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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8/09
    오후네시-아멜리노통(1)
    자일리톨
  2. 2004/08/09
    조지오웰 - 박홍규
    자일리톨
  3. 2004/08/09
    사회계약론
    자일리톨
  4. 2004/08/09
    [펌]강유원(2)
    자일리톨

오후네시-아멜리노통

 

현대인의 고독과 소통의 단절을 날카롭게 표현해 낸 소설이다. 밤새 읽으면서 너무 재미있었다. 소설의 초반에는 은퇴한 노년의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소설의 1/3이 넘어서면서 스릴러로 바뀌고, 종국에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살아가야할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인들 대다수가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아볼 생각도 없이 그저 생에 대한 집착만을 가지며 살고 있다는 데 있다. 이유는 없고 집착만이 남은 삶. 그럼에도 생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에게 살아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건 폭력일 듯 하다.

 

이 책의 팔라메드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병원에서 만난 베르나데트와 결혼한 걸로 봐서 나는 그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세상의 편견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생의 의미를 상실한 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희망을, 공격적인 태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팔라메드 베르나르댕. 주인공이 마지막에 취했던 극단적인 행동은 팔라메드에 대한 전적인 공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소설의 중간, 에밀과 쥘리에트의 어릴 적 침실에서의 추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뿌옇게 처리된 과거회상용 화면의 따뜻함이 내 뺨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만약 누군가의 추억에서 빌려온 장면이라면 난 그 사람이 너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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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 박홍규

 

'오웰탄생 100주년 기념'이라는 다소 과장된 문구로 광고된 이 책은 박홍규 교수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인간 오웰'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오웰을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투사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탁월한 반공주의자(?)의 모습으로도 그리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만 하는 인간의 권리를 위해 담담하게 자신의 생을 살았던 인간 오웰의 모습을 그린다.

조지 오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60년대부터 시작된 군부독재정권이 반공과 냉전이데올로기를 조장하는데 이용함으로써 오웰하면 반공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기는 하지만, 그는 스페인 내전에 지원병으로 참전하기도 했던 좌파적인 아나키스트였고, 산업주의에 반대하며 전원생활로 회귀하기를 원했던 공상적인 자연주의자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오웰의 성장기부터 그의 삶을 추적해 들어간다. 인도식민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버마식민경찰로서 식민주의자의 길을 걷다가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되돌리는 과정. 작가로서의 활동과 전체주의에 대한 그의 일관된 반대노선 등.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며 인간을 위해 살아가고자 했던 오웰의 모습을, 휘청대는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방향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외국어 번역본이 아닌 탓에 문장의 호흡과 어휘 등 모든 면에서 쉽게 읽힌다. 이 책이 많이 읽혀 오웰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일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참고 - 금금님의 '코끼리를 쏘다' http://blog.jinbo.net/kumkum/?p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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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

 

이처럼 얇은 책을 이처럼 오랜 시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 책은 몇년전에 정치학과 전공선택 수업에 꼽싸리 끼어 들었던 정치사상사 과목의 발표용으로 읽었던 책이다. 독일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된 강사가 맡은 수업이라서, 수업은 처음의 2시간을 빼놓고는 학생들이 '마키아벨리부터 헤겔'까지의 원전 중 하나를 선택하여 충실히 읽어오고 그것에 대해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고 발표내용을 서로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학을 4년간 다녀오면서 발표수업은 많았지만, 이처럼 원전에 대해 독해를 하고 그 내용을 발표하는 수업은 처음이었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호응 속에서 서로 얻은 것도 많았던 알찬 수업으로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다.

 

후기산업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에서도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더욱이 일목요연하게 편집된 여러 개론서들, 특히나 ‘한권으로 읽는...’등의 부제가 붙은 얄궂은 개론서 한권을 읽고, 그 책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사상을 다 이해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지금 세상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사상서들의 저자들은 그들이 발을 딛고 있었던 세계의 문제점을 무엇이라고 보았으며, 그 문제들을 어떻게 체계화시켰는지, 그리고 대응책은 무엇이었는지를 철저하게 뒤쫓을 수 있는 방법은 역시나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루쏘를 중고등학교 때 배운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사상가로서만 단편적이고도 막연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사회계약론자로서 분류되는 홉스와 로크, 몽테스키외, 루쏘의 주장 사이에 거의 공통점이 없음을 알고는 정말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다음은 사회계약론에 대한 짧은 서평이다.

