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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 등록일
    2010/09/07 14:18
  • 수정일
    2010/09/07 14:19

오랜만에 좋은 날씨다. 장안문 근처에서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자전거를 끌며 걸어서 지동시장 근처 자전거점까지 왔다. 수원천이 옆으로 흐르고, 사람들은 어쩐지 나른해 보였다. 드문드문 나무 밑 벤취에 앉아 쉬는 사람들, 천변에 늘어선 점포들, 아직 따가운 햇살이 그 모든 생들에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걸으며 휴식을 취하는 이 오후 한 나절이 내겐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마음이 앞서곤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긴 생이 저렇듯 나른하게 졸고 있는 노인의 어깨에 햇살처럼 기대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날은 궂고 비가 오고 천둥이 칠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반복되는 휴식과 분주함을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적일 뿐,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

 

 번역물을 접는다. ... 커피숍 통유리 밖으로 또 많은 차들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나는 산책자가 되고 싶다. 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욕망을 적요한 심층에 달래고, 세상의 모든 우발성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도시를 커다란 하나의 원형감옥처럼 바라보고 싶다. 저기 감시탑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다. 실재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히려 이 원형감옥의 구조 자체. '환영의 한계', 짐 자무시는 [리미트 오브 컨트롤]을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그렇게 규정했다.  실재 자체가 영화의 환영이라면 내가 걷고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실재일 것이고, 동시에 영화며, 또 동시에 환영이다. 그러나 현실은? 난 그것을 보고 싶다.

 

영화적인 여섯번째 감각? 또는 아뢰야식? 또는 신적 직관(스피노자)? 이것들이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여전히 어떤 것도 명징하지 않다. 도대체 난 명징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오히려 난 그 '무엇'을 창조해 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현실이라니!  이 속도를 가늠하는 것은 과연 의미있는 짓일까? 나는 혹시 이 덧없는 것들 중에 가장 덧없는 어떤 것을 '현실'이라 명명하고 불가능한 탐색을 하는 것은 아닌가?

 

Sapere Aude! 하지만 아직 미명이다. 왜냐하면 아직 '덧없음'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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