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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어떡해

오도엽님의 [파업집회 하지 말고 진탕 술 먹자] 에 관련된 글.

자본가와 저 썩어빠진 국회의원들이 비정규 개악안 통과에 이어 노사관계로드맵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이 답답한 마음 어찌할꼬.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한지 오래인건가. 언제까지 패배해야하는걸까.

어제 하이퍼택 나다에서 본 <세번째 시선>의 한 투박한 단편영화가 생각난다.

홍기선 감독, 정진영 주연의 <나 어떡해>

 

대다수 하청노동자들은 그 막막한 삶 속에서 고작, "나 어떡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말말곤,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일상의 고통, 답답함, 막막함에의 공감을 투쟁의 동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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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하니까 덤으로,



♪ 한미FTA 공청회 코미디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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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거슬리는 뉴스

'사법고시 수석합격 학생회장 출신' 이라는 네이버, 다음 첫화면 뉴스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그 사람이 맘에 안든다는게 아니라, "학생회장 출신"이라는 저 찌라시들의 수선함과 조소섞인 수사가 맘에 안든다는 얘기.

 

3년차나 4년차가 되면 한 학번에 한 명 밖에 안남아서, 자기 단과대 운동의 명맥을 근근히 이으려 단과대학생회 학생회장 선거에 비장하게 출마해야'만'하는 학생운동 후배들에겐 그만큼 더 많은 짐이 쌓이고, 대중들에겐 또 그만큼 곡해와 오해가 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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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커시리(Mountain patrol)

 

<커커시리>(영어 제목, Mountain patrol)

 

어제 새벽 kbs1에서 본 영화. 장엄하고 차가운 중국 서부의 만년설 쌓인 산으로 둘러쌓인 사막, 커커시리를 배경으로 한다. 2년전 전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영화라는데 난 어제 처음보고 알았다. 황량하지만 티벳인(장족)들의 삶의 터전인 커커시리(몽골어; 아름다운 소녀)는 칭하이성 일대 해발고도 4000~5000미터의 고원지대에 위치해있다. 마치 아메리카 서부의 황량한 사막을 연상하지만, 그보다 더 잔혹하고 공허하며, 황량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차갑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장엄한 익스트림 롱샷과 클로즈샷의 교차 속에서 잔인하고 황량한 세상 속에서 인간의 무기력함을 무한대로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어디를가든 거대한 자연은 무한히 멀어져만가고, 끝없이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사막위의 모래늪, 사막위에 널린 티켓영양들의 무수한 시체들, 거친 밀렵꾼들의 표정들은 그 잔혹함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영화의 영어제목은 mountain patrol. 커커시리에서 밀렵꾼들에 맞서 티벳영양들의 멸종을 막고 밀렵꾼들을 몰아내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몇년째 황량한 벌판을 지키는 90년대말의 산악순찰대(mountain patrol)의 실화를 중국 베이징의 6세대 감독 루추안 감독이 영화화했다. 독립영화 감독인 그는 이 영화 하나로 세계적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모피 수요가 증가하고 티벳영양의 가죽이 귀하게 여겨지는 시절이 오면서 티벳일대에 100여만 마리나 있던 티벳영양들이 1만마리까지 줄어들어 멸종위기에 처하자, 장족 청년들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 순찰대를 자처했다. 그리고 2년동안 밀렵꾼들과의 쫓고 쫓기는 전쟁을 벌인다. 이 사실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지자 당시 티벳영양 모피에 대한 소비를 중단하자는 운동이 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의 한 켠, 그 드넓은 사막에서 총을 들고 싸운 이들에게 현실은 단지 처절할 뿐이다. 영화는 베이징에서 온 장족출신 신문기자의 시선으로, 조금 거리를 둔 체 그 생생한 현장을 기록해나간다.

 

자본주의적 욕망과 그것에 힘겹게 맞서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 지배계급의 자본주의적 욕망의 극단에 '모피 수요'가 있다면, 티벳인들에게 그것은 곧 삶을 건 치열한 전투를 의미했다. 그들은 티벳영양을 지키기 위해 싸웠지만 그것이 곧 영웅적인 삶을 의미하진 않았다. 생존을 위해 자신들이 수거한 티벳영양의 모피들을 되팔기도 했고,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봐야했다. 삶은 아름답지도, 명예롭지도 않다.

