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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4

II.

 

루카치가 레닌에 기대어 상술했듯이, 계급의식은 경험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는 사변적인 성찰은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짜임/구성Verfassung에 대한 부족한 성찰이었다. 이런 부족한 성찰은 레닌주의적 의미에 묻혀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서 메트로폴리스에 적합하지 않은 계급의식의 단순화/환원을 야기한다. 첫 단계에서 자발적으로/즉흥적으로 [나타나고] 정신분석학적인 틀[언어]와 개별자로 제한된 해방논쟁의 침체는 대중의 가능한 욕구구조로의 접근과 전략적으로 실천적인 인식들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첫 단계에 있어서 반(反)권위주의적 운동을 두드러지게 하는 사변적인 총체성의식은 역사맹아적인 추상적인 계기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반면 실천적으로 일하는 많은 그룹들의 직접성이데올로기가 그 의식상 역사적인 [투쟁, 운동 등등] 현상형식들을 결합하지 않은 소실(消失)[점]에 안주하고 경험적인 실천들의 다양성을 정치적인 실천이란 계급의식적인 통일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차원에 대한 성찰은, 아직도 종종 그러듯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어렴풋한 당사자 개입에 머무는 나쁜 의미로 윤리화하는 당사자개입토론들보다Verbindlichkeitsdiskussion 훨씬 더 조직적인 정체성 기준들을 매개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인 운동에 대한 이론적인 해석은 부분적으로 루카치가 부르주아 역사학을 비판하면서 말한 경험적인 역사주의의 요소/계기에 붙들려 있다. “그들의 오류는 그들이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개별자(그것이 한 인간이든지, 계급이든지, 또는 인민이든지 간에)와 그의 경험적으로 주어진/확인되는 (그러니까 심리학적인 또는 대중심리학적인) 의식 안에서 그 구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사념하는데 있다. 그들이 가장 구체적인 것을 찾았다고 믿는 곳 바로 거기가 그것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다. ... 그들은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완전히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루카치, 역사와 계급, 61쪽).


그러나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계”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인 가능성의 카테고리와 이와 함께 계급의식의 논리적인 형성Bildung이 굳혀진다는konstituieren 루카치의 인식 자체가 이미 이상화하는 추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조직문제뿐만 아니라 계급의식 다루기 역시 개별 프롤레타리아들의 경험적인 심리적인 의식 안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는 총체성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단지 사후적으로 총체성을 참조/전유한다는 중앙위원회의 결정들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투쟁경험, 이론들의 형성, 선전선동활동 등을 통해서 총체성카테고리들이 현실적으로 개별 프롤레타리아의 머리 안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가는지 어둠에 묻혀있다. 올바른 계급의식은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올바른 정당이란 형태로, 즉 모든 역사적인 형태규정성들로부터 초월적으로 들어 올려진 레닌주의적인 정당유형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총체성이란 카테고리는 헤겔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도, 경험적일뿐만 아니라 비경험적인 요소/계기에 [활짝] 열려있다. 상품이 마르크스에 따르면 감각적-초감각적 사물인 것처럼 그렇다. 총체성카테고리에서 경험을 제거함으로써 계급의식의 역사적인 생성에 대한 성찰이 잘려나갔다. 루카치의 경험개념 자체가 이미 과학주의적으로 단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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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3

자본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의 개념을 확장하고, 전개되지 않은 [시원]원리에서부터 이미 쭉 그랬던 [노동]개념의 총체성을 [이제] 분업적인 총체성이라는 현상으로 드러내 준다. “자연시스템에서 머리와 손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노동과정이 머리노동과 손노동을 통합한다. 이 둘은 나중에 갈라서고 상호 적대적인 대립까지 간다. [이제] 생산물은 전반적으로 개별적인 생산자의 직접적인 생산물에서 사회적인 생산물로, 총노동자의 공동생산물로, 즉 노동대상의 손질하기에서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디마디로 분절되고, 그때그때의 계기를 이루는] 일원들로 결합된 노동[총]인원의 공동생산물로 전화된다. 때문에 노동과정의 협동적인 성격 자체와 함께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노동과 그 기체(基體)Träger[휘포케이메논]의, 즉 생산적인 노동자의 개념이 확장된다. 생산적으로 노동하기 위해서 이젠 더 이상 스스로[직접] 손을 놀릴 필요가 없다. 총노동자의 기관으로, 즉 총노동자의 하위기능 중 그 어떠한 하나를 집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본론 1권, 537쪽)


 - 체계적으로 19세기 말부터 추진되었던 - 과학의 고정자본적인 기계시스템 안으로의 기술적인 전환과 자동화 경향은 마르크스가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이라고 표현했던 것에 변화를 가져왔다. 실질적인 종속이 단지 형식적인 종속과 다른 점은, 실질적 종속은 노동, 분업, 그리고 과학의 사회적 생산력들의 체계적인 적용을 통해서 직접적인 노동과정의 테크놀로지적인 구조까지 질적으로 변화시킨다는데 있다. 인간들과 자연간의 물질대사로서의 노동과정이 말하자면 그 내부 자체에서 사회화된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가장 두드러지는 성질 하나는 “사회적 발전의 일반적인 생산물인 과학을 직접적인 생산과정에” 의식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50쪽,  프랑크푸르트 1969).


