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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어


<코어>

 

맨틀이 멈춰서 지구에 멸망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설정의 '소재'만 참신하고 다른건 다 식상하다. 따분한 캐릭터들은 방황하다가 죽는다. 전형적인 헐리우드 영화의 설정이랄까? 쉽게 말해서, 누구와 누구는 사랑에 빠질 것이고, 누구는 죽을 것이고, 누구는 스스로 희생할 것인지 캐릭터가 영화에 등장하자마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분들이 이 영화를 보길 권한다. 자신의 할리우드 영화 전형에 대한 파악의 정도를 가늠하고싶은 분이거나 정말 할일없고 영화를 많이 봐서 볼 영화없는데 별 생각없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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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유희프로젝트퍼즐


 

<두뇌유희프로젝트 퍼즐>

 

니들을 모은건 '작위', 조종하는 자 x는 연기지도 못하는 감독님..

두뇌가 전혀 '유희'를 느끼지 못했다. 문성근 연기 정말 못한다. 홍석천도 너무 오바한다. 대사에 욕이 너무 많다. 오히려 욕이 너무 많아서 악당들의 끕을 떨어뜨린다고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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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거꾸로 솟는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연합뉴스와 온갖 잡탕 인터넷언론, 보수언론들의 '교통대란' 개수작 논리가 인터넷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 속이 뒤집어져서 그딴 기사 읽기도 싫고, 수준떨어지는('이라고 생각하고말기 쉬운') 네이버 댓글 악플러들 욕설들을 보기도 싫지만. 그러나 너무 답답하다. 기껏 만들어놓은 한미FTA 반대 여론을 우습게 내주는것 같아서 뭔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만든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막상 생각이 안난다. 아니, 생각하기 싫은 걸지도... 너무 답답하니까! 다른 동지들도 다들 그런 기분일것 같다. 이럴땐 좌파 블로그가 이곳에 갇혀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학교 안에서 논쟁이 한창이며 운동권들이 막 욕먹을때, 활동가들 모두 운동권 동아리방 안에 쳐 모여있는 기분이랄까?-_-;;; 물론 그랬던 적은 없다. 강의실에 가서, 교문앞에 가서 리플렛을 뿌리고 발언을 했었드랬지. 그치만 난 지금 너무 무력하다. 앞으로 열흘간은 더 아침일찍 도서관 열람실에 가서 하루종일 앉아있어야하는 나의 모습...

 

아휴, 기분이 대략 안좋다. 문제는 인터넷 여론을 장악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 개 네이버, 쿠키뉴스, 연합뉴스...를 이겨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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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부스

<폰 부스>(Phone booth, 2002)

 

2003년 여름인가? 신촌 어느 극장에서 봤었고, 작년에 또 한번 봤고, 지난주에 tv에서 세번째 본 영화. 그러나, 2003년엔 그냥 스릴넘치고 재밌다고 생각했고, 작년엔 좀 꺼림찍하다고 생각했고, 얼마전엔 경악했다.

콜린 파렐과 포레스트 휘테커가 나온다.

 

분명 이 영화는 단순한 스릴러영화가 아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콜린 파렐의 연기는 볼만하지만, 그를 폰부스 안에 가두어놓고 얼굴 한번 보이지 않고 오직, '전화통화'만으로 콜린 파렐을 협박하는 숨은 조종자는 단순한 미치광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는 "착하게, 도덕적으로, 거짓말하지말고!" 살라며 관객을 우롱하고 협박하듯 끝난다. 기분 드러웠다. 마치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자신만의 도덕률을 세계 민중에게 강요하는 미국과 같다고 할까?

 

결말은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 영화인지, 아니면 영화의 경계를 넘어선 '경찰'을 자처하는 영화인지 잘 보여준다.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살인자는 죽지 않으며, 히스패닉계 이민자로 보이는 무고한 피자배달부와 클럽 문지기만이 잔인하게 살해되었을 뿐이다. 물론 주인공인 콜린 파렐은 죽지 않았지만, 그는 흐릿해져가는 뿌연 시선 속에 쓴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는 착하게 살라"는 살인자의 실루엣을 본다. 공포 영화가 아닌데도 너무 실감나게 느껴지는 그 살떨리는 공포...

