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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주의에 대한 켄 로치의 입장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의 내러티브는 철저히 현실적인 내용, 말하자면, '노동자계급의 교훈적 패배의 역사' 그 자체이다. 지금껏 몇몇(왜냐하면, 스스로 좌파라 자칭하는 이들은 많지만, 엄밀히 따져서 '영화적으로' 좌파인 감독은 별로 없다.) 좌파 감독들이 영화로 투쟁하려했지만 켄 로치처럼 '투쟁'다운 투쟁을 하고 있는 감독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의 사진을 찍은 카메라는 의도적이었던 것일까? 그들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허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촬영중인 켄 로치와 촬영 staff들.)




투쟁하는 작가주의의 최전선 켄 로치에 바친다 ④
[필름 2.0 2006-11-09 18:50]

현재의 감독 중 가장 실천적인 사회주의 감독 켄 로치는 역사적 거울을 통해 지금 노동계급의 우울과 좌절을 토로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구의 편에 서는가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가의 태도! 1995년, 켄 로치가 <랜드 앤 프리덤>을 완성했을 때 세계는 논쟁에 빠져들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영화를 둘러싼 미학적, 문화적 담론만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1939년 실패로 각인된 스페인 내전에 관한 배반과 분노에 대한 기록이었고, 영화가 개봉되자 스페인 극장가에서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토론이 형성되는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려 반세기가 지난 후에야 스페인의 역사는 망각의 늪으로부터 깨어나고 있었다. 한 평자가 켄 로치에게 왜 당신의 관심이 영국 노동계급으로부터 스페인으로 이전되었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의 답은 명료했다. “역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우리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그것을 민중들에게로, 본연의 그들 것으로 되돌려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 대답처럼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그가 이미 <랜드 앤 프리덤>에서 보여줬던 역사가의 시선과 태도로 다시 한 번 무심한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역사적 무대는 1920년 아일랜드다. 학살과 고문, 죽음과 고통으로 넘쳐나는 그곳에서 켄 로치는 스페인 내전의 전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총을 들고 게릴라 투쟁의 한 전장으로 돌진한다. 그런 점에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랜드 앤 프리덤>의 거울처럼 보인다. 전문 배우들과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한 순간들은 마치 뉴스릴이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해 숨이 막히고, 조바심 쳐진다. 켄 로치의 태도와 방법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게릴라 전투의 소름끼치는 순간들이 지나가면, 역시나 예의 기나긴 토론들이 벌어진다.

내부의 적! <랜드 앤 프리덤>이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적을 넘어 좌파연대 그 내부에서 발생했던 균열과 종파주의에 대해 질문하고 반성했던 작품이었던 것처럼,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그들이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러나 대답은 역사적 아이러니로 돌아온다. 거대한 적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을 둘러싼 내부에서 발생한다. 한때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투쟁을 함께했던 형제들은 노선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살육하는 끔찍한 비참으로 치닫고야 만다. <랜드 앤 프리덤>의 마지막 장면이,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현재의 런던 시점으로 넘어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손녀딸이 스페인의 붉은 흙과 수건을 손에 쥐고 번쩍 쳐들며 새로운 연대와 희망을 상기시켰던 것임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이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보게 될 마지막 장면의 숨 막히는 암울함과 절망은 적이 당황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2000년대에 들어선 켄 로치의 영화적 행보에서 이미 목격된 것이기도 하다. 영국 철도산업 민영화 이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동료의 죽음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죄의식으로 관객의 마음을 짓눌렀던 2001년 작 <네비게이터>나, 세상에서 버려진 빈민가 아이가 결국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여줬던 <스위트 식스틴>에서 우리는 이미 켄 로치의 비탄을 경험한 바 있다.