 마르크스가『그룬트리쎄』에서 상술하고 있는 것처럼, 개별적인 노동능력/역능이 점점 더 순간화.계기화되고 노동시간의 가치척도가 고정자본과 사실적인 생산과정의 현실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극적인 모순에 들어서는 가운데, 사회적 결합/결사는 생산의 과학화와 함께 생산을 점점 더 총노동자로 총체화한다. 기술과 과학의 전개는 [현재] 시스템을 폭발시키는 정도까지 생산적으로 이행된 상태에 이르렀다.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에 의한 생산적인 노동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그의[=새로운 사회화의 질의] 자본주의적 강제의 양식으로의 대상화를 더 이상 관용할 수 없게 한다. 독점자본과 자동화의 관계는 또한 계급이론적으로도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의 중대한 변화의 본질은 이룬다. „노동의 자본아래로의 실질적 종속 또는 특수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더 이상] 개별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점점 더 사회적으로 결합된 노동능력/역능이 총노동과정의 실질적인 기능자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경쟁하면서 총생산적인 기계를 형성하는 다양한 노동역능/능력들이 매우 다양한 다른 방식으로 상품의 - 혹은 여기에 더 적합하게 말하자면 생산물형성의 - 직접적인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자는 손을 더 많이 써서, 저자는 머리로 더 많이 써서 노동하고, 이자는 매니저, 엔지니어, 기술학자 등으로, 저자는 감독자overlooker로, 제3자는 직접적인 노동자로 혹은 심지어 단지 [기구/도구를 받쳐 들고 있다고 지시에 따라 건네주는] 보조자Handlanger로 노동하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노동능력/역능의 기능들이 생산적인 노동의 직접적인 개념 아래로, 그리고 그 기체들이 생산적인 노동자의, 즉 직접적으로 자본에 의해서 착취되고, 그리고 자본의 가치증식과 생산과정 전반에 종속되는 노동자의 개념 아래로 정렬된다.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재결과, 66쪽)1


과학들이 그것들의 기술적인 전환[가능성]에 따라서, 그리고 그런 과학의 기체, 즉 정신노동자들이 생산적인 총노동자 안으로의 통합이 완성되면, 그러면 사회혁명적인 전략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거의 배타적으로 산업프롤레타리아만을 참조하면 된다는 식의 가정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적인 지성이 전통적인 의미로서의  산업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어떻게 직접적인 생산자의 개념이, 그리고 이와 함께 노동하는 계급의 개념이 전반적으로 변화되었는가에 있다.


진척되는 자본 및 생산적인 노동의 사회화와 생산의 테크놀로지적인 과학화와 함께 직접적인 산업프롤레타리아 역시 점점 더 총노동과정의 요소/계기가 된다. [한편] 산업프롤레타리아는 그 어는 때보다 덜 생산적인 노동의 총체성을 대표한다. [다른 한편]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극적인 첨예화에도 불구하고 정신노동이 더 이상 [자신을] 단지 [숭고하게] 드높은 것으로 하는 추상노동의 반영(反影)으로, 그리고 이와 함께 부르주아적인 문화전유와 과학프로세스의 소시민적인 조직형식들의 대표/재현으로 다루어질 없고, 오히려 조직된, 그리고 집단적인 형식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의식의 형성과 정치적인 계급 조직의 형성에 있어서 [거짓이 아닌, 후기자본주의에 터전에서 생성된 자연적인] 순수한 형성요소/계기가 된다.  


계급투쟁에서의 과학적인 지성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정신노동] 개별자의 계급배신(대개 루카치의 계급투쟁에서의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의 규정을 참조하면서)이라는 전통적인 이론들에, 조직된 생산적인 과학적인 지성 없이는 부르주아 사회 전반에 관련된 계급의식의 형성이 산업프롤레타리아 안에서도 역시[=단지 과학적 지성 안에서만은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로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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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rx zufolge ist das „Wachsen der scientific power ... das Maß, worin sie schon als capital fixe gesetzt ist, der Umfang, die Breite, worin sie realisiert ist und sich der Totalität der Produktion bemächtigt hat", eines jener exklusiven Widerspruchsmomente am naturgeschichtlichen Ende der gewaltsamen Krisengeschichte des Kapitals, „worin im advice gegeben wird, to be gone and to give room to a higher state of social production" (Rohentwurf, S.636)텍스트로 돌아가기