 

영화는 '도덕'하나로 전화통화 저격수의 모든 살인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결말을 만든다. 9.11테러로 인해 개봉이 연기되다가 개봉한 영화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무섭게 '영화로' 관찰자이자 조종자의 말을 듣지 않는 우리들에게 협박할줄이야... 아무리 콜린 파렐이 허세많고 거짓말 잘하는 양아치일 망정! 영화는 잡히지 않은 저격수에게 이 세상 누구든 '심판하고 총살할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영화가 시작될때, 저 우주 어딘가에 있는 인공위성에서 출발한 '그'의 시선, 그리고 마지막도 그곳으로 끝난다.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던가. 영화는 지금 이 시간을 파시즘과 감시의 시대로 표현한다.

 

거짓말하지마.

허세부리지마.

외도하지마.

도덕을 지켜.

그렇지 않으면 죽어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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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파티드

 

<디파티드>(The departed)

 

홍콩영화 <무간도>를 마틴 스콜시지 감독이 리메이크했다. 잭 니콜슨, 레오나도르 디카프리오, 맷 데이먼 등 초호화 출연진이 주연을 맡았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무간도>보다 잘 만든 리메이크작이다. 초점이 다르지만 는 인물묘사, 심리묘사가 보다 세밀하고 스토리도 나름 철학적이다. 리메이크작이지만 <무간도>로부터 넘겨받은것은 영화 스토리에서 경찰에 심어진 '마피아첩자'와 마피아에 심어진 '경찰첩자'의 이야기라는 시나리오의 단초뿐이다.

 

영화는 관계맺음의 문제를 파고든다. 관계맺음을 맺고 있는 누구든 거짓되지 않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후반부에 디카프리오에게 마음이 끌리는 멧 데이먼의 연인 '정신과 의사'조차 엉킨 관계맺음을 맺는데, 영화는 그것도 거짓되었다, 는 식이다. 정신과 의사가 가장 불안해 보인다.

 

욕망은 마치 운명과도 같아서, 이미 한번 내딛으면 돌이킬 수 없는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에 나오는 모두들 자기 스스로의 욕망으로부터 갈등을 겪고 고통스러워 한다. 영화의 묘사력때문에 쏙 빠져든 나머지 영화를 보는 나조차도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야, 저 포스터를 보라. 포스터만 보아도 불안하다! 저 극도로 긴장된 표정들... 마치 복잡하고 거짓된 관계맺음 속에서 현대를 '살아내는' 도시인들 같다고 해야하나. 포스터 디자이너에게 경의를 표한다. 글자 안에 갇힌 셋의 표정을 절묘하게 잡아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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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소년


 

도둑소년 / The Little Thief

 

부산국제영화제, 35분짜리 단편영화.

욕망하는 것조차, 꿈꾸는 것조차, 안정적인 삶, 부모님이 있는 삶을 바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가난하며, 쇼킹한 방식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소년의 이야기.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고, 가슴이 쓰렸다. 영화음악도 아주 어울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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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영화

 

졸업 영화 / Portfolio


이것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한국 단편영화. 영화보면서 대체 뭔 소리? 라는 생각이 막 드는 영화였다. 영화에 경계가 없고, 결론도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인가? 아니면 그냥 장난? 리차드 막스(Marx)로 농담한건 좀 심하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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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트렁크를 열어보니

어느 날 트렁크를 열어보니... / One Day, Inside the Trunk...

Korea  2005  18min  35mm  COLOR

 

지난 달에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때, 본 단편영화 중 하나.