 

비극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이른바 신자유주의, 즉 영국의 대처리즘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에 의해 주도된 레이거노믹스 등으로 불리는 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은 전 세계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실업과 구조조정이라는 작업장의 첨예한 생존권 싸움을 넘어 우리의 일상으로 표면화되고, 문화와 가치들로 회귀한다. 이에 저항하는 문화적 표상들의 싸움은 몹시 고립되고 외로워 보인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폭력과 쾌락과 상품가치의 스펙터클에 포획돼 있을 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작가주의이자 좌파적 노선에 선 이들은 극히 적었다. 프랑스 노동계급의 삶을 드러내는 로랑 캉테나 알랭 기로디, 그리고 유럽의 변방 벨기에에서 역시 희망 없는 노동계급의 심리적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포착하는 다르덴 형제들처럼 그들은 매우 제한적인 이름들이다. 그나마 ‘세계 영화제’라는 특수한 시장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들의 영화를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국 내부로 들어갔을 때조차도 켄 로치의 이름은 독보적이다. 물론 마이크 리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는 노동계급의 보다 깊은 내면으로 침투해 들어가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건조함과 해방구 없는 절망 그 자체를 소묘한다.

그리고 이들과 다른, 이상한 또 하나의 트렌드가 있었다. 이른바 사회적 드라마라 불릴 만한 일련의 영화들은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를 비롯해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처럼 영국 키친 싱크의 후예임을 자처함과 동시에 대처리즘의 폭력으로 시작된 80년대 영국사회의 비극을 유머와 로맨스라는 장르적 방식으로 흡수한다. 이중에서도 스티브 달드리의 이력은 흥미롭다. 그는 1984년 영국 탄광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던 바로 그 순간, 노동자들 곁에 선 증언자였다. 이 시기 켄 로치가 ‘1984년 파업에 동참한 탄광 노동자들의 노래, 시, 그리고 경험’이라는 부제의 다큐멘터리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Which side are you on?>를 연출하고 있었다면, 그는 연극 <돌이킬 수 없다 Never be the Same>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고 있었다. <빌리 엘리어트>는 바로 그러한 경험에서 탄생한 영화였다. 그러나 그가 켄 로치와 다른 점은 그 기억과 경험을 영국식 장르라는 상업적 타협으로 끌고 간다는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마지막 장면은 탄광 출신의 소년이 성공해 화려한 발레 데뷔전을 치르는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싸움은 처절하게 패했고, 심지어 많은 이들이 죽어갔다. 영국식 사회 드라마 영화들은 그 실패와 비참을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유머와 해피엔딩으로 봉합한다. 켄 로치의 진정성은 여기서 드러난다.

 

단순함의 미학! 켄 로치를 폄하하는 평자들의 주요 논지는 그가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공허한 비판은 어느 누구보다도 형식 그 자체에 대한 자의식과 철학을 가진 그의 응답 아래 무가치해진다. “내용이 스타일을 결정해야만 한다. 영화는 반드시 핵심적인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져야 하며, 카메라와 카메라의 스타일이 그것이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중요해져서는 안 된다.” 결국 그는 1969년 <케스>를 연출하며 만난 촬영감독 크리스 멩게스와 제작자 토니 가렛 등과 더불어 ‘꾸밈없고 소박하고 진지해지기 위한 가장 단순한 프레이밍’이라는 자신의 원칙을 설정한다.