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2

I.  
경쟁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의 과도(過渡)는, 마르크스와 엥엘스에 의해서 [이미]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암시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터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사회화로, 그리고 임노동의 터전에서 생산적인 노동의 사회화로 이어진다. 마르크스와 엥엘스에 의해서 암시된 자본관계의 가능한 역사적인 종착점들은 - 말하자면 독점적인 사적소유의 사회적인 전형으로서 - 주주사회적인aktiengesellschaftlich 기업형식들이며 과학들의 고정자본화된 기계시스템 안으로의 기술적인 전환이다. (자본론 3권, 27장, 기초구상 [그룬트리쎄] 584쪽 이하 참조).


이러한 자본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한편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자본을 역사적으로 생성했던 첫 위기, 즉 원시적 축적으로 확립된 사회화와 사적소유간의, 사회적 노동과 사적노동간의 모순에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모순이 어떻게 사회주의적 생산형식에 속하는 직접생산자의 가능한 자유로운 연합으로의 과도를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드러내주고 있는지에, 아니면 그 모순이, 엥엘스와 그의 뒤를 이어 호르크하이머가 상술했던 것처럼, 어떻게 권위주의적인 국가로의 전락을, 사회화의 파시스트적인 전도[로의 과도]를 [이룩된 생산수준의 문명을 제2의 자연으로 하는] 자연발생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에 있다.


마르크스는 주식회사들을 이렇게 서술한다. “즉자적으로 사회적인 생산양식에 기반하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사회적 집중을 전제하는 자본은 여기서 사적자본과 대립되는 직접적으로 사회자본(직접적으로 연합된 개별인들의 자본)의 형식을 취하고, 그리고 그 기업은 사기업에 대립하는 [주주]사회기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소유로서의 자본의 지양이다.”(자본론 3권, 452쪽)1. [중세공동체‘Eigenschaft'가 분산 공유하는] 소유권을 박탈하는 원시적인 축적의 과정에서 이미 확립된 자연법칙적인 자본의 집중화와 중앙화의 경향은, 사회적 노동과 사적 전유라는 자본의 역사적인 모순을 전개하는 이 경향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 독점자본과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즉자적인 사회적 성격이, 즉 사회화와 사적소유라는 모순이 현상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자본의 새로운 사회화의 질은 계급대립[관계]를 전반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미 주주사회적인 기업형식이 “현실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자본가를 단지 낯선 자본의 경영자, 지배인으로  전화하고, 자본소유자들을 단지 소유자들로, 단지 금전소유자들로 전화한다. (자본론 3권, 452쪽). 이러한 프로세스는, 그 진행의 도정에서 국가란 경제외적인 강제력이 다시 직접적인 경제적인 역량을 획득하고 국가개입주의가 항시적 필연성이 되는 프로세스는, 부르주아/시민사회의 인륜이란 정당화이데올로기 보물창고Reich로서의, 상호 적대적인 개별자들의 자유로운 경쟁으로서의, 상호 같은 권리를 갖고gleichgültig 상호 같은 권리를 주장하는gleichgeltend 상품소유자들의 공평한 등가교환으로서의 순환영역을 파괴한다. 자본가들의 계급의식은 자기들의 권위주의적인 기술관료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를 바라보면서 도구적 이성을 [정치적 관점에 입각하여 사용하는] 정치화한다. 지배[정치]가 정당화외의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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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pital III S.452, - Den Zusammenhang von aktiengesellschaftlicher Unternehmensform Monopol und Staatsintervention weist Marx an anderer Stelle auf: "Es ist dies die Aufhebung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innerhalb der kapitalistischen Produktionsweise selbst und daher ein sich selbst aufhebender Widerspruch. der prima facie als bloßer Übergangspunkt einer neuen Produktionsform sich darstellt. Als solcher Widerspruch stellt er sich dann auch in der Erscheinung dar. Er stellt in gewissen Sphären das Monopol her und fordert daher die Staatseinmischung heraus.Er reproduziert eine neue Finanzaristokratie eine neue Sorte Parasiten in in Gestalt von Projektemachern, Gründern und bloß nominellen Direktoren; ein ganzes System von Schwindels und Betrugs mit bezug auf Gründungen, Aktienausgaben und Aktienhandel. Es ist Privarprodukfion ohne die Konlrolle des Privateigentums" (Kapilal III. S. 454). Zum Zusammenhang von Monopolkapital und autoritärem Staat Vgl. M.Horkheimer, Autoritärer Staat und Engels: Die Entwicklung desSozialismus von der Utopie zur Wissenschaft, MEW Bd. 19, S.222 (Den Zusammenhang von aktiengesellschaflicher Unternehmungsform, Monopol und Staatsintervention, weist Marx an anderer Stelle auf: vergl. MEW 19, S. 322). 텍스트로 돌아가기

번역: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 1

68 학생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아래 글을 번역.소개한다. 1969년 „Sozialistische Korrespondenz-Info", 25호에 게재된 글이다. 이 글에서 아도르노의 수제자임과 동시에 아도르노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크랄은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SDS)의 레닌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어떻게 매개될 수 있을까 성찰한다.