아직 진실이 보이는 '내'가 세상을 만나며, 사람들을 만나며 혼란과 고통을 겪는 과정을 특이한 스토리로 보여준다. 차 트렁크 안의 시체들이 나는 분명히도 보이는데, 내 친구도 옛 연인도 교수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실을 파헤치려 할수록 주인공은 고통스러워 한다.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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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access 운동

사실 public access 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 그냥 왠지 따분해보여서 관심없었는데, 내용을 듣고보니, 바로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운동이 바로 이 운동이 아니었나 싶다. 예컨대 내 생각은, 투쟁 동영상이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아무리 생산되어도 '운동권들'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우린 어떻게 대중들에게 진실을 알려나가야 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샌가 우린 매체라는걸 갖고 만들고, 또 이렇게 jinbo.net같은 훌륭한 싸이트도 있지만, 그리고 수많은 투쟁들을 동영상에 담아왔지만, (물론 난 못했고, 그걸 찍는 분들이 하셨다.) 우리가 정작 알리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대한 접근권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은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럼 어떻게 접근권을 확대시킬 것인가.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만들것인가. 잘은 모르지만, public access운동이 바로 이런걸 추구하고 쟁취하기 위해 싸워가는 운동인 것 같다. 아직은 '요구하고', '제안하는' 운동의 한계에 머물러있지만, 다양한 상상력을 필요로하며, 또 그 상상력만큼 성장할 수 있는 운동이 바로 이 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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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채널] - 쐐기들의 운동
 


꿈돌이 ( '닫힌채널' )

  
(1) ‘닫힌채널'을 아세요?  - 이 사람들 재미있게 삽니다.


인터넷 카페 ‘닫힌채널'(http://cafe.naver.com/shutchannel.cafe)의 활동이 이제 석 달째 되어갑니다.

‘닫힌채널'이 뭐냐구요?

영상미디어를 통해, 자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순전한 마음으로 발언을 하고자  KBS의 ‘열린채널'에 액세스를 시도하던 시민제작자들과 이의 문제점들을 진작부터 알고 그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해오던 미디어 활동가들이, 더욱 더 완고한 고집쟁이처럼 되어가는 KBS와 방송위 등 관계기관들의 횡포와 무관심에 상처받고, 열받고, 스트레스 받으며 ‘그럼 그걸 바꿀 방안을 마련해보자!' 며 꾸린 모임입니다.

이 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이용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보통 2주에 한번 씩은 ‘얼굴보는 만남'을 갖는데, 이 때, 여러 가지 수다를 떨면서 생각과 마음과 영혼의 진동폭을 넓혀갑니다. 7월에 문을 연 이 카페의 가입자는 9월 말 현재 1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들은 2006년 8월, 열린채널에 참여했던 시민 제작자를 대상으로 심층적인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이에 대해 37명이 의견을 보내주었습니다. 설문의 결과 분석에 대해선 보다 전문적인 분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여기서는 기억나는 한 가지 질문의 결과를 이야기하겠습니다.  11번째 문항은 ‘KBS 시청자 지원센터가 지원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였는데, 이 질문에는 31명이 답을 주었습니다.  답변자 중 7명은 ‘잘못하고 있다',  15명은 ‘매우 잘못하고 있다', 9명이 ‘그저 그렇다'고 대답하였고, ‘잘하고 있다' 거나 ‘매우 잘하고 있다'라고  대답한 제작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닫힌채널 사람들은 ‘아! 상처받은 게 나만이 아니로구나. 답변자 전원이  KBS의 열린채널의 지원이란 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고 있구나 !'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KBS 시청자서비스팀에 직간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있으며, 최근 새로 구성된 제 17기 KBS 시청자 위원회 (현행 방송법에 따르면, 이 곳이 열린채널의 책임 운영주체라는 것을 다들 아시죠?) 위원들에게 ‘열린채널'의 파행적 운영상태를 적극적으로 알리는가 하면, 열린채널의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모아서, [분노의 확성기 -방방곡곡]이란 제목의 오프라인 전국순회상영회를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2) KBS가 정말 ‘열린채널을 알기나 하는 것인가요?'