 

루소는 15년간 <정치제도론>의 출간을 기획하였으나, 그가 <사회계약론>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구성되게끔 만드는 근원적인 사회계약에 관하여 글을 남기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사회계약론>이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15년간의 그의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으며, '사회계약' 이외에 루소가 생각한 올바른 정치와 공동체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정치사상사의 영역에서 홉스, 로크,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가들과 함께 '사회계약론자'로 분류된다. 즉, 그들은 인간들이 근원적인 사회계약을 통해 정치공동체를 구성했다고 주장한 점에 있어서는 동질적이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을 고찰해 보면 그 이외의 공통점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에 큰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홉스는 절대군주정을, 로크는 부르주아 대의제 민주주의를, 루소는 직접민주주의를 옹호하였으며, 인간의 (정치적)원시상태, 사회계약의 필요성 등에 있어서 그들의 의견은 큰 차이를 보여준다. 그들의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면서 루소의 저작을 읽는다면 더욱 더 큰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루소의 저작에서 우리(특히 남한에서)에게 가장 유명한 말은 '영국 국민들은 그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정작 그들은 투표가 끝난 후 쇠사슬에 묶인 노예의 처지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그는 직접민주주의를 갈구한다. 대의제민주주의에 안주하며, 정치적 무관심에 길들여져 가는 인간들의 나태와 무관심을 질타한다. 이것이 비단 루소 당시의 사람들만 해당되는 말일까? 건전한 정치적 관심과 직접적인 참여만이 민주주의의 생명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은가?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읽다보면, 그가 어쩔 수 없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대적 한계 또한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의 전체주의적인 성향이나 국민을 완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계몽의 대상, 새로운 인간형으로 거듭나야 할 대상으로 규정짓는 루소의 모순적인 사고방식... 과연 그 시대의 특징이라거나 갖은 정치적 핍박을 받아야 했던 루소의 비극적인 인생의 특징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분명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현대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그리 흥미로운 저작은 분명 아니다. 현대의 인문사회과학도서만큼 각 장에서 각 주제에 대해 명확하게 정리된 결론을 제시하지도 않을 뿐더러 했던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기도 하고, 잘못된 자연과학적 예시나 현대의 독자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고대의 사례를 나열하는 등 그의 사회계약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몰려오는 잠을 내쫓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을 제외한다면, 이 책을 어렵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무엇이건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며 또 독자적으로 사색하려는 독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자본론 서문을 paro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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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강유원

 

'책'은 강유원의 문필가로서의 면모와 본래 전공인 철학을 바탕으로한 탄탄한 논리가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서평집이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선뜻 밝히지 않았지만 주로 서평을 할때 다루는 논리의 근거, 대안을 찾을때 헤겔과 마르크스에 기댄다는 것,그리고 우리나라의 이념적 편향을 지적하며 좌파들의 분발을 촉구한다는 점에서(사실 이건 고른 이념 스펙트럼을 바라는 일부 자유주의자들도 지적하고 있기는 하다.) '좌파'라고 보더라도 무방할 듯 하다. 비단 그러한 논리나 글의 구성으로 파악되는 것말고도, 강유원은 좌파가 지니고 있는 일종의 '꼬장꼬장함'을 지니고 있다. 예전에 김규항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쓴 에세이에서 느껴졌던, 혹은 서준식의 글속에서 느껴졌던 그런 꼬장꼬장함 말이다.(좀더 멀리나가자면 진중권에서도 언뜻언뜻 발견되는) 그런 '꼬장꼬장함'은 강유원 특유의 문체의 간결함에서 비롯되는 것 같기도 하고,그가 비판을 가할시에 어떠한 이념,나이,국가를 초월해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꼬장꼬장함의 태도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나는 알수가 없다. 다만 그 태도는 그의 글을 보다 날카롭고 차갑게 만들어 준다. 그가 서평을 쓰는 이유는 책의 가치를 분별해주는 것이라 언급했고, 그 분별을 가능케하는 것은 감성이 아닌 이성이니 강유원의 문체나 분위기는 서평집의 목적에 상당히 부합되는 것이 틀림없다.

...어설픈 좌파를 자칭하면서, 아니 그렇기에 그러한 '꼬장꼬장함'을 지니지 못한 나로서는 그의 그러한 태도가 부러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럽다. 예전에 고종석이 그의 에세이에서 수구세력과 강준만과 박원순과 같은 개혁세력에 대한 김규항의 비판의 정도가 비슷한 것에 대해 버거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나도 그와 비슷한 부담을 강유원의 서평에서 느끼는 것 같다. 이를테면 조한혜정이나 홍신자를 비판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행동의 불일치를 강한 어조로 비판할때 그 나는 그 비판의 정도가 부담스럽다. 물론 지식인이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일치를 보여야 한다는 강유원의 발언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그도 언급했듯이, 그 생각과 행동의 일치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나는 조한혜정이나 홍신자의 발언들이 설령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공감하는 편이다. 그 발언은 설령 비현실적이더라도 이 나라의 진보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사람들의 닫힌 의식을 깨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그러한 '말하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위치(교수라는 안정된 직장, 명망있는 예술가)에 안주하고 아무 발언도 안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직무유기라고 난 판단한다. 물론 강유원은 그들이 그렇게 된다면 지식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자격도 없다고 하겠지만.

...사실 그것은 내 안의 자유주의자적 기질에서 오는 불편함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빌미로 강유원의 글쓰기,그의 작업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실상, 오늘날 좌파들이 지닌 문제점들은 '꼬장꼬장함'의 과다보다는 지나친 타협(다른 말로 하면 지나친 리버럴함)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창'에서의 에세이, 그리고 문화일보의 '서평' 그외에도 선보이는 철학작업을 통해 그는 점차 자신의 '꼬장꼬장함'을 보다 폭넓게 그리고 자유롭게 선보이는 것 같다. 그러한 태도가 언제까지나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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