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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정치

 문화예술위원회의 혼란

문광부 소속 문화예술위는 이상한 이중권력 상태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취임한 김정헌 위원장이 이명박과 유인촌에게 해임됐다가 지난달 법원에서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아 다시 문화예술위원회에 출근하면서 두 명의 위원장이 동거하게 된 것이다. 이 혼란에 책임있는 문광부 장관 유인촌은 “재미있지 않겠어?”란 무책임한 발언을 했다. 국가 권력이 스스로 무능함을 시인하는 모습이 재밌는 건 사실이지만, 이 재미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천박하다.
문화예술위는 국가, 지역, 계급, 계층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문화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모든 국가 기관이 인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더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정치권력의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영역이다. 여기에 어떤 정치가 관계하느냐가 문제다. ‘어떤’은 철학의 문제다. 
 
이명박과 유인촌의 문화예술
노무현이 임명한 김정헌 위원장이 MB와 유인촌의 코드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표적 감사로 해임됐다고 알려져 있다. 그 코드란 무엇일까? 다른 위원장인 오광수를 보면 안다. 문화예술위가 지원하는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단체에 지원 조건을 내건다. 데모하지 말 것. 데모에 나간 적 있거나 데모할 성향의 사람이나 단체에는 이미 지원을 다 끊었다. 문화예술은 정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이명박과 유인촌의 코드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문화예술
거슬러 올라가면, 문화예술이 정치에 길들여진 건 김대중과 노무현 시절이다. 문화예술을 끔찍히 사랑했던 김대중과 노무현은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군사 정권에 숨죽이던 재야 문화예술인들을 양지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문화예술을 정치에 복종시키진 않았지만, 정치에 길들였다. 문화예술의 정신과 철학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약해졌다. 지원없이 문화예술하려니 나이도 들고 힘도 들어 데모 안하고 지원받는 문화예술인들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건 김대중과 노무현의 코드다.
 
그러면 사회주의 문화예술은?
역사적 사회주의의 경험에서 초기 혁명기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혁명을 지지하고 열광했다. 사회주의 정치가 문화예술을 길들이거나 복종시키려 하기 전에 먼저 지지하고 열광했던 그 한때는 좋은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 가진 못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가 인민군 종군기자였다가 중도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당이 강요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사회주의 정치도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와 다르지 않았다.
 
문화예술의 정치
김정헌 위원장이 법원으로부터 해임 효력정지 결정을 받은 것과, 그래서 다시 출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다. 법원의 결정은 이명박과 유인촌의 정치가 패배했다는 의미지만, 만신창이가 된 문화예술위와 김정헌 위원장이 복원된 것은 아니다. 다시 출근하는 것은 그가 앞으로 문화예술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떠나 문화예술인의 정치를 시작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문화예술이 더이상 정치에 휘둘리게 둘 수 없다는 표현이다.
정치가 문화예술하는 것과 문화예술이 정치하는 것의 차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볼셰비키에 가담했던 시인 마야꼬프스키는 혁명기에 이런 시를 남겼다. “러시아의 정치여, 영원하라! 예술이여, 정치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라!” 그리고 그는 예술의 자유가 사라졌을 때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길, 자살을 선택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21세기가 되어 사회주의자들도 문화예술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사회주의 정치가 어떻게 문화예술할 것인지의 단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이제 문화예술을 배우고 익혀 문화예술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문화예술가를 죽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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