사회주의자임과 동시에 원칙주의자인 켄 로치의 이러한 실천은 일회적인 작품들로만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통해서도 하나의 실천적 궤적을 형성한다. 60년대 프리시네마 세대와 더불어 등장한 그는 지금껏 여전히 노동계급의 일상을 소묘하면서도 그 안에 배태된 사회구조의 모순과 폭력을 성찰한다. 그러한 여정이 변별점을 경유하게 되는 지점은 1995년에 연출한 <랜드 앤 프리덤>으로부터 <칼라 송> <빵과 장미> 등을 통하면서다. 영국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노동계급의 현실을 다루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스페인 내전의 역사로부터 식민지 니카라구아의 상흔으로, 그리고 첨단 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의 심장부 미국으로 넘어가 외국인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대한 참여로 이어졌다. 이른바 새로운 인터내셔널리즘의 이러한 실천은 그러나 2000년대 발톱을 날카롭게 세운 블레어 정권의 영국에서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다. “블레어 정권은 친미적이고 친자본적인 새로운 보수주의자”라는 그의 단언처럼, 그는 미국이 이라크에서 행하는 살육을 영국이 여전히 아일랜드에 행하는 폭력으로 비유한다. 1990년에 연출한 <히든 아젠다>에 이어 두 번째로 아일랜드 문제를 전면화한 이번 작품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그는 다시금 역사가 현재를 돌파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상기한다. 그러나 돌파구 역시 단순하지 않음을 그는 안다. 그는 아마 이 영화를 연출하며 이 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혁명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욱 힘겨운 문제는 혁명의 성공 그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그가 베스트 영화로 손꼽는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에 나오는 한 혁명가의 말이다. 적은 거대한 괴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우리들 내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정지연(영화평론가)

기사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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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타나모로 가는 길


 

<관타나모로 가는 길>(The road to Guantanamo),

아시프는 말한다. 

"the world is not a nice place."

 

그 '처절한 진실'은 이 영화는 어떤 피비린내나고 분노어린 실화의 재현으로 너무나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 이 영화는 오직 '보여주고', '증명하며', '증언하는' 영화이다. 다큐멘터리이지만 극영화이며, 100퍼센트 진실에 의존한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파키스탄계 영국 청년 네 명이 친구의 결혼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향한다. 결혼할 청년의 신부가 될 소녀가 살고 있는 곳으로 향하던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미군의 폭격을 만나게 된다. 젊고 혈기왕성하기만 한 청년들의 여행은 이때부터 비극으로 치닫는다. 미군의 공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도시에서 외국인들을 내보내는 과정을 겪으며 혼자 떨어져 실종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수백 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탈레반의 본거지에서 연합군에게 잡힌다. 이들은 미군에 넘겨져 관타나모로 끌려가 2년이 넘는 시간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것은 실화다. 지금도 쿠바 관타나모에 있는 미군 수용소에는 500여명의 포로가 온갖 비인간적 대우 속에서 고통받으며 갇혀있다고 한다. 나치의 그것도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의 그 수용소는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략의 부당함, 비도덕성, 잔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수년을 고문과 온갖 거짓 취조에 시달리며 갇혀있는 세 청년(한 명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종된다.)은 계속해서 진실을 말하지만, 미군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때까지 그 어떤 포로도 풀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2004년 750여명이나 포로가 그 안에 있었지만, 단지 10명만이 기소되었을뿐이며, 그 중 단 한명도 유죄선고를 받지 않았다. 조작된 언어가 세계를 지배한다지만 관타나모는 그 조작된 세계의 거짓과 폭력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인 것이다.

 

수용소에 갇혀있는 세 청년의 고통과 분노가 담긴 영상과 파키스탄, 영국에서의 지난 날을 보여주는 영상은 끊임없이 교차편집(inter-cut)되어 보여진다. 왜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어야하는 저 아랍인들이 저 곳에 갇혀있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과 분노를 갖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다.

 

당연히 느껴야하는 분노. 이 영화를 보고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 벗어나 다시 삶을 오직 '앞으로' 내딛으며 살아가겠다는 세 청년의 마지막 말은, 좌절할 수만은 없다는 감독의 남다른 의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래, 세계는 친절한 곳이 아니며, 우린 분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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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내PD들의 알리바이

새벽길님의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에 관련된 글.



논쟁은 중요하다. 그러나 저것은 건강한 논쟁의 일부가 결코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조야해 보인다. 민노당 안에서의 NL과 PD 나이드신 분들이 피튀기게, '이전투구'(열받지마시길. 내가 보기엔 너무 이 표현이 '적합'하다.)하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싸움이 운동의 발전을 위한 '치열한 논쟁'이 아니라, 이전투구로 비치는 것은 내용과 방식이 너무 조야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본질도 아니며, 정수도 아니며, 문제해결에 하등 도움안되며, 스스로 뒷걸음질만 치는 결과만 나을 것이다, 라는 뜻!

