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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기 민주노조운동의 진단과 나아갈 방향]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강성노조로는 더 이상 안 된다”라는 표현은 강성발언인가, 약성발언인가? 반면에 “민주노총과 금속연맹은 생명과도 같은 존재니 비판보다는 애정과 관심을 가져주십”사던 쌍용차 한상균 지부장의 호소는 강성발언인가, 약성발언인가? 사진출처 민주노총


“강성노조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쌍용자동차 점거(옥쇄)파업 투쟁이 끝나자마자 민주노총 위원장은 그 첫 일성으로 ‘강성노조로는 더 이상 안 된다’, ‘상급단체에게 교섭권을 위임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 지적하고 나왔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발언이라고는 실로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발언이다. 

 

이에 앞서 금속노조 위원장은 투쟁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백분토론을 준비하느라 투쟁 현장을 지키지 못했다. 물론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준비를 잘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지만 그 전에 금속노조가 이번 투쟁에서 보여준 행태에 대한 강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었던 때문이다. 

 

이 두 이야기는 지금 민주노조운동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예일 뿐이다. 이번의 경우도 지난 10여 년에 걸쳐 축적된 민주노조운동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지 이번 과정에서 새로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다. 민주노조운동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다가 특히 이번 쌍용차 투쟁에서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한 역할을 보면서는 노동자대중들로부터 단순한 실망을 넘어 커다란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민주노조운동(민주노총)을 혁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선과 정파와 관계없이 모두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혁신은 고사하고 상태는 갈수록 악화만 되어왔다. 그 때문에 최근 들어서는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반향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저 선거 때 등장하는 일종의 단골 메뉴 정도로 전락했다.

 

그렇다보니 그 어느 세력, 그 어느 정파도 독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야말로 어찌할 수 없는 커다란 짐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노선과 정파를 떠나 민주노조운동을 혁신한다는 것은 이미 늦어버린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모두에 의해 공공연하게 얘기되고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민주노조운동 자체가 민주노조운동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연대노조도, 민주노총 분리도

 

민주노조운동 내부적으로 이러한 현상, 이러한 상태에 대한 대응 또는 해결책으로 이미 얘기되고 있거나 모색되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른바 사회연대노조다. 이것이 말하는 핵심은 이런 것이다. 기존 민주노조운동은 정규직/대공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 지키기에 머물러 있거나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비정규직(불안정고용)노동자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가능성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민주노총을 분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다. 이것이 말하는 핵심적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민주노조운동 상층지도부의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노선과 세력이 이미 민주노조운동의 전통과 역사를 져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이 계속되는 한 지금의 상태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먼저 사회연대노조는 사회연대전략의 연속 위에서 제출되고 있다. 사회연대전략은 기본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투쟁을 통해 그 해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의 양보를 통해 해소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은 이를 계급형성전략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것은 계급분열/계급해체 전략에 다름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과 책임을 자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분리 의견은 아무리 선의로 이야기해도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거나 다른 문제로 바꾸려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이 역시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의 현실에서 정파노조는 시도되기 어렵다. 산별노조조차 정착되기 어려운 조건에서 정파노조는 더욱 성공하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 경험으로도 정파노조 역시 노조의 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난 상태다.

 

길은 있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 혁신은 끝내 불가능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길은 있다. 아니 최소한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 투쟁에서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말했다. 우리가 눈 크게 뜨고 보아야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로 쌍용자동차 투쟁이 이끌어 낸 단결투쟁/연대투쟁의 가능성이다. 쌍용자동차 투쟁은 ‘총고용 보장’ 요구에서 알 수 있듯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쌍용자동차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근래 들어 가장 강력하게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축적된 현실에 비하면 이 두 측면 모두 근래 보기 드문 일이다. 따라서 그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성급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특수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면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은 바뀔 수 없다.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다시 활성화시키는 방향에서 문제의 해결을 찾아야 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노조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아마 이번 투쟁에 직접 연대하거나 결합하지 못한 전국 노동자대중의 생각과 심정도 결코 이번에 투쟁한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들어 소통하고, 설득하고, 조직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고, 가장 빠른 길이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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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은 민주성을 시급히 회복해야 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쌍용자동차 노조는 ‘강성노조’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와는 정반대로 이번 집행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히려 노사협조적인 노조였을 따름이며 당연히 그들 조합원의 투쟁 경험과 전통도 미미했다. 그런데 무엇이 쌍용자동차 노조와 그들 노동자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는가? 그것은 그저 우연일 뿐인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 작동했던 것인가?