 

저는 올 8-9월에, 시청자 참여프로그램 운영협의회의 대표중의 한사람으로써 KBS 시청자 써비스팀장과 면담의 자리를 갖기도 하고, 국회의원실이 마련한 토론회에서 토론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시청자 KBS써비스 팀장은 너무도 당당하게 충격적인 발언들을 쏟아었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발언들의 요지를 적어보자면


‘시청자들은 아마추어들이고 KBS는 프로들의 집단이다. '
‘이제 열린채널에 참여하는 시청자들도 경쟁을 해야한다 '
‘KBS 입장에서는 [열린채널]이 다른 외주제작 프로그램과 다를 게 없다!'
‘ KBS(의 편성권은) 본래 시청자를 대표하여 전문가들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는 '다수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열린채널]은 소수자를 위하여 징발당한 것이다.'
‘왜 용돈달라는 아이들처럼 떼쓰느냐? 뭔가 문제가 있으면 방송위에 가서 하라. '
‘왜 편성시간도 적은데다가 사람들도 몰리는데 KBS 와서 액세스를 하느냐? 다른 채널에 방영신청을 해라'


등입니다. 이와 같은 발언들에 대해 시민제작자들이 반론을 하려하자, 그는 더 이상의 견해 표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말들이 두렵냐구요? 아닙니다. 그냥, 참 막막해집니다. 두려움은 시간이 지나서 정신을 자리게 될 때 스멀스멀 다가옵니다. 그래도 ‘시청자들의 액세스권'에 대해 가장 고민을 많이 하여야 할 위치라고 추정되는 ‘KBS 시청자써비스 팀장' 이란 분의 생각이 그 정도라면  KBS라는 독점적 미디어기업의 ‘퍼블릭 액세스'에 대한 인식이 어떠할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지요. 무리한 바램이겠지만, 이와 같은 발언이 ‘실무자의 독특한 개인적 생각의 표현이기를 바랍니다.
 


(3) KBS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생각을 좀더 들여다봅시다.
 


1) ‘시청자들의 참여 의지에 비해 편성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여 퍼블릭액세스 권리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 는 주장에 대한 태도

시민제작자들은, ‘시민의 액세스는 늘어가는데, 소통의 창구는 극도로 작다. 2000년 당시의 시민사회단체의 원안대로 주 60분 편성이 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신청제작물의 1/4 만 선정되고 방영을 할 수 있다.  매달 10편-20편의 제작물들이 4편에 못 들었다는 이유로 불선정 통보를 받아야한다. 이는 심사의 형평성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어떤 제작물이, 중요하며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지라도 협소한 편성시간 때문에 불선정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퍼블릭액세스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KBS담당자는 퇴행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이들은 ‘신청하는 제작물이 많아 골치가 아프다. 시민들도 프로들처럼 경쟁을 해야한다. 아무리 많은 제작물들이 편성신청을 하더라도 월 4편만 선정하는 게 답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는 다양한 환경과 가치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상업적으로 활동하는 프러덕션들처럼 경쟁을 하여, 거기에서 승리한 자에게만 발언권을 주겠다'는 발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미디어 독점구조 속에서 그동안 부정당하거나 무시당했던 소수자들에게 자기표현 기회를 공공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마련된 퍼블릭액세스의 취지를 훼손하는 말입니다.

결국 ‘1등부터 4등까지의 의견을 뺀 나머지의 의견은 문제의식이나 사회.문화적 함의와는 상관없이 무시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2) ‘시민'이 ‘KBS를 보호하는 괴상한 이행보증보험제도

[현재의 보증보험제도]는 ‘KBS에 발생할지도 모를 손해'를 대비해서 액세스를 하려는 제작자가 대신 보험을 들어주는 식입니다.  KBS는 ‘그 보험료는 나중에 ‘방송위'로부터 보전받는다‘ 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KBS는  열린채널 운영지침 15조에 ‘ ④ 제2항과 제3항의 이행(지급)보증보험 가입시의 보험료는 제작지원금 지급시 포함하여 지원할 수 있다. ' 라고  애매하게 규정하여, 이 문제에 대한 비난을 피하려는 유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이 규정에 의하면,  방송위는 이를 지급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식인 겁니다. 결국 ‘보험료를 누가 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답이 없는 상태인데,  시청자제작자는 무조건 이를 내고 있는 셈입니다.

