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신원확인

시놉시스#4

중증장애인이며 11살인 현동이가 남대문 시장 작은 골목길에서 할머니 손을 놓쳐 길을 잃었다.

때는 1999년 12월 30일.

21세기가 단 이틀남은 어느날 오후였다.

현동이는 앞뒤가 꽉꽉 철망으로 막힌 남대문경찰서로 갔다.

때는 길을 잃고, 남대문로 빌딩 옆 한켠에서 하루밤을 추위 속에서 지샌 그 다음날 저녁이었다.

말이 안통한다며 답답하다고 소리지르는 한 40대 중반의 무뚝뚝한 표정의 경관.

신원확인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너나 없이, 누구의 의심, 의문, 반론도 없이,

현동을 서울 교외의 모 정신병원으로 보내기로 한다.

그리고 7년간 현동을 찾아 남대문시장 바닥에서 이리저리 전단지를 붙이고 나눠주며 현동을 찾는 현동의 할머니.

환불상 김씨는 거추장거리니까 저 멀리가서 하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곤 했더랬다.

그리고 할머니는 7년간 현동을 찾을 수 없었다.

할머니의 표정, 눈가의 주름, 가느다란 발목이 더 쾡해져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브라보, 김순봉

단편영화; 브라보, 김순봉

-슬픈 삶, 그러나 살아간다.

 

카페 빵과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여는 독립영화상영회에 가서 이 영화를 보았다. 언뜻 인터넷 서핑하다가 제목만 몇번 봤던 것 같은데.

 

노인, 가난한 노인, 생활 보조금도 받을 수 없는. 주위 사람들은 그에게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다. 아주 흐릿흐릿하게 보일듯말듯하던 희망도 잘 보이지 않고 이내 사라진다. 김순봉의 버겁고 힘겨우며 외로운 일상을 사실주의적으로 잘 그린 영화같다. 슬펐다. 너무도 가까운 현실이라는 생각이 막 들었다. 김순봉이 마지막에 자살하지 않는 것으로 결말을 맺어 다행이다. 그러나 슬픈 삶이라는거. 할 일은 많이 남아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다운 리얼리즘 영화. 두 형제의 다른 전망. 운동의 비극 속의 개인사적 비극의 혼합.

 

홀로 떠난 부산국제영화제로의 2박3일간의 주말 답사를 통해 그토록 보고싶던 이 영화를 보게되었다. 잔잔하고 찬 바람이 부는 부산 요트경기장 야외상영장에서 혼자 앉아 광대한 스크린, 바다 널리 울려퍼지는 사운드로 보는 이 영화의 감상분위기는 최고였다. 이 영화는 그런 곳에서 봐야한다. 영화 속 아일랜드 시골의 너른 보리밭이 너무 아름답고, 그곳에 부는 바람을 찍은 영상은 민중들의 노래, 파도 소리같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동생을 아일랜드 독립투쟁의 대열에 합류시킨 형은 자유주의적이고 '점진적 개혁'이라는 전망만을 갖고 있었고, 형에 의해 투쟁대오에 함께 하게 되었지만 아일랜드 민중들이 겪어온 고통들에 대해 보다 심도깊고 뜨거운 가슴으로 고민해오던 동생은 사회주의자였다. 켄 로치는 다시 묻는다, '자유주의인가', '혁명투쟁인가'

 

독립, 대의, 국가를 위해 투쟁에 있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무엇으로 인식해야 하는가? <보리밭은 흔드는 바람>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을 꿰뚫는 주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진행되는 두 형제와 동지들의 혁명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그/녀들은 구체적인 삶, 상황에서 무엇이 우선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고, 논쟁하고, 고민한다. 그리고 그 거친 언덕 들바람에 휩쓸려온 자신의 삶처럼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자신의 삶, 실수 속에서 좌절하고 슬퍼한다. 갑자기 혁명은 기쁘고 행복하기만 한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혁명적 정세는 너무도 슬픈 고뇌가 될지도..