 

NL이 어쨌건 저것을 일반화시켜서 빈정거림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저런 쓰잘데기 없는 <당권장악을 위해 자주파가 알아야할 필수 욕지거리 9선>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낭비하는 건 분명 소위 'PD' '선배님들'도 그 조야함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닐까? (아이고, 이런 하극상이... 하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니 어쩔 수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전선 위에 같이 서있으면 동지는 동지라고 생각하는데... 왜 논리적인 비판글 대신 빈정거림과 욕설들이 난무하는가... 배설들은 끊임없는 배설들만을 낳을 것이다.

 

학교에 있을때 예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하던 얘기가 있다. 다짜고짜 타 정파 욕부터 하고, NL동지들을 멍청하다고만 말하는 분들 얘기는 절대로 듣지말라고. 열이면 열, 배울게 별로 없는 '술자리'좌파들이었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일반화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내가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다. 소위 마니아들이었던 것이다. 대중을 만나지 않고, 집회엔 혼자 다니며, 학교 안에서 NL동지들이 얼마나 열심히 대중들을 만나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민족주의 멍청하다고 혼자 외치는, 좀 나이 많은, 내가 하면 정치, 남이 하면 '운동대운동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단지 술수', (일본말로는) 오타쿠!

 

아, 너무 건강하지 않다. 가뜩이나 시대가 하수상하여 부르주아들이 무자비한 탄압을 하고, 이데올로기 공세는 강해지는데 왜 이런 건강치 못한 쌈박질에 몰두하는가. 개소리는 무시하면 되는거 아니었나? 왜 똑같이 열받는가. 민족주의자건, 소위 '좌파'건, 그 사람의 운동의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게 운동하느냐 일텐데, 당내 싸움은 누구를 막론하건 응원하고 싶지 않아보인다. (물론, 다 그렇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난 당원도 아니고...)

 

진보블로그에서 저런 방식의 조롱들을 많이 본다. 눈쌀 찌푸려진다. 여긴 80년대, 90년대학번말고, 나같은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어린이들도 많은데 너무 안좋은거 많이 배우는것 같다.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난 소위 전통적 PD 학생운동의 풀 안에서 운동했(하)고, 운동하면서 NL동지들에게 배신감 느끼고 열받았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않게 운동한다고 따라서 똑같이 하라고 배우진 않았던 것 같은데...

 

모 학교 선배님들은 전부 '전진'으로 갔다던데, 가끔 보면 아무래도 저건 내가 배운 운동과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든다. 왜 목매다는건가. 계속 저렇게 하면 NL이랑 '같이' 망할게 분명하다. 대중운동은 계속 무너지고 있는데, 저기서 지금 뭐하고 계시나... NL들이 당권 장악할 동안 뭐하고들 계셨나, 이런 생각만 든다. 당권 장악은 욕찌거리로 되는게 절대 아닐텐데. 민노당이 그렇게 우스운 당인가? 당권 장악은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만 가능하다. 일단 선배님들은 아는건 많지만, 어쨌건 그 '민족주의자'들한테 대중운동, 대중조직으로는 한참 지고 있는 것이다.

 

좀 논지를 벗어나는 말이지만,

 

심지어 당은 너무 의회주의로 변질되어, 더이상 대중투쟁을 선도할 수 없는 '정책정당'이 되어서, "당을 통한 지역 민중 조직화"라는 꿈은 물건너가도 한참 물건너간 것으로 보이기 까지하다. 게다가 "어쨌건 당권 장악"하면 또 뭐 어쩔껀데, 이런 생각도 들고.

 

내 생각에, '무조건 우리가 하면 잘 된다'는 건 환상이다. 우리가 안해도 잘하는 대중운동에 능한 자들이 있곤했으며, 우리가 해도 대중운동 할 줄 몰라 당년도 학교 운동 망친 예들이 셀 수 없다.

