [현실]접근(Denkansatz)에 있어서 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마르크스 사유에서의 단절(Bruch), 즉 곧바로 [철학에 몰입하는] 철학적인 저서에서 경제비판적인 저서로서의 전환을 말하고자 합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토록 명망을 상실한 오늘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1844년 <파리 수고>와 1867년 <자본론> 사이에 일어난 마르크스 이론의 변화가 철학을 이런저런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닌 사람들도 인정하는 오늘날의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초기 마르크스에서 후기 마르크스로 넘어가면서 철학은 비판이, 비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철학이 역사철학이라면, 철학은 동시에 유적인간의 발전경로의 청사진(Entwurf)을 출발점으로 하여 현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한 이론에서 이젠 거꾸로, 당시 알려지지 않은 프랑크푸르트 시기의 헤겔에 무의식적으로 접목하면서, 현재를 출발점으로 하여 역사 전체를 시야에 넣으려는 이론으로 변합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는 것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마르크스가 경제학 고전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영박물관에 처박혀 자기 생애의 10년을 투자했다는 단순한 사실입니다. 이 10년 사이 철학은 예전에 전혀 없었던 [예전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었습니다. 연구(Forschung)가 되었습니다. 철학적 연구는 자신을 부정하는 양태로서의 철학입니다 (Philosophische Forschung ist Philosophie im Modus ihrer Negation.)

유감스럽게도 마르크스 후의 철학이 계속 연구로 머물렀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오늘날 두루 연구가 아니라 할지라도, 철학은 - 최소한 이것은 주장하고 싶네요 - 연구여야 한다는 혹은 (...) 연구로 시작해야 한다는 요구아래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이 견실한 것이 되려면 달리 할 수 없고,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의 부정양태입니다. 이것은 또한 철학의 첫걸음이 연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리고 이 대목에서만,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굽혀 받아들이는 요구를 다른 사람에게도 할까 합니다. 이 요구를 명확하게 하기위해서 철학적 연구라는 보편적인 개념과 특수한 전제 때문에 철학이 철학적 연구가 된 마르크스의 특수한 상황을 구별해야겠습니다. 저 자신에겐 이런 특수한 의미로서의 연구로 시작하는 철학을 요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찌되었던 간에 그들이 철학을 연구이상에 맞추기를 기대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추측컨대 마르크스가 [철학을 철학적 연구로 만듬과] 동시에 모든 철학적 연구에 적용되는 잣대를 정립했습니다. 마르크스 후의 모든 철학이 그의 부정된 철학의 개념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그 잣대는 마르크스가 출발점으로 삼은 특수한 전제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고려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첫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이고 이런 것으로서 모든 철학적 청사진을 앞서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제는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을 까뒤집어] 밖으로 향하게 하고 실재하는 사실(Realien)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강제합니다. 둘째, 현실은, 역사적으로 되어진 것으로서, 지적 활동의 성과로, 특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는 전공학과의 연구결과(Erkenntnisse)로 매개된 것으로서 역시 모든 철학에 선행되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전제는 마르크스로 하여금 현실로서의 정치경제학을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거쳐서 서술하게 강제했습니다. 이 자리는 철학과 경제학의 관계를 토론할 자리는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적용한 방법의 모범성에 주목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연구]진행방법의 모범성은 그가 철학을 그렇게 진행함으로써 앞으로 있을 모든 철학으로 하여금 전공학과에 빌어 붙어 [연구하게] 한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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