 

좌절

영화에서 장족인 산악순찰대는 모두 몰살당한다. 잔인하게. 그보다 더한 좌절이 있을까. 좌절과 절망 가득한 신문기자의 몸부림에서 멀어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리고 closing ments를 통해, 기자가 베이징에 돌아가 전세계인의 기억에 남는 기사를 쓰고나서, 티벳영양에 대한 밀렵은 중국 당국에 의해 중단되었다고 짧게 설명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중요한 걸까? 뿌듯하지만은 않았다.

 

기자, 영화, 흥행

한 기자가 있다. 장족출신이라지만, 그는 베이징의 신문기자이고, 도시인이며, 밀렵꾼들의 적도 아니었다. 영화에서 그는 단지 제3자. 그리고 그는 살아남아 어제 죽은 이들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을 담아 기사를 썼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는 다시 자본주의적 욕망들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어간 이들의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돌아갔을지도.

 

그리고 이 영화. 전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흥행을 기록했다고 한다. 그들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다시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티벳영양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마스코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제 2년후면 '성대한' 베이징 올림픽이 열릴 것이고, 티벳영양은 세계자본주의, 세계자본, 국가들의 대향연, 올림픽 마스크트로 더 많이, 전세계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커커시리는 중국의 땅일테고. 티벳 민중은 점점 잊혀져갈지도... 중국 역사의 다른 소수민족 민중들이 그러했듯이. 중국 당국은 소수민족, 소수민족문화를 손쉽게 집어삼키는 가장 유리한 방법을 너무 잘 알고있는 것 같다.

 

티벳의 황량한 사막에서 죽어간 장족인 산악순찰대원들이 올림픽 마스코트를 위해 싸운건 아닐텐데...

산악순찰대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고향 수호대였을텐데...

커커시리는 중국 당국에 의해 통제되는 보호구역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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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영화 흥행배우의 과잉액션?

EM님의 [진중권, 가벼움] 에 관련된 글.

 

진중권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위기'의 모든 혐의를 '이미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회운동의 탓'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억지로 그를 위한 수사어를 하나 만들어주자면, 진중권은 단지 '스타일지상주의자'이다.

 

그의 운동권 비판은 대게 "세계는 바야흐로 정보시대, image시대, 영상의 시대로 가고 있는데, 운동권들 왜 이렇게 후졌냐!" 그런 식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그의 강연회를 듣다가 별 다른 내용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중간에 나온 적이 있는데, 그가 지난 몇년간 했던 얘기들, 글들의 모든 내용을 짧게 추리면, 상기한 바와 같을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없다. 느끼기에, 그는 다원주의의 함의가 갖는 위험성을 무시하기도 하고, 근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오직 모스트모더니즘적 자세만으로 일관한다. 남한의 운동권들이 안타깝다며 그렇게 부르짖는 그의 이야기들마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시리즈물일 뿐이다. 현실 사회 비판에 정세와 역사, 변증법이 빠져있다면, 그건 그냥 그렇고그런 흔해빠진 세상만사 논평으로 그친다. 독설영화 흥행배우도 내용을 갖추어한다는 것을 모르나. 애써 찾은 그의 '영상시대, 정보시대'라는 장르가 '중심'을 빗겨가도 한참 빗겨간게 예전보다 한물간듯 보이는 주된 이유로 보인다.

 

두번째로 내가 진중권이 싫은 이유는 그는 자신의 글이나 발언에서 '내용'보다 '스타일'에 강조를 둔다는 점이다. 스타일이 과도하게 내용의 부실함을 앞서다보니 막상 건질 건 없는 것 같다. 그는 계속 자신의 보수세력 독설가로서의 자유주의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싶어하지만, 그런 스타일로 흥행을 타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는 것을 모를까.

 

그러나 "현대인이 text보다 영상에 익숙하다"는 그의 주장은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중 선전선동의 방법과 기술에 있어서 영상문화에 주목하고 연구, 실험할 필요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단지 '수단'이지만, 유명CF보다 세련되고 명쾌한 선전선동도 때론 중요할 수 있다. (그것을 모든 원인으로 환원하는 위험은 피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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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메타블로그서비스 이름제안 -풀

새로운 메타블로그서비스 이름제안 -풀

 

무조건 이름은 간단 명료할수록 좋습니다. 아니면 너무도 명확한 나머지 머리속에 쏙 들어오고, 쉽게 image로 연상될 수 있는 것이 딱 좋죠. 보통 학교에서 선거운동하면, 선본명을 정하잖아요. 경험상, 그런 이름들이 학우들 머리속에 쏙쏙 기억되고 그/녀들 입에 회자되고 그랬던것 같네요.