 

영화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속의 피냄새를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보리밭 언덕이 아름다운 만큼 그 안에는 착취당해온 민중들의 피와 상처들이 있는 것이다. 켄 로치는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여받을때 이 영화에 대해 "이 영화는 부시와 미제국주의의 이라크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켄 로치의 영국은 잔인한 학살을 일삼은 윈스터 처칠의 영국이고, 그 처칠은 훌륭한 정치가가 아니라 학살자로 묘사된다.

 

해방은 잡힐듯, 잡힐듯하면서 잡히지 않는다. 혁명적 상황 속에서 유리한 상황을 성취해도, 많은 것을 이룬듯하여도...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정작 중요한 내부의 투쟁들이 그/녀들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켄 로치는 동생과 같은 진영의 사회주의자들의 치열한 논쟁들을 빌어 오직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서 끝까지 투쟁하고자 하는 운동만이 대안이고, 민중들이 바라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해방은 무엇으로부터 가능할까? 과연 우리 운동은 언젠가 과정 속에서 지도부의 명령과 '대의'라 지칭되는 무엇이 인간성과 대립되지 않을까? 이 섣부른 고민이라 생각될지도 모르는 이슈는 결코 우릴 비켜가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혁명적 상황에서, 목숨을 건 투쟁 속에서 저항하는 대중을 선도해온 활동가들은 언제나 그 고뇌에 빠지곤 했다. 자신의 오류를 언제나 정정해나갈지 모른다면 그 어떤 비극적 상황도 쉽게 일어날 것이다. 동생은 비극적으로 총살을 당한다. 독립운동의 뛰어난 리더였지만 자유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이었기에 대립했던 형으로부터.

 

'혁명적 상황'은 그 역동성만큼 저항했던 개인들에게 비극이 되곤 했다. 비극을 연출할 것인가, 아니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일심회 사건

일심회 사건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것만은 분명히 합의해두고 논쟁을 해야한다.

 

가장 첫째로 이것은 주사파들이 뭔 뻘짓을 하건말건 사회적 파장과 국정원과 보수언론들의 이데올로기 공세적 측면에서 볼때 '명백히 공안탄압'이다. 이 점을 놓치고 "당내에서 주사파들 몰아내자~"며 난리치는 건 옳지 못하다. 결과적으로나 현상적으로 저들의 공작에 놀아나는 꼴 밖에 나지 않을 것이다.

 

난 주체사상에 결코 동의하지 않고 저 강고한 정치분파의 사회운동 내에서의 비대칭적 권력구조의 점유, 아래로부터의 저항 운동을 왜곡시켜온 경향들에 대해 비판적이고 깨부수고 싶지만, 일심회 사건을 비롯한 여타 주사파를 볼모로 한 공안당국의 정치탄압에 대해서는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 사회 내의 역관계에서 '옳은 입장'이 승리하는 길은 오직 운동의 옳음과 사회운동의 확장을 통해서이지, 공안당국 탄압을 통해서 일 순 없다. 지금의 이 탄압을 효과적으로 '운동'으로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후 전체 운동이 공안탄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소시기적 연대투쟁이 주체사상 옹호의 효과를 낳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지금같이 좌파가 사회운동적으로 아무 힘도 내지 못할때 자본가 정권의 공안당국은 이런 식으로 운동세력을 탄압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조희연 교수의 진보세력 다원화론 비판

자작나무숲님의 [진보 보수 모두 다원화 절실] 에 관련된 글.

조희연 교수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모두의 다원화가 '절실'하다고 한다. 글쎄,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길래 '절실'이라는 표현까지 썼는지 모르겠지만, 반쯤 맛간 강단좌파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그는 애매한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나누었다. 그의 시민의 신문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심지어 그는 노무현 지지세력조차 '진보'로 보는 듯 하다. 세상에, 노사모가 헛튼 꿈꾸고 캐속은 시절이 한참지났는데 아직도 노무현 타령인가. 그는 노무현 및 그의 지지세력을 '자유주의적 진보'쯤으로 파악하는 듯 하다. 몇년간 냉동인간됐다가 깨어난 인간이 아니라면 알 것이다. 자유주의(심지어 신자유주의지!!!)는 맞지만 진보는 결코 아니다. 어라? 내 보기에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노무현과 공병호인데 이윤율 재고와 기업경쟁력 강화를 위해 공기업 사유화하고, 비정규직 늘리자던데? 얼마나 자유주의적인가!! 자유주의는 좋은 것인가? 그가 쩔쩔매는 반공주의라는 한국적 모순의 백태는 이제 신자유주의자들의 적절한 놀이감이 되어버렸을 뿐이다.