 

그것은, 알리바이였던 것이다! 얼마나 편한가!!

"다 쟤네 때문"인데.

 

p.s.

정치적 입장의 옳음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그건 여기선 논외. (PD도 PD나름이지만, 일단 PD는 옳다고 치는 것을 가정하고. 이것은 그러나 심상정보다는 강기갑이 훨씬 훌륭한 동지로 보인다는 내 눈을 속일 순 없다. 정말 "강기갑은 nl이니까 옳지 않"은가? 입장의 옳음은 오직 실천과 운동의 진정성만으로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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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전태일

 

복개된 청계천거리가 참 싫기도 해서 아예 가지 않으려했던 때도 있었다.

그건, 공개되어 수십만 인파가 몰렸다던 그날.

왠지 조작된 연극무대,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파쇼정치에 동원되는것 같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 거리, 그 중에서도 청계천광장 근처에서 젊음의 거리 건너편까지,

그리고 동대문에서 전태일동상까지 구간을 가장 좋아하고,

종종 가곤 한다. 특히 늦은 밤.

왜 그럴까, 그 동상 옆에 서면 썩혀진 나를 정화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의 어리석음, 내가 싫은 나의 여러모습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알 수 없는 자신감을 얻고 온다.

참 고마운 거리다.

아 참, 그 거리는 이명박이 만들지 않았다.

공사하면서 죽기도, 다치기도 했던 건설노동자들이 만들었다.

이명박이 설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곳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하다.

전태일 동상 앞 거리에 락커칠을 하고싶다.

노동해방 이렇게, 큼지막하게, 쓰고 싶다.

 

 

 

저 큰 흉상,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믿는 자들에겐 저 동상이 자신들의 젊은 날의 추억의 사진과 같이 느껴질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그 흉상에 비친 전태일 동지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그 표정, 그 앞에 감히 아무도 부끄럽지 않게 설 수는 없는 현실.

그러나 저렇게 가득,

피켓을 들고, 마스크를 쓰고 매일같이 외롭고 힘겨운 투쟁을 하고있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처럼

그 외로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명박이 모르는 것처럼,

저 잘난 386 영웅들도,

강단 위에서만 준엄한 척하는 좌파 '교수님'들도,

우리 학교 총학생회장 출신 국회의원님들도,

절대 모를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항상 적어도 자기만은 잘났다지만, 그것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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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련 영화제작의 출발

1908년 프랑스의 파테사가 [돈의 코자크병들]을 시작하면서 부터. 같은 해 최초의 러시아 영화 촬영소가 모스크바에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모든 필름의 공급과 장비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계속 수입되었다. 1917년  제정러시아 말기까지는 모스크바에 주요한 중앙 제작시설을 둔 20명 이상의 제작자가 생겨났다. 그렇다 할지라도 국내영화보다는 외국영화가 더 많이 상영되었다.

제정러시아에서 영화는 마치 다른 곳에 위치한 것처럼 대중적인 예술이 되지 못하였다. 극장도 별로 없었고, 표는 비쌌기 때문에 노동계급은 영화관에 갈 능력이 없었다. 높은 문맹률은 인쇄된 자막을 일반적으로 부담스럽게 만들었고, 러시아 무성영화의 문학적/연극적 경향은 교육받은 중간계급에 영화를 한정시키는데 더욱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필름 다르 나 아돌프 주커의 유명한 연극 속의 유명 배우들과 다소 유사한 러시아 영화의 고도로 연극적인 전통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ㅇ며 미국의 필름 보관소에 있는 몇몇 예들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더러 예외는 있지만 볼셰비키 혁명 후에, 대부분의 영화 제작자와 배우들은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장비와 필름을 가지고 외국으로 떠났다.

교육상인 극작과 루나차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영화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때까지의 영화와 보잘것없는 러시아 영화제작에 대해서 레닌은 정말로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모든 예술 중에서, 영화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고 하였다.