‘KBS를 위한 보험료를 시청자 제작자가 내야하는 것' 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험의 수혜자는 ‘KBS'이지 '시민제작자 자신‘이 아닙니다.

설문에 응답한 제작자 중 96% 가 ‘이 보험료는 KBS 나, 방송위가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KBS 실무자들은 ‘제작지원금 속에 보험료가 (당연히) 책정되어있는 것이다! ' 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정말 상식적인 방식은, ‘KBS가 자신의 비용으로, 혹은 방송발전기금의 일부를 가지고 직접 보험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작지원금' 속에 ‘KBS 위한 보증보험료 가 산입' 되어 있다는 KBS측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청자들에게 KBS를 위한 보험료를 내도록 심부름을 시킬 것이 아니라, 직접 방송위로부터 그 비용을 받아 스스로 보험을 드는 것이 맞는 일 아니겠습니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현재의 보증보험제도가 KBS를 위한 제도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실무자의 강압에 못이겨 울며겨자먹기식으로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반정도의 제작자들은 이 보험이 자신을 위한 보호장치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KBS측의 권위주의적인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일단은 생략하겠습니다. 
 


(4) ‘[닫힌채널]과 같은 활동으로, 철옹성 KBS의 독선적 운영으로부터, [열린채널]을 구출할 수 있을까 ?' 하고 생각하는 분들께 
  
영어 관용표현 중에, ‘더 엣지 오브 더 웻지 (The Edge of the Wedge)' 라는 표현이 있답니다.
발음이 재미있으니 관용표현이 되었겠지요. (아마, 잘은 모르지만 제가 모르는 언어들 중에도, 그와 유사한 표현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이 말을 직역하자면, '쐐기의 끝' 정도가 되겠는데요. 과거에 석공들이 거대한 바위를 쪼갤 때, 나무 쐐기를 사용했답니다. 나무토막으로 바위를 쪼갠다니 말이 안 된다구요? 말이 됩니다.

석공들은 떼어낼 자리에 금을 긋고 작은 구멍을 정으로 쪼아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그 작은 구멍들에 나무로 만든 쐐기를 박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무토막(쐐기)에 날마다 조금씩 물을 주는거죠. 그러면 나무는 세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물을 머금어 팽창을 합니다. 그렇게 몇 날 몇 밤, 혹은 몇 개월 동안, 나무쐐기들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합니다. 석공들은 기다립니다. 중간에 비바람에 쓸려나가거나 햇볕에 말라 부스러져버리는 쐐기들도 있을겁니다. 그러면 또 다른 쐐기를 갖다 박고, 때때로 물을 줍니다.
... 눈에 띄지는 않지만, 쐐기들의 미세한 숨쉬기 운동은, 완고한 바위조직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던 어느날 , 바위는 예고없이, 쩍 ~ 하며 쪼개집니다.

열린채널 도입 육년째, 지난달, 국회의 토론회에서, 방송위와 KBS시청자 지원팀 실무자들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으면서 ' 앗! 그들은 거대한 바위로구나 ! 우리의 열린채널(자수정)이 그 단단한 바위 속에 갖혀있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린채널이 숨이 막힐만하구나 ! 그렇다면 어떻게 그 단단한 바위로부터 떼어내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위를 완전히 쪼개는 것이 무모하다면, 또 그럴만한 연장도 힘도 없다면 무엇을 이용하여 열린채널을 구출하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쐐기'라는 관념이 제 머릿속을 떠돌았나 봅니다.
무모하게 파괴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소중한 것을 떼어내는데 사용되는 도구 !
조용히 숨쉬는 나무토막 !
쐐기!