 

노무현 정권이 진보일수 없다는 얘기를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강단좌파 비판글 안에 넣어야 한다는게 참 우습다. 세상에 진보가 학살전쟁에 파병을 하는가? 이미 임기 초부터 볼짱 다 봤다고 봐야한다. 여기서 환상을 보는 강단좌파들이 사회운동을 '캐'망치기 시작했다. 내 말이 심한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련의 몰락 이후 자신들의 이론적 공백을 자유주의를 껴다맞춰 맞춘 GD들은 그냥 입 쳐 다물고 있어야 한다. "급진진보는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게다가 노동자들을 무한정 비정규직화하는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을 만들고, 노동운동을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관리하는 노사관계로드맵 법안, 평택, 그리고 한미FTA도!

 

조희연은 뻔뻔스럽게 훈계한다.,

 

진보에게는 다른 의미에서 다원화라는 도전이 나온다. 조 교수가 보기에 진보세력은 자유주의 진보와 급진진보가 분화되지 못하면서 ‘저항의 미덕’과 구별되는 ‘통치의 미덕’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에게 필요한 정책 ‘실현가능성’ 혹은 현실성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권력을 갖고도 조중동 탓만 하는 것은 알리바이일 뿐”이라며 참여정부를 비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통치의 미덕이라니. 조희연이 보기에 진보는 곧 '운동권들'이다. 그는 진보세력이 통치의 미덕을 발휘하지 모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철저히 조희연스러운 생각으로 빠진 자들이 2012년 집권 운운하며 '정책정당'이니 뭐니 하고 있지만 이미 강고한 지배이데올로기 안에서 허덕이며 의회 안에 갇힌 저들만의 '통치'만 하고 있다. 조희연식 대안은 뻔한 결말만 맞이할 뿐이라는 것이다. 민노당이 내놓은 대안들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가 의회안에 갇혀있는 이상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기막힌 것은 거기에 최장집의 참여정부 비판 논리를 껴맞췄다는 것이다. 이 XX, 욕나온다. 대가리가 어떻게 된거 아닌가 싶은 생각뿐이다. 아무래도 당장 동아리방 가서 조희연 책 다 태워버려야 할듯 하다.

 

 

<-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진보'가 될 수 없고, 신자유주의가 케인즈주의 경제모델의 종결 이후 대안으로 출현했다는 상식은 EBS수능 사탐 강의에도 나온다!

 

조 교수는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사이에 비적대적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갈등과 각축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새로운 경제모델을 만들기 위한 경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 교수는 극심한 양극화를 완화해 정치경제적 불안정성을 낮추는 것이 기업과 자본의 ‘거시적 합리성’에도 부응한다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 경제문제를 둘러싸고도 비적대적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보수에게는 단순히 박정희 모델을 부활시키는 퇴행적인 모델이 아니라 달라진 조건을 반영하는 ‘박정희 모델의 혁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양극화 완화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성을 낮추는 것이 자본의 거시적 합리성에 부응한다는 멍청한 소릴 하다니.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 자본주의의 동학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멍청한 얘기일 뿐이다. XX, 공부는 하는거야? 이윤율이 지속적으로 하락되어 70년대 이후 그 어떤 방편(예컨대, 도요티즘 등)으로도 극복되지 않으니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체제를 도입한게 아닌가. 어디서 캐 멍청한 케인즈주의 타령이냐. 자본주의의 동학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가 <새로운 경제모델> 운운하다니;;;

 

진보세력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당위론에 그쳤고 정책으로 구현하지도 못했다. 참여정부는 박정희 모델에 반대한다고 천명했지만 관료적 작동방식은 예전과 똑같았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속에서 전개되는 민주주의가 투명성과 민주성은 높였지만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는 ‘민주적이고 투명한 계급사회’를 출현시켰다는 게 조 교수 설명이다.