 

자, 동지들 '풀'어떻나요? 번지르르하고 세련된 이름보다 민중적인 이미지로. 거센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 수천만 '풀'(민중)이 되어 저항하자는거죠. 블로거 한명한명이 바로 '풀'입니다. 공감하기도 쉽고 말이죠. image 연상도 잘 됩니다. 너른 들판, 끝없는 들판 위 바람에 흔들리는 무수한 풀들~ 

 

이스크라, 진보, leftblog도 뭐 멋있지만, 인터넷으로 무차별 대중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면서 하나의 동질성으로 묶어내고 조직할 수 있기엔 '풀'이 가장 괜찮은거 같네요. 꼭 '블로그'라는 말이 들어가야하나요? 안그래도 되겠죠?ㅋ 자, 김수영 시인의 시 '풀'을 생각해보세요~


대충 몇개 주소로 도메인 검색해보니까 아래 등록가능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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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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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와 21세기

 

한달정도되었나, 도서관에 다닌다. 그러고보면 종로구는 잘만 찾아보면 참 공부하기 좋다. 국립도서관인지 시립도서관인지, 이 근처에 커다란 도서관이 2개나 있다. 그것도 경복궁 반경 1km안에. 검색해보니까 다른 지역엔 도서관이 거의 없던데, 종로구민이라서 참 좋다.

 

삼청동길 어귀, 옛 경기고등학교 터에 있는 정독도서관에가면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나고 건물 색깔도 한결같이 베이지색으로 덧칠된 게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예전엔 강당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식당 건물 입구엔 "참새가 들어오니 묻을 닫아주세요"라는 귀여운 멘트도 적혀있다. 참새가 들어오니 문을 닫아달라니 ㅋㅋ 문을 닫으시오, 라는 냉정한 지시어 대신 90년대의 낭만이 있는듯하다. 정독도서관은 정말 서울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이 살아있는 도서관임에 분명하다. 화장실은 좀 구질구질하지만 다른 시설은 썩 괜찮다. 인터넷을 맘껏할 수 있는 정보열람실, 어린이도서관, 온갖 잡지가 비치된 간행물실이 있는가 하면 할아부지들이 하루죙일 종복를 뒤지며 자신의 허구적 뿌리를 찾다가 '실망스런 표정으로' 돌아가는 족보열람실도 있다. 열람실에선 스팀 소리가 덜컹덜컹 나는데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중에 제일 스타일 안맞는 분들은 찌지지직~ 듣기 싫은 현광펜소릴내며 별로 효율적인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법전이나 부동산공인중계사 시험 참고서를 암기하는 할아버지들이다. 왠만하면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는다. 커플들도 좀 짱난다 ㅎㅎ 그리고 아무래도 정독도서관의 묘미는 언덕입구 앞에 삼청동 미술관들이랑 '라땡'과 '먹쉬돈나'가 있다는거! 먹쉬돈나 줄은 항상 길게 늘어져있다. 그래서 기다리는거 무지 싫어하는 나는,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 뭐가 그렇게 맛있길래..

 

몇일전부터는 정독도서관말고 종로도서관에 다닌다. 정독도서관이 20세기라면, 종로도서관은 21세기다. 중학교때 아주 가끔 시험공부하러올땐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는데 지금은 완전 최신식이다. 건물 리모델링도 새로하고 시설도 새로 다 바꿨나보다. 구비한 책도 많아서 볼만한 책이 참 많다. 매점도 깔끔하고, 정독도서관과 다르게 열람실도 전부 칸막이가 쳐있다. 덜컹대는 스팀소리도 안나고 ㅋ 학습 이상한 방식으로 하시는 아저씨들도 없다. 다들 쥐죽은 듯 조용하다. "저기,저기, 120번에 앉은 **고 오빠 디게 멋있지," 라면서 맨날 수다떠는 대마왕 여중딩들도 거의 없다. 다들 묵묵히 행시공부들에 열중하실뿐. 20세기와 21세기의 묘한 경계가 느껴진다. 예컨대 정독도서관은 열람실 입실할때 종이쪼가리를 받아서 들고가야되는데, 여긴 그런게 없고 인터넷을 써도 완전 pc방 스타일이라는거? 어이쿠,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14분 나와있다고 나오네.

 

오늘은 8시반에 왔다. 여기서 대충 개기다가 밤10시쯤되면 친구생일추카해주러 가야된다.