 

이에 대한 진단과 분석은 앞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더라도 여기서 한 가지는 앞서 말하고자 한다. 그건 바로 민주노조운동에 만연한 관료주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관료주의 

 


 

 

87년 이전의 민주노조운동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87년 노동자대투쟁 시기와 적어도 전노협 때까지만 해도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관료주의는 등장하지 않았거나 매우 미미해서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았다. 민주노총 건설 이후에도 민주노조운동 내의 전반적 분위기는 관료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국가와 자본의 탄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 일으킨 착시 또는 착각 현상이다. 탄압 속에서도 관료주의는 싹틀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또 하나는 노선 분화와 관료주의 문제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은 문제이다. 관료주의의 등장과 그 위험성을 정치경제적 차원이나 노동조합이 갖는 이중적 성격에서 찾는 대신에 노선 문제나 개인의 자질과 성향 문제로 이를 대체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듯이 지금 민주노조운동 내에는 관료주의 문제가 어느 새 극복/해결하기 어려울 만큼 뿌리 깊게 퍼져 있다. 이번에 나타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상층 집행부의 행태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다. 노조 공식 집행부의 행태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현장조직 활동가들, 특히 그나마 가장 전통과 경험이 오래되고 조합원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을 아직도 갖고 있는 자동차 완성사 노동조합의 현장 활동가들조차도 이번 투쟁 과정에서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을 거의 조직하지 못했다. 

 

원인과 이유 역시 하나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대표적인 하나는 그들 역시 조합원들로부터 노동조합 공식 집행부와 별 다른 차별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거나 인정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현장 활동가들 역시 이미 상당 부분 상층 집행부가 보이고 있는 관료주의적 행태를 부지불식간에 조합원들에게 노출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조합원들로부터 신임과 신뢰를 잃었다. 그들이 비록 개인(개별)적으로는 이번 투쟁에 열심히 연대/결합했더라도 자기 사업장 조합원을 조직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관료주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은 현장조직 활동가를 포함한 상층 집행부 경험을 갖고 있는 제한된 층이 돌아가면서 단위노조와 상급노조의 집행부를 독식하고 있다. 그 누구도 쉽게 이 두께를 뚫거나 깨기 어려운 상태다. 비유하자면 부르주아 정치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회전문 인사 현상이 민주노조운동에서도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경험과 태도, 그리고 의지와 역량이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진정한 지도력으로 인정된다면 문제는 훨씬 덜 심각할 수 있다. 그러나 노선과 정파를 떠나 그런 경우는 찾기가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사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집행부는 노동자대중과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이번에 절차적으로는 연대투쟁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실제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과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작 조합원은 따르지 않았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력을 노동자대중이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민주성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은 노동조합운동에서 민주성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크게 일깨워 주었다. 쌍용자동차 투쟁이 가능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이번 투쟁을 이끈 쌍용자동차 노조에 관료주의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투쟁 과정에서의 내부 상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이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관료주의가 작동했더라면 점거(옥쇄)투쟁이 끝난 지금쯤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거나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노조 집행부와 투쟁에 참여한 조합원 사이에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공장에 남았던 조합원과 투쟁을 하다가 중간에 여러 가지 이유와 사정으로 미리 공장 밖으로 나온 조합원 사이에서도 그 어떤 불협화음이 있었다는 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특히 마지막까지 남았던 조합원들로부터 작은 불만의 목소리라도 새어나왔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것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투쟁 전 과정에서 민주성이 관통/관철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짚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알다시피 이번 투쟁을 담당한 쌍용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객관적으로 대단한 활동가들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쌍용자동차 노조 역사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쌍용자동차 노조 집행부는 그 어떤 활동가들보다 정말 훌륭히 투쟁을 이끌었다. 이들의 의지와 역량이 갑자기 생성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들 역시 투쟁을 이끌면서 그 과정에서 비로소 훈련되는 과정을 겪었다고 봐야 한다. 집행부와 조합원 사이에 거리가 발생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믿음과 서로 의지하는 마음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관료주의가 발을 붙이지 못한 것은 그들 내부에 민주주의가 압도적으로 더 많이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민주노조운동에서 보여 지고 있는 관료주의 문제는 단순히 지도부의 교체나, 나아가 정파의 경쟁만으로는 돌파하기 어렵다. 철저한 민주성의 회복을 통해서만이 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그렇다. 노동자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 또한 그렇다. 민주성이 관통/관철되지 않고는 이번 쌍용자동차 투쟁과 같은 완강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민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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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칼럼]상상을 뛰어넘는 국가폭력, 무기력한 민주노조운동

