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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redbrigade

2009/07/03

  • 등록일
    2009/07/03 13:59
  • 수정일
    2009/07/03 13:59

2009년7월3일의 단골 커피숍아침에 그녀가, 왜 요즘은 블로그에 '글' 쓰지 않느냐, 고 했다. 응? 아, 일상 얘기?, 라고 대답하고 문득 요사이 내 생활의 보폭을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보니, 다시 잰걸음이다. 천천히 걷자고, 둘러보며 걷자고, 그렇게 다짐하고, 말하고 했는데 어쩌다 보면 어느새 걸음이 빨라져 있다. 

 

다시 느긋해지기로 한다. 번역은 꾸준히 진행중이고, 8월까지는 무난히 해 낼 것이다. 논문관련 책들을 읽고, 틈틈이 의뢰 받은 글과 칼럼글을 쓰면 된다. 독서계획도 별 어긋남 없이 진행 중이다. 다음 주면 이사를 갈 것이고, 이제는 정말 햇살을 받으며 아침을 맞을 수 있다! 지하생활자는 ya basta ~~

 

지금 있는 여기 커피숍도 이제 올 일이 없어질 것이다. 새 터전에 또 익숙해져야 하리라. 조용하고 싼 커피숍이 있으면 좋으련만 ... . 공원이 근처에 있다는데 반드시 가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나 혼자 살 곳이 아니니까, 그 사람과 함께 조곤조곤 얘기하면서 걸어다닐 산책로가 거기 있으면 좋겠다. 여름이면 과일 싸가서 자리 펴고 먹고, 겨울이면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을 수 있게 말이다. 

 

아, 그리고 꽤나 놀라운 책을 발견했다. 내 논문 주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새 책이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논문 주제를 '강탈'당한 느낌이 들어서 처음엔 좀 충격이긴 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나와 흡사한 생각을 저 먼 곳에서 같이 하고 있는 이 학자가 매우 친근하게 느껴졌다. 대뜸 한 번 만나보고 싶다, 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계속 관심을 가질 듯...   

 Deleuze and Ricoeur: Disavowed Affinities and the Narrative Self, by Declan Sheerin

 

리꾀르의 'the self'를 들뢰즈의 주체화 양식 비판을 통해 재구성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이는데, 내 의도와는 좀 다르다. 한 번 읽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논문의 범위와는 좀 차이가 있을 듯 ...

 

아,,, 비가 한참 오더니 날씨가 개고 있다. 어제는 굉장한 천둥-번개였다. 연구실 선생님 한 분이 오는 도중 뒷차에 벼락이 떨어진 현장을 목격했다고 겁에(?) 질린 채로 상황 설명을 했었다. 옆에 있던 분이 그러시더라. 어째 벼락 맞을 놈들은 안 맞고  (이 말에는 분명 명바기 패거리들은 안 뒈지고, 라는 함축이 있다. 점잖은 분이라 표현이 그렇지 않은 거다) ...  

 

기사스크랩을 좀 더 하고, 수업을 갈 것이다. 감기가 한 달 넘게 그녀를 따라 다닌다. 뭘 먹어야 건강해 질런지 ... 어디 히말라야 정상에 핀 연꽃이라도 따다 다려 주려나 ... 음. 갑자기 골똘해지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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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2009/6/26~2009/7/2)

  • 등록일
    2009/07/03 01:02
  • 수정일
    2009/07/03 01:02

- 뭐 이런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일단 피켓을 들고 시청 광장에 선다. 이때 경찰들을 채증할 동지 한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사진채증을 담당한 동지는 피켓팅하는 동지가 연행될 때 그 장면을 찍는다. 동영상이면 더 좋다. 저들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고, '불법'에 대한 근거를 대지 못하는 장면을 음성과 함께 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이 자료를 근거로 채증된 경찰의 신원을 파악한 후 고소한다. 그리고 소장에, 경찰은 조직의 일원이므로 명령권자의 처벌도 함께 원한다고 쓴다. 만일 경찰 상층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한 이 한낱 이경, 일경 등이 처벌되는 것을 수수방관한다면 윤리적인 비난을 받을 것이고, 만약 개입한다 하더라도 비난을 당할 것이다. 너무 순진한 생각인가? 해 볼만 하지 않은가?

 

- 대기업과 신문사 방송진출이 핵심인 미디어법의 노림수가 과연 '여론 분점' 나아가 '부르주아지의 여론 독점'에만 있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게 일차적 목적이란 건 분명한데, 두 번째 경우의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디어법이 통과되어 찌라시들과 이건희 일가가 방송을 해댄다면, 기존의 합리적 여론과 이후의 노예적 여론이 극명하게 날을 세울 것이다. 이건 곧 여론 분점을 경유해서 여론 갈등이 촉발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중대한 사안마다 사람들의 의견이 뚝뚝 갈라지는 걸 상상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물론 이런 갈등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부르주아지들이 될 게 뻔하다.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태들 속에서 정치적 무관심, 절망감, 냉소주의에 빠질 것이고 말이다. 이 마지막의 사태, 곧 전 인민의 정치적 무기력이 바로 부르주아지들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 미디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없다. 베를루스코니의 이탈리아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미디어는 중립적일 수 없고, 그 때문에 더 장악하기 쉬우며, 그 결과 우민을 더 쉽게 양산할 수 있다. 괴벨스는 이 이치를 너무나 잘 꿰뚫어 보고 있었지 않나?

 

- 조정환이 촛불의 폭력을 '절대적 폭력'으로 표현하면서, 그것의 존엄성이 부르주아지의 '선제폭력'이나 촛불들의 '방어폭력'보다 더 높은 권능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그 절대적 폭력은 실재적인 폭력의 잠재성도 함축하고 있다고 해야 정당하다. 혁명적 폭력은 다중의 혁명적 조건의 최상의 성숙, 그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그 폭력이 부르주아지의 탄압이라는 객관적 정세 하에서 발생하였다면, 그에 뒤이어 나타나는 다중의 실재적 폭력은 무람없이 절대적 폭력의 발현이라고 해야 한다. 이 면에서 조정환은 너무 소심하다.

 

- 흐린 날은 모든 사물이 신비롭다/호남선 고속버스 안/노변에 이제 막 생긴 마을이/경운기를 세워 두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 본다

 

-우선은 이런 것이다. 즉 '대통령 소환제'를 법률적으로 구성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인정하고, 기반으로 잡은 상태에서 그 제도화에서 파생되는 것들을 상상하고, 보완하라는 것이다. 법률적 말단에서 시작하지 말고 제헌적 상상력에서  시작하여 제도화를 완성하는 것, 그것이 꼬뮨이 실물화되는 최초 동력, 부동의 원동력(the unmoved mover)인 게다. 상상하라, 반성하라, 행동하라, 가 아니라, 상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반성은 미네르바의 부엉이들에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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