휴, 이제 딱 열흘만 있음 d-day다.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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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수없다면 혁명이아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최세진

 

교보문고에서 산 책. 몇일전에 정독도서관에서, 공부하다말고 읽었는데 재밌게 잘 읽었다. 후루룩, 한번에 다 읽었다. 특히 피카소에 대한 부분이랑 SF영화에 대한 부분이 재밌었다. 사회과학 SF영화를 내 인생에서 꼭 한번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로 점철된 자본주의 문명 미래의 노동자계급의 암울한 미래를 그린 영화에 대한 구상이 머리 속에 마구마구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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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춤추는 별을 그린 화가

토마스 다비트 저

랜덤하우스

 

가난, 외로움, 언제나 혼자였던 삶.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고흐도 몰랐고, 주위 사람들도 몰랐다. 아무도 그의 그림에 관심이 없었고, 팔리지도 않았다. 그냥 우울하게 좋아하는 그림만 그릴 뿐이었다. 그리곤 외로움, 고독, 쓸쓸함, 세상에 대한 원망을 견딜 수 없어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자살했다.

 

이 책은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과 그의 일생을 스케치하듯 서술하고 있다. 그의 삶에 대한 기록과 동생 테오와 친구인 고갱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보며 그림을 보니, 고흐의 그림과 슬픔 가득한 불행한 삶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수하지만 반드시 채워졌어야만 했을 것 같아 보이는, 무수한, 선명한 터치로 가득한 그림들. 그게 고흐의 인생이다. 외롭고 좌절뿐이지만 끊임없이 터치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총으로 죽였을지 모르지만 역자의 말대로 그것으로 자신의 예술의 영원함을 증명하려 한 것일지도. 한마디로 정말 미쳐서 귀를 자르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억울했던 것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덧붙이면, 위 책은 반 고흐의 모든 편지들과 그의 동생 테오로부터 온 편지들, 그 편지에서 설명하는 반 고흐의 그림들도 모두 실려있는 책이다.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아를, 반 고흐의 방),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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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웨스턴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C'Era Una Volta Il West, 1968)

 

로버트 드니로가 나오는 '긴'영화 를 만든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만든 서부영화. 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 무언가 좀 다른 분위기들을 연출한 영화다. 아,, <웨스턴>이 훨씬 먼저 만든건가? 어쨌든 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먼저 봤었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자전거도둑>에도 단역으로 출연했던 이탈리아인 감독이란 걸 알기 때문일까? 이탈리아영화의 사실주의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그냥 서부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서부영화'다. 왠지 19세기 서부에서 일어났을 것만 같은 아주 사실적인 묘사들이 이 3시간반짜리 영화 내내 꿈틀꿈틀 살아움직인다.

 

갈등은 한 가족의 몰살과 서부 사막에 놓이는 '철도'에서 시작된다. 가족은 사막에 펼쳐질 '서부로 가는' 기차길 중간에 역 하나 만들어서 우리가족 행복하게 살자는 가장의 꿈으로 부풀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반부에 프랭크 일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몰살당한다. (프랭크 일당은 자본가를 등에 업은 총잡이 일당이다.) 그리고 갈등의 핵심은 '철도 공사'인데 이것이 갈등의 근본임은 나중에야 알 수 있다. 영화 속에는 백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그러나 안타깝게도 중국인들은 '배경'으로만 나온다.) 인디언, 아일랜드인, 아프리카인 등 온갖 이주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서서히 나타나는 자본가와 자본주의, 자본주의와는 어색하지만 그 시대적 배경에 남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 서부의 총잡이들, 뉴올리언스에서 온 여성, 복수(서부영화의 전형적 이야기 고리)가 영화의 줄기들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자본주의'란, 어쨌든 영화의 주제가 대적하는 상대로 비춰진다. 자본가 모튼은 "새로운 서부에서 총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 말한다. 그러나 그는 총으로 뒈졌고, 철도와 함께 등장하는 서부의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항해 프랭크(헨리 폰다 분)와 샤이런, '찰스 브론슨'(극중 이름 까먹었다-_-)은 '총'으로 대결한다. 허허, '서부영화는 그래도 총'이라고 우기는 식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가면서, 종반부에 갈등은 해소되지만 우울한 기운 감출길 없다. 새로운 기차역을 둘러싼 살육의 싸움은 끝나지만 서부의 '자유로움'은 사라져간다는 느낌이랄까? 찰스 브론슨이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갈데가 없는 것이다. 어디론가 멀리 가버려야 어울리는 캐릭터인데... 결국 역 공사현장으로 돌아오는 찰스 브론슨. 어딘지 쓸쓸하다. 이젠 총잡이들은 갈곳이 없는 신세가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인지...

 

뉴올리언스의 여인 질이 물을 떠주려하자, 철도 노동자 수백명이 모여든다. 총잡이들의 로망과 살육으로 지배되던 서부 사막에도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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