20일 자살을 시도했던 쌍용차 노동자의 유서가 공개됐다. 유서에는 한 노동자에게 공권력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폭력의 실상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언론 보도를 접하면서 많은 이들이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동시에 너무도 잔인한 국가의 폭력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던 노동자운동의 현실에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노동자에게 작업장은 생명과 같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절규가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은 해고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죽여 놓고 다시 부관참시라도 하듯 2번, 3번 죽음으로 몬다.
지난 77일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권과 자본의 잔인한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최루액, 공기총, 급기야 제2의 용산참사를 각오한 특공대 투입은 그야말로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1시간 간격으로 틀어대는 선무방송과 경찰의 강제진압을 훈련하면서 내는 소음, 음식물과 의료품 반입을 막는 것도 모자라 자행된 단전단수는 물리적 진압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었다. 
그래놓고도 ‘불법폭력’을 운운하며 ‘법과 원칙’을 들이대는 시점에서는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한국사회에, 야만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이 자본주의에 다시 한번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노동운동의 현실이다. 정권과 자본의 살인적 공격 앞에서  쌍용차 동지들의 싸움은 영웅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달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쌍용차 동지들은 민주노총의 요구인 총고용보장을 외치며 사력을 다한 투쟁을 하면서 “안시성”의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다. 고립된 성 앞으로 15만 아니 80만의 지원군이 달려와 연대의 함성으로 쌍용차 공장에 승리의 깃발을 펄럭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쌍용차노동자들은 총고용보장 투쟁지침에 의해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대리전을 치루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싸워야 할 노동자들은 평택에 없었다. 휴가를 반납하고 모여든 정치사회단체들의 힘은 부족하기 짝이 없었고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깃발과 소수 간부들뿐이었다. 모두들 쌍용차가 무너지면 자동차산업 전반으로, 전체 노동자들로 자본의 융단폭격이 가해질 것이라고 떠들어대면서도 그에 걸맞은 투쟁은 선언만 존재할 뿐 조직되지는 않았다. 소위 중재단은 고립된 성에 갇혀 용산참사와 같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본과 정권의 태도에 절망한 노동자들에게 항복문서를 가져다 줬다. 눈물을 머금고 협상에 도장을 찍은 노동자들의 심정을 어찌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은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한 노동자들에게 전망을 제시하기는 커녕 더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다. 보수언론의 강성노조, 외부세력 구도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운운하고 있고, 강성노조로는 안된다며 자본가들의 만들어놓은 법과 제도를 넘어서는 노조운동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것도 민주노조운동을 대표한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대목에서는 그저 20년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의 역사 앞에 한없이 부끄럽기만 할 뿐이다. 
자살을 시도했던 노동자는 경찰의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수사에 분노하기보다 그 말을 믿고 허위진술을 했던 자신을 탓하며 생을 마감하려 했다. 그 노동자 역시 파업에 함께 했던 사람이다. ‘함께 살자’고 절규했던 그 노동자에게 허위진술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77일간 총자본과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했던 쌍용차 노동자들과 총노동의 전국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 인해 잔인하고도 잔인한 저들의 폭력 앞에 방패하나 없이 세워두고 있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민주노조운동의 전투성, 연대성 복원이 절실해진다. 민주노조운동이, 전체변혁운동이 지독할 만큼 아파야할 것 같다. 

양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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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혁신, 현장에서 다시 시작하자

성폭행, 도박, 사기, 비리, 횡령… 민주노조에서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민주노총에서, 민주노총 사업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조직재정을 늘리기 위해 시작했다는 사업이 재정비리로 드러나더니 노조간부 지위를 이용하여 돈을 챙기고, 민주노총 간부가 조합원에게 성폭행을 자행하고 현장에서 벌어진 도박 때문에 조합원이 자살하고 다른 사람들은 구속되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듯이 자본의 썩은내가 더 많이 나지만 노동조합이 ‘겨 묻은 개’라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과 자본간의 힘을 바꿔내고 군대방식으로 노동자를 취급했던 현장관리를 분쇄해냈던 노동자들이 왜 달라진 것일까. 법의 제한된 범위에 갇히지 않는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냈던 노동조합이 왜 이리 무력해진 것일까. 신자유주의와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노동자들은 개인주의로 변모하고 살아남기 위해 자기 경쟁력을 키우는 것에 매달리고 있다. 노동조합 지도부는 법의 테두리 안에 조직을 가두고 현재 조건을 지키는 것에 치중하며 투쟁보다는 실리와 성과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현장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주노조 정신을 팔아먹는 노조 관료들도 있다. 민주성은 형식적 투표행위로 동일시되고, 자주성은 재정의 열악함이라는 말로 대체되고, 연대성은 산별노조라는 형식으로 탈바꿈하고, 투쟁성은 피해최소화에 덮여지고, 계급성은 사회적 합의주의에 밀려나고 있다. 마지막 기회 신자유주의가 분쇄되지 않으면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운동은 가망이 없는 것일까? 노조 관료로 변신하여 직장 생활하듯 노조운동을 하는 사람들만 갈아치우면 되는 것인가? 징계조항을 만들어서 규정에 의해 엄밀하게 징계만 하면 민주노조는 다시 부흥할 수 있나? 지금 무너져가는 민주노조운동의 핵심지점은 ‘활동가들의 변화’이다. 노조 관료, 조합원들에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말로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선동할 ‘활동가’들이 있어야 한다. 현장활동가는 노동조합 간부로 있든, 평조합원으로 있든, 노조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든 모습은 달라도 어디서든 존재한다. 그런데도 현장이 침체되어 있고, 민주노조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활동가들의 자기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현장분위기라는 말에 스스로 압도되어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활동가들 스스로 민주노조 운동의 전망을 가지고 사회변혁 투쟁을 자신있게 실천하며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개인주의에 빠져드는 조합원이나 관료로 군림하는 노조간부는 활동가들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 얼굴에 이제 책임져야 할 때이다. 올해가 민주노총을 혁신하여 계승해 나가야 할 조직으로 만들지, 극복해야 할 조직으로 남게 될지 선택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전평, 전노협, 민주노총까지 이어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활동가들의 손에 달렸다. - 심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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