새로운 정부를 완전히 수립하는 데에는 약 5년(1918~1922)이 걸렸으며 영화산업이 생산성을 가지고 기능하는 데에는 2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23년 말까지 소련 내에서 상영된 영화의 13% 만이 소련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1919년에 구자본주의 경제와 그 정신상태가 사회주의 정부의 필요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졌을 때 모든 산업은 완전히 국유화 되었다.
같은 해에 새로운 소련 영화감독들을 양성하기 위해 모스크바 영화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영화학교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할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25년에는 국내 산업의 모든 면에 어떤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해외의 배급체계를 정립하기 위해 소련 영화기업 합동이 형성되었다.

1919년 경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소련 영화는 당시 두 갈래의 창조적인 진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처음에 우익은 전통 연극의 상류계급 인물을 인민위원이나 농민들, 적군 병사들로 대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습적인 방법과 형식을 사용하면서 오래된 연극적 전통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좌익은 내용 뿐 아니라 형식의 혁신에 있어서도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소련 영화는 보통 두명의 좌익 개척자들의 이론과 실험에서 나온 것들이다.

□ 베르토프
- 소련 영화감독들의 첫 작업은 뉴스릴과 기록영화이어야 한다는 레닌의 충고를 따름
- 1919년 키노 아이 그룹을 창설 & 성명서 발표 / "부지불식간에 포착되는 실체"
- 1922년 [키노 - 프라우다] 제작 : 매달 나오는 뉴스 필름으로서 23회동안 계속 됨
- 베르토프는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행위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편집은 그의 작업에서 특별
  히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1920년대 초기 소련에서의 원자재 부족은 베르토프가 다른 영
 
화 필름의 끝부분에 남아있는 필름 조각들을 찾아내어 사용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하
  여 베르토프는 구제정러시아 떄의 뉴스 영화의 쇼트들과 새로운 쇼트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들을 창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은 세르게이 에이젠쉬타인이 몽따쥬로 발전
  시킨 편집의 맹아적 형태였다.

□ 레프 쿨레쇼프
- 영화감독, 이론가, 대학강사, 모스크바 영화학교 교장
- 필름없는 카메라로 행해지는 일련의 연출실험들을 함으로써 생필름의 부족에 대처
- 영화의 구조를 알기 위해 기존의 영화들을 분석하고 재편집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냄
- 쿨레쇼프는 커팅을 통해 비직업배우가 세련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과 전문배우
  들의 연기에 그들이 연기할 떄는 알지 못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발견

 

>>출처 '소련 영화의 예술성과 변증법 1925 ~ 1929' 中, 네이버카페 '사회당 게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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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동네 사람들 너무 싸가지 없어

사진을 꼭 찍어서 같이 올리고 싶어서 계속 미루어두었지만 카메라도 없는데 사진은 언제 찍나 싶어서 이렇게 올린다. 이것은 서울 **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난 10년 넘게 이 동네에 살고 있다. 이 동네가 온갖 부르주아지로 가득차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처럼 역겨울때는 없었다. 요 근래 **동 몇몇 주민들이 '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서 아주 그냥 결사 투쟁을 하고 계신다. 우리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가에 플랜카드 여러개가 걸려있다. 가히 꼴불견이다.

 

   "조용한 고급주택가에 치매양로원 왠말이냐!"

   "전용 자연경관에 치매양로원 결사반대!"

 

이런 미친놈들. 왠말이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역겹다. 몇일전부터 어디 충무로가서 대자보라도 인쇄해서 붙여놔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만 바뻐서 그것도 잘 안된다. 아니면 플랜카드라도 걸고 싶은데 돈이 너무 없다. 어떻게 해야할까. 저걸 그냥 내버려둬야하나. 테러할까. 찢어버릴까. 낙서할까. 라카칠할까...

 

지능장애를 겪는 노인(치매노인)들을 아예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저 작태는 대체 어떤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다 큰 인간들이 저따위일까. 동네 사람들 다들 저렇게 생각할까?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렇진 않더라도 저게 대세일까? 온갖 인간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역시 부르주아들은 씨를 말려야하나...