 

당연하지. 신자유주의 정권이니까. 어디서 진보래? 이 땅의 평등, 자유는 오직 아래로부터의 사회운동으로 가능할 뿐이다. 정책 구현 좋아하네. 조희연은 아무래도 50년쯤 전 미국이나, 20년전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스웨덴이나 프랑스에서조차 케인즈주의 모델, 사민주의 모델은 이미 멸종했음을 모르는가. 지금 시기 야만의 세계화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적실하게 비판하고 저항을 조직하는 일 뿐이다. 정책 대안 좋아하네, 이미 30년전에 끝난 얘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거만한 우체국장

 

대체 왜 혼자 일 안하고 싸돌아다니는거냐. 거만하고 잘난 체만 하긴. 맨날 뉴욕이니 런던이니 하는 곳으로 전화까지 하고 말이다. 지 '아는 분'들은 다 잘나간다는 식이다. "어 그래요~ 김사장님, 이번에 따님이 뉴욕대에 입학했다구요?" 그걸 들었으면 그냥 혼자 듣지 왜 재방송하는거야? 관심없단 말이다. 맘에 안든다. 지 자랑만 하고. 앞의 직원분들은 우체국장의 거드름을 들은 체도 안한다. 코구멍 옆에 기름기에 불지르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시기심

시기심

-퇴근하자마자 쓰는 일기.

 

오늘 직장에서 든 생각. 사람들은 서로서로 시기한다. 왜 그럴까, 내가 보기엔 너무 사소한 일들 하나하나에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 같다. 직장에서 다른 부서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별 것도 아닌 일로 동료들끼리 티격태격하는걸 보곤 한다. 상사한테 '괜히 너떄문에 혼났다'는 게 대부분 다툼의 이유. 물론 부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 것 같다. 우리 팀은 별로 그렇지 않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내가 상사한테 미움받아 일자리에 불안정해지는 것'의 탓을 동료들에게 돌리는 게 일상다반사. 연대는 언제 가능할까. 관리자들은 이 틈, 이 헛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노무관리의 수단으로 감정들을 이용한다. 저들은 도도하게 저 멀리서 쳐다보면서 티격태격하는 부하직원들을 보며 비웃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실수했는데 한명만 탓하는 관리자의 저 뻔뻔함!! 오늘 오후 그의 심리가 나에 의해 간파되었다. 썩소하는 나쁜넘.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시기심을 부추기는 시스템으로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 같아보인다. 아니면 소외시키고 배제시키거나. 난 관리되지 않는 대신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이 지겨운 반복되는 노동!!! (그러나 칼출근 칼퇴근의 신화는 계속될 것이다. 5일치, 6일치... 누적되는 일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허허. 난 정말 팔짜늘어진 '계약직'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초반 포지셔닝의 잘못.)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프리즌브레이크 예찬

 

프리즌브레이크 1편을 이미 본다면, 이 시리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프리즌브레이크는 지금 시즌2를 미국에서 방영중인 미국드라마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tv시리즈류에서 한발짝 앞서있다.

 

이 시리즈에 빠지는 순간 스릴은 멈추지 않고, 혀를 내두를만한 두뇌플레이는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다. 게다가 개성있는 캐릭터들이 적절히 드라마의 또다른 요소를 담당한다.

 

주인공인 스코필드는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스토리를 이어가는 중심축이다. 사형수인 형이 무죄임을 알고, 그를 구출하기 위해 일부러 은행강도 행세를 하고 체포된 후 같은 감옥에 갇힌 형, 그리고 (본의 아니게) 7명의 다른 동료 죄수들과 같이 탈옥하고, 멕시코 아래로 도망가려는 것이다. 명석한 두뇌, 예리한 눈빛,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근성, 인간애, 치밀함!!!, 헌신성. 게다가 권력에의 개김성까지! 이 시대 영웅들에게 식상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낄만 하다. 그리고 다른 탈출을 꿈꾸는(시즌1), 또는 탈출한(시즌2) 죄수들이 저마다의 사연, 저마다의 개성으로 스토리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대체 누가 이 시리즈의 시나리오를 쓰는걸까? 누군지 몰라도 천재임이 분명하다.

