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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회주의는 부패를 극복했는가?

“물신화된 당 신격화와 만연한 대리주의가 부패의 원인”

치열한 냉전체제 하에서 ‘철의 장막’ 너머로 드러난 사회주의 국가의 실상은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적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이 68세대의 신좌파처럼 이미 1989-91년 국가사회주의체제/진영의 붕괴 이전에 이미 새로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진압, 1968년 체코침공, 1980년 폴란드 연대노조 탄압 등 충격적 사건들이나, 스탈린 사후 중소 수정주의논쟁과 국경분쟁 외에도,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과 그에 연루된 광범한 부패는 당시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강력한 의문을 품게 하는 요소였다.
특히 국가사회주의체제의 해체 이후, 광범한 다수 민중의 소망과는 달리 후진적 사회주의가 선진적 스웨덴 복지모델로 대체되지 않았다. 오히려 광범한 부패의 구조화-확산과 더불어 제2세계의 남미화 현상이 러시아-동유럽에 정착하면서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광범한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국제적 반부패 NGO인 투명성 인터내셔널(Transparency International)의 자료에 의하면, 자본주의로의 재편입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또한 공산당정권과 자본주의가 중국식으로 기묘하게 접합된 중국사회에서 부패는 줄어들기보다 더욱 증가했다고 한다.
그러면 부패의 원인은 무엇이고 왜 20세기 사회주의는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가? 매춘과 더불어 부패는 인류사회의 역사에 항상 존재했던 정치사회적 현상이었다. 근본적으로 부패는 권력관계와 긴밀히 연관된 부산물, 아니 주산물 중의 하나였다. 자본주의를 뛰어넘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부패는 근본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무력간섭과 경제봉쇄로부터 시작된 경제적 고립은 일국사회주의의 이름 아래 국가-당지배체제와 관료주의를 낳았고, 그에 기생하는 특권층(이른바 노멘클라투라)을 창출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의 부패는 노멘클라투라의 특권과 이 기득권세력에 편입하려는 위계적 질서 속에서 싹텄다. 그런 의미에서 부패는 미완의 민주주의를 배경으로 관료주의에 편승해서 사회주의 사회의 세포에 기생하게 되었다. 이는 소련의 경우 스탈린시대와 흐루시쵸프시대, 브레즈네프 시대와 고르바쵸프 시대 등 완고한 보수적 체제와 개방적 개혁체제를 넘나들면서 부패구조 역시 확산되거나 위축되는 경향을 보였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이 주도한 반부패 캠페인과 그에 따른 전시적 처벌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에 내재한 모순과 부패구조에 대한 당지도부의 인식과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로의 경도에 의해 왜곡된 사회주의의 근본적 혁신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전시행정의 대증요법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의 창의적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관료주의가 부패의 온상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물신화된 당 신격화와 만연한 대리주의는 사회주의를 민중주체의 원칙으로부터 이탈시켜 다수의 인민의 수동화시키고 부패구조에 동조하거나 편입되도록 만든 근본원인이다. 반부패 법제도적 장치 외에도 각성한 민중의 지속적 감시와 민중주체의 반부패투쟁이 없이 어떻게 부패척결이 가능했겠는가?
따라서 민중의 전위로서 당에 의한 대리주의가 아니라 민중주체의 민중권력, 대의적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관료주의를 배제하는 혁명적 민주주의만이 반부패투쟁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다. 20세기 사회주의가 붕괴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리주의-관료주의에 의한 광범한 부패구조의 재생산과 부패구조에 대한 불철저한 투쟁은 국가사회주의를 사회주의적 이상으로부터 더욱 벌어지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21세기 사회주의운동/혁명이 유념해야 할 핵심적 교훈이기도 하다.
 

원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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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은 민주성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쌍용자동차 노조는 ‘강성노조’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번 집행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히려 노사협조적인 노조였을 따름이며 당연히 그들 조합원의 투쟁 경험과 전통도 미미했다. 그런데 무엇이 쌍용자동차 노조와 그들 노동자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그저 우연일 뿐인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 작동했던 것인가?