시사성이 있는 글이라는 생각에 번역해 본다. 크랄은 1970년 교통사고로 2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원문보기)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테제

(Thesen zum allgemeinen Verhältnis von wissenschaftlicher Intelligenz und proletarischem Klassenbewußtsein)  

서독의 혁명적인 운동은 그 反권위주의적인 활동역사의 정치적인 진행형태와 과학적 사회주의의 비판전통에 속한다는 이론적 자기규정 때문에 혁명 이론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문제를 앞두고 있다.


1. 어떻게 하면 후기자본주의 산업중심지메트로폴리스들에서의 억압상황에 적합하고 反권위주의적인 의식이란 매체 안에서 확립된, 역사적으로 새로운 해방이성원리들을 전승된 역사적인 계급투쟁의 실체와 - 구태의연하게 오직 물질적인 궁핍, 물리적인 억압, 그리고 성공적인 10월 혁명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불투명한 혁명적 상황의 [도래에만 주목하는] 전통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 매개할 수 있을까?

2. 어떻게 하면 계급의식 개념을, 착취되는 대중의 욕구에서 빗나가지 않으면서, 다시 말해서 계급의식의 문제를, 그 형성이 이미 완성되었고 당으로 실체화되었다는 식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전제하거나 또는 그것을 경험적-심리적 의식으로 단축하지 않고 역사적인 생성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경험적인 카테고리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취적인 생산의 사회적 총체의 현존하는 카테고리로 재구성할 수 있을까?

3. 어떻게 하면 과학적인 지성의 소시민적인 반권위주의적인 해방의식의 쇠퇴형식들을, 총체적으로 추상적인 노동에 대한 이데올로기비판적인 통찰의 몰락을, 그리고 정치적인 실천의 흩어짐을 - 역사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과학의 질을 무시하지 않고 동시에 계급투쟁에서의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에 대한 노동[자]운동 안에서 전승된 해석을 아무런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 혁명 이론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중심지에서의 사회혁명적인 과정의 올바른 전략 선택과 혁명 이론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현재 사회주의적인 운동권에서 이야기되는 "과학적 지성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주제아래 있는 이 세 가지 질문은, 이론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예외 없이 전통주의적으로 단축된, 국가개입으로 인해서 완고해진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제2의 자연뿐만 아니라 중심지에서의 노동하는 대중의 변화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물화된 의식과 빈곤해진 삶의 소외된 노동이란 차원에서 빗나가는 제안들로 대답된다. 이에 관한 토론은 부분적으로 탈역사화된 10월 혁명과 레닌식의 간부 중심 정당의 관념세계 안에서 배회하고 있으며, 이런 관념은 기계주의적인 조직모델을 종용하고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사회혁명적인 매개를 사보타주하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헌신기준Leistungsstandards을 전제하는 간부, 절대적인 집중화, 철통같은 규율에 대한 완고한 관념은 생산력의, 사회적 부의, 그리고 도구화된 문화의 고도로 문명화된 발전수준을 통찰하지 못하고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에 상응하는 자발성/즉흥성을 퇴보하게 만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있는 것’으로 하여 존재론적으로 다루고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SDS)’을 외적으로, 그리고 경향적으로 계급적대적인 두개의 운동들 간의, 즉 노동자운동과 학생운동간의 돌쩌귀로 물화하는 기계주의적인 제안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그룹들의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사회적 현실에 더 이상 상응하지 않는, 상품을 생산하는 소시민 개념에 근본적으로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과 임노동간의 기본모순”을 동일철학적으로 모든 역사적 변화로부터 떼어내 [역사와] 딴 것으로 하고 자본주의적 사회를 기본-, 주요-, 부차모순이라는 스콜라적 질서로 물화함으로써 총체성으로서의 사회에 관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노동에 종속되어 있는 대중의 해방욕구와도 관계를 끊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독점자본의 생산적인 노동의 확대에 의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상황의 구조변화뿐만 아니라 계급의식의 카테고리적인 구조의 변화를, 나아가 마찬가지로 정신노동의 구조변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래 세 가지 논거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논거들은, 직접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중심지의 사회혁명적인 전략형성에 영향을 줘야 하는 논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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