 

나 어릴때 17살때인가? 그땐 이런 플랜카드가 동네를 장식했다. 저 아래 큰길가까지.

 

   "장애인시설 결사반대한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기억이 난다. 난 세상에 그렇게 플랜카드까지 인쇄해서 10여개나 걸 정도로 싸가지없는 어른들이 많은 지 그때 알았다. 집에 가자마자 엄마한테 처음했던 말이,

 

   "엄마, 우리동네 사람들 너무 싸가지 없어."

 

부르주아 동네에서 인간성 유지는 가능한가. 이 동네 사는 꼬맹이들 장래가 너무너무 걱정된다. 애들 다 저렇게 되는거 아니야? 이런 근심. 공기는 좋지만, 이 동네 정신상태가 피폐해져가는 것 같다. 정말이지, 서울에서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동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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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

만주개장수님의 [무하마드 알리] 에 관련된 글.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e채널 영상을 봤다. 정말 멋지다. 21세기의 남한 20대가 신뢰해야할 것은 '글로벌리제이션'과 '월드컵'이 아니라, 억압에 저항해 가장 인간답게 싸워온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사람들의 젊은 시절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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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색

 

인간사색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강준만

 

1학년때 들은 교양수업때 <대중문화의 겉과 속>을 읽은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강준만 책을 읽었다. 제목은 <인간사색>. 한때 그의 노무현 변호론때문에 역겨움을 느껴 그가 쓴 모든 글을 무시하다가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됐다. '한국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라는 부제는 아주 적절하다. 이 책은 한국사회를 사는 인간들의 '관계맺음'에 대한 연구의 총론격인 책이다.

 

사랑, 불륜, 질투, 순결, 키스, 욕망, 열정, 감정, 체질, 싸움, 청춘, 나이, 효도, 호칭, 권위, 진실, 기억, 신념, 의리, 배신. 위의 스무가지 화두가 한국인의 관계맺음 문화를 관통한다. 예컨대, '감정: 한국인은 감정억제를 모른다'는 chapter에서, 한국인은 '우뇌가 발달했다'는 이화여대 교수 최준식의 이론을 빌어, 감각이나 직관을 관장하는 우뇌가 발달한 한국인들은 감정 발산에 예민하고 즉자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수동적이고 부정적이며 패배적 사고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감정단어'에서 그 현상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 중 하나로 그는 한국어의 감정단어 430여개 중 72퍼센트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단어라는것이다. 지배와 저항의 관계 속에서 감정발산은 필연적이다. 감정발산은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팽배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감정발산의 역동성을 지배하고 있다. "너 왜 그렇게 감정적이니?" 이 말이 지닌 압도적 권위는 이 말로 비판을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일전에 강준만 교수의 한국사회에 대한 논평, 분석 자료를 모두 모아 철두철미하게 정리해놓는 습관(?)에 대해 들은 바 있는데, 이 책에서 그 방대한 성과의 일부분을 접할 수 있다. 이 책의 3분의1은 '인용'이다. 내가 가장 인상적인 chapter는 '감정'과 '체질'이었는데, 그 중 '체질'분석에서 한국인의 '체질'이라는 조건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분석은 꽤나 재밌었다. 동국대 황태연 교수가 한 말을 빌리자면, "한국에 소양인이 25% 밖에 되지 않아 '체질상으로는' 혁명역량이 크게 부족하지만, 모든 국면이 곪아터지는 예외적인 역사상황에선 가장 수가 많은 태음인 집단의 지원을 받아 변혁운동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했다"는 것이다. 흥미롭다. 체질 결정론은 극히 위험하지만 아예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하기엔 대단히 과학적인 분석인 것 같다. 약간 영향을 끼치겠지.

 

그의 책이 왜 재미있는지 알았다. 일단 인용이 많고, 수다 떨듯 글을 쓰며, (나쁜 뜻이 아니다.) 글을 그냥 개연성있게 잘 쓴다. 논리성이 가끔 떨어지긴 하는데, 그건 그냥 그럭저럭 넘어가주면 된다. 어차피 크게 신뢰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개연성있게 쓰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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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서사, 1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두 번째.