내가 본 어느 tv시리즈보다 재미있다. 프리즌브레이크를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렇게 말한다.

지금 시즌2 8편을 엊그제 봤는데 9편 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

이런 시리즈는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년이

 

난년이
-관계맺음, 헤어짐

 

단편영화 <난년이>를 봤다. 러닝타임이 31분정도였던 것 같다. 난년이가 주인공은 아닌 것 같고, 난년이랑 같이 살게되는 강희(맞나?)의 이야기다. 강희는 대체 난년이의 관계맺음의 방식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어쩔땐 헤어진 애인을 생각하며 펑펑 울고, 어쩔땐 매몰차고, 어쩔땐 집에 들여와 sex하고. 너무 쉽다고 해야하나? 단순?

 

강희는 옛 애인을 잊는게 너무 어렵다. 헤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다. 영화는 복잡한 강희의 감정들을 세밀하게 잘 그려낸다. 나래이션은 영화 내내 계속되고 강희가 깔아주신다. 자신의 감정을 일기쓰듯 설명한다. 그녀는 계속 난년이를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난년이의 관계맺음은 남성을 닮아있기도 하고, 여성을 닮아있기도 한 것 같다고 느껴지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면 남성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도 든다. 그냥 난년이는 난년이다. 난년이와의 동거기간이 지나면서 강희는 어느덧 다시 삶을 되찾는다. 다시 찾아온 옛 애인에게 막 키스를 하는데 그 다음날 애인은 사라져버린다. 그치만,

 

아무렇지도 않다. 슬프지도 않고, 오히려 후련? 난년이를 닮게 되었다는건가? 난년이는 '난'년이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을로 -살아남은 이들의 꿈

 

가을로

-살아남은 이들의 꿈

 

또 다시, (김대승 감독이 연출했던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이미 죽은 사랑, 멈춘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을 떠난 애인을 잊지 못하는 현우(유지태 분), 상처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때떄로 분노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른다. 그러다 어느날 장인(이 될뻔한)으로부터 받은 죽은 애인 민주(김지수 분)의 '신혼여행의 계획이 담긴 노트'를 건내받고 그 곳에 적힌 그 길대로 따라 여행을 떠난다.

 

현우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때때로 기억 속(노트 속)의 민주와 마주치며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다시 재구성해나간다. 그들의 행로 중 소쇄원이 있었는데 10여년전 어릴때 갔던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아름다운 여행길 속에서 만난 세진(엄지원 분)은 민주가 죽기전 몇일간 삼풍백화점의 무너진 잔해 속에 파묻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다. 둘은 삶의 상처를 이 여행길에서 치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둘. 현우의 삶은 무언가로 채워진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환상이 아닐까.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라면 말이다. 그 아름다운 여행길, 전경, 맑은 공기. 그러나 다시 돌아온 현실은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여행길은 아름답기만 한데,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법들 중 무엇이 그 여행길에 있었는지 잘 기억이 안난다. 마치 몇일밤 꿈을 꾼 느낌이랄까?

 

-너무 슬퍼, 너무 사랑했었으니까.

 

민주가 죽기전에 세진에게 했던 말이다. 여행이 너무 아름다웠었으니까, 얼마후면 삶은 다시 너무 슬프지 않을까. 그럴수록 도피처가 되어버리는 여행은 잦아질 것이다. 세진은 벌써 세 번째라던데. 굳이 현우를 만났기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기억이 치유된다는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고.

 

-엔딩에 대한 내 생각

 

장면은 슬프고, 또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장면들에 비해 서사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서울 검찰청으로 돌아왔는데 계장(?)이 "검사님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도 좀 억지스럽고, 민우가 세진의 주소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좀 그렇다. 원래 안친했는데 왜 친해지려는걸까?

 

여행길의 마지막 종착지 산 꼭대기에서 노트를 불태워버렸으면 어땠을까? 불탄 노트는 바람에 날려 저 깊고 깊은 산 속으로 사라지고. 그리곤 서울로 돌아와서 부장에게 말없이 검사직 사표를 제출하는 것이다. 검찰청 건물 계단을 나오는 현우의 머리 위로 가을 낙엽이 떨어진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

 

에구구, 영화 만든 분들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