 

닫힌채널은, 이제 생긴지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뭐 힘이 쎈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의 사람들은, 무모하게도,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에 갇혀 있는 자수정을 잘라내려 합니다.  그 걸 잘 다듬어, 우리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과 프리즘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평택 대추리에서 멀쩡한 집을 부수려고 국방부가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쇳덩이 기계들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끝이 뾰족한, 숨쉬는 작은 나무토막' , '쐐기'가 이런 때 필요합니다. 우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 연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기계팔과 쇳덩이 해머를 이용하여 무지막지하게 때려대거나 쪼아대는 크레인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구요.

 

우리는 그럼 무엇을 가지고 [열린채널] 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 작은 정! 숨쉬는 나무토막 ! 물 ! 그리고 기다림! ' - 이것으로 바위를 떼어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위에 박힌 쐐기의 끝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그 것이 무슨 힘을 가지고 바위를 쪼개느냐고 비웃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그 작은 나무의 끝은, 장차 벌어질 거대한 균열과 변화의 발단이 되는 것입니다.

 

쐐기의 끝 !
저는 [닫힌채널]에 참여하는 분들이 KBS와 방송위원회라는 거대한 바위에 박힌 작은 쐐기의 끄트머리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해머나 포클레인같이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간의 활동을 통하여, ‘바위를 깨는데, 쐐기들의 존재와 그들의 인내는 불가피' 하단 점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자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와! 신난다!' ‘우리가 물을 머금어 숨을 쉬고, 지치면 오그라들기도 하다가... 다시 물을 머금고... 다른 구멍에 또 다른 쐐기가 되고... 뭐 그런 일이 꾸준히 계속되면, 어느 순간 바위가 깨지는 거야!'
자! 이제, 쐐기중의 하나가 될 분들은 [닫힌채널]로 오세요. 그게 많아야, 바위가 쉽게 깨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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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책2권

오늘 마지막인 강좌가 시작하기 전에 교보문고에 가서 구입한 책 두 권. 요즘엔 참 다들 표지 디자인이 쌔끈하다. 표지 디자인에 끌리는 이 맘 어찌할꼬.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최세진

예전부터 사고 싶던 책인데 충동적으로 구입했다. 실은 전혀 살 생각이 없었는데 자꾸 그 코너를 지날때마다 눈에 밟히는 그 책을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이 든 것이다. 너무도 명쾌한 진실이 뇌리 깊게 박혀온다. 그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재밌는 책일 것 같다. 음? 근데 사고나서 보니 첨바왐바에 대한 챕터는 전에 노동자의 힘 기관지 읽다가 본 것 같은데? 에세이 모은건가?

 


<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중앙대 백승욱 교수가 낸 신간!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책 소개하는 지면(?)에 소개된 책이다. 보자마자 사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노동의 힘>, 그외 몇몇 브로델의 저서들을 통해 세계체계 이론에 대해 겉핥기 식으로 배웠는데, 이 책은 마치 학생운동 하는 아해들의 커리큘럼용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세미나 커리로 적합해보인다. 어찌 이리 철저한 시장 분석을 하고 책을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책을 냈는지.. 부제가 "세계체계 분석의 대가들을 통해 본 근대자본주의의 과거와 미래"인데 이 책에는 자본주의 체제, 헤게모니 이행의 역사에 대한 강의와 더불어, 앞으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성격을 띈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전망이 있는 것 같다. 민중의 대안으로 채워질 세계인가, 아니면 또다시 미 헤게모니에서 동아시아 헤게모니로 이행된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의 연속인가? 그런 내용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금방 읽을듯.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는 이제 학회커리계에서 사라져랏 ㅋㅋ

 


<지중해의 기억>, 페르낭 브로델

사고 싶다!!! 아마 14~16세기 지중해 중상주의에서의 자본주의적 성격들에 대해 서술한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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