 

열광적인 GV는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다가온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난 노동석 감독의 첫번째 장편영화 <마이 제네레이션>을 보지않았다. 어디선가 '리얼리즘적인 한국 청년영화의 탄생을 알리는 등장'이라는 표현을 들었을때에도 큰 관심을 갖지않았다. 저예산 영화의 현실이다. 나같은 영화광(자칭)도 저예산영화라면 좋은 영화 건져보기 어려운게 현실이니까. 다행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보게 되어서. 내년에 개봉한다던데, 얼마나 많은 상영관에서 개봉할 수 있을까?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어렵고 버거운 삶 속에서도 '좋은 사람'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어렴풋이 잘 보이지 않는 희망'을 품는 싶은 기수(김병석 분, 그는 '비전문배우라는 타이틀로 벌써 두 개의 훌륭한 영화에 출연했다!! 전문은 뭐고 비전문은 대체 뭔지. 누군가 그를 '노동석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표현한 것을 적극 공감한다.)와 종대(유아인 분)와 같은 청년들에게 '내일'은 무엇이어야 하냐고 묻는 것이다. 이미지보다 내러티브가 살아있으며, 너무도 사실처럼 느껴지며 다가온다.

 

드러머라는 꿈이 있지만 그 꿈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 기수. 그리고 항상 위협받아온 자신의 삶 속에서 오직 '진짜 총'만이 자신을 지켜줄 무언가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 종대. 어려서부터 둘의 삶은 온전하지 못했다. 영화 중반부까지 둘은 마치 친형제처럼 생각된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처절하고 좌절뿐인 삶 속에서도 어렵게, 어렵게 희망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절규, 외침, 약속들... 그것이 중요하다.

 

시대는 청년들에게 '내일은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도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의 내러티브가 자연스럽게 그것을 설명해준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자꾸만 다른 이로부터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을 받는 그 공허한 속삭임으로나마 희망의 끈을 놓지않고 싶지만, 꿈은 자꾸 멀어져간다. 이대로 비참하게 살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그들의 삶을 휘감는다.

 

자칫 우울함만으로 끝날 뻔한 영화는 감독의 의도대로 작은 빛줄기를 찾아 떠나는 종대 일행을 보여주며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려 노력한다. 그래, 그것은 마치 내러티브의 몸부림과도 같았다. 어렵게 악수에 성공하는 다리 밑 '광인'과 기수의 악수하는 두 손, 그리고 종대의 미소로부터 그들의 처절한 삶에서의 다른 삶으로의 의지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 리얼리티만큼 쓰라리게 다가오는 말이다. 그래, 차라리 희망과 밝은 미래만 이야기하며 공상을 헤매이는 것보다 너무도 명백한 일상의 단편을 풀어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20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저 공허한 약속만으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인식이 그/녀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차라리 솔직히 말하자.

 

"그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되고싶다!"고. 행복은 잘 보이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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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단편영화 <먼지>

-흑백 스틸컷 영화처럼 단절된 컷들의 연속인 기혼 여성의 삶

 

독특한 편집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스틸컷을 이어서 만든 영화는 두번째인데, 하나 느낀점은 느낌은 아주 슬퍼진다는 것이다. 흑백 스틸컷처럼, 그녀의 삶도 정적이고 고요하며 세상의 무엇과는 단절되어있다. 그녀는 평범한 전업주부이다. 하루종일 설겆이, 빨래, 걸레질, 요리... 반복된 일상, 단촐한 삶은 서서히 그녀를 죽게 만드는 것만 같다. 성애화된 눈빛으로 자신의 삶을 제멋대로 껴맞추고 강제하는, 남편조차도.

 

그녀는 자신을 아무것도 바꿔내지 못한 삶을 파열시킨다. 먼지처럼 쌓여있는 그녀의 표정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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