 

이에 대한 진단과 분석은 앞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한 가지는 앞서 말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민주노조운동에 만연한 관료주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관료주의 

 


 

 

87년 이전의 민주노조운동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와 적어도 전노협 때까지만 해도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관료주의는 등장하지 않았거나 매우 미미해서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건설 이후에도 민주노조운동 내의 전반적 분위기는 관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의 탄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일으킨 착시 또는 착각 현상이다. 탄압 속에서도 관료주의는 싹틀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 하나는 노선 분화와 관료주의 문제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은 문제이다. 관료주의의 등장과 그 위험성을 정치경제적 차원이나 노동조합이 갖는 이중적 성격에서 찾는 대신에 노선 문제나 개인의 자질과 성향 문제로 이를 대체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듯이 지금 민주노조운동 내에는 관료주의 문제가 어느 새 극복/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뿌리 깊게 퍼져 있다. 이번에 나타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상층 집행부의 행태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다. 노조 공식 집행부의 행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장조직 활동가들, 특히 그나마 가장 전통과 경험이 오래되고 조합원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아직도 갖고 있는 자동차 완성사 노동조합의 현장 활동가들조차도 이번 투쟁 과정에서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을 거의 조직하지 못했다. 

 

원인과 이유 역시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대표적인 하나는 그들 역시 조합원들로부터 노동조합 공식 집행부와 별 다른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거나 인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현장 활동가들 역시 이미 상당 부분 상층 집행부가 보이고 있는 관료주의적 행태를 부지불식간에 조합원들에게 노출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조합원들로부터 신임과 신뢰를 잃었다. 그들이 비록 개인(개별)적으로는 이번 투쟁에 열심히 연대/결합했더라도 자기 사업장 조합원을 조직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관료주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은 현장조직 활동가를 포함한 상층 집행부 경험을 갖고 있는 제한된 층이 돌아가면서 단위노조와 상급노조의 집행부를 독식하고 있다. 그 누구도 쉽게 이 두께를 뚫거나 깨기 어려운 상태다. 비유하자면 부르주아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회전문 인사 현상이 민주노조운동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경험과 태도, 그리고 의지와 역량이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진정한 지도력으로 인정된다면 문제는 훨씬 덜 심각할 수 있다. 그러나 노선과 정파를 떠나 그런 경우는 찾기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사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집행부는 노동자대중과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이번에 절차적으로는 연대투쟁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실제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과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조합원은 따르지 않았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력을 노동자대중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민주성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은 노동조합운동에서 민주성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크게 일깨워 주었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가능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번 투쟁을 이끈 쌍용자동차 노조에 관료주의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투쟁 과정에서의 내부 상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관료주의가 작동했더라면 점거(옥쇄)투쟁이 끝난 지금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거나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노조 집행부와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 사이에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았던 조합원과 투쟁을 하다가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미리 공장 밖으로 나온 조합원 사이에서도 그 어떤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특히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합원들로부터 작은 불만의 목소리라도 새어나왔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투쟁 전 과정에서 민주성이 관통/관철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짚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알다시피 이번 투쟁을 담당한 쌍용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객관적으로 대단한 활동가들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쌍용자동차 노조 역사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쌍용자동차 노조 집행부는 그 어떤 활동가들보다 정말 훌륭히 투쟁을 이끌었다. 이들의 의지와 역량이 갑자기 생성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 역시 투쟁을 이끌면서 그 과정에서 비로소 훈련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봐야 한다. 집행부와 조합원 사이에 거리가 발생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믿음과 서로 의지하는 마음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관료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한 것은 그들 내부에 민주주의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민주노조운동에서 보여 지고 있는 관료주의 문제는 단순히 지도부의 교체나, 나아가 정파의 경쟁만으로는 돌파하기 어렵다. 철저한 민주성의 회복을 통해서만이 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렇다. 노동자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다. 민주성이 관통/관철되지 않고는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과 같은 완강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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