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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20
    방콕이야기 - 전대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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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4/08/25
    연애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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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4/08/09
    배를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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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4/08/09
    세계화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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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04/08/09
    멕시코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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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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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4/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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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08/09
    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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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4/08/09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박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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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08/09
    한강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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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이야기 - 전대완

 

 

이번 추석때 태국여행을 가기로 해서 읽어본 책이다. "태국"내지는 "방콕"으로 검색해 봐도 걸리는 책은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타자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증거다. 미국이나 유럽에 대한 번역서, 에세이류는 쏟아져 나오면서도 정작 중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에 관련된 책은 거의 나오지 않는 기형적인 학문구조...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부터 중남미에서 간행되는 일간지까지 구독하면서 타자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였다는데 우리는 도대체 뭐하자는 얘긴지 모르겠다. 타자에 대한 연구나 공부가 없다면 결과는 뻔하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굽실대거나 혹은 쇼비니즘적 태도로 남을 무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추석에 태국에 간다니 나오는 반응은 한결같다. "조심해서 잘 즐기다 오라"는거다. 그런 말을 하며 한쪽눈을 찡끗하는 분도 있다. 이들의 의식은 태국->팟퐁->성매매로 잘도 이어진다. 그들에겐 그것이 자동연상작용인 것이다. 1세계 관광객들이 한국을 그딴식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의 기분은 어떨까? 우리도 남들에게 얘기해줄 우리의 것들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가슴아픈 역사과정이기도 할테고, 우리의 문화유산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왜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타자를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까. 그들도 타인들에게 얘기할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을텐데...

이번 여행의 목적은 버마와 관련된 일이지만, 그러한 이유에서 여행전에 태국과 관련된 3권의 책을 샀다. 여행매뉴얼인 헬로태국, 태국에 대한 역사 개론서인 태국사, 그리고 간단한 에세이인 이 책이다. "태국사"보다는 읽기 편할 것같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썼다. 현직외교관이 쓴 책이라서 그런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시각이 엿보여 조금 뭣한 면도 있었지만, 이런 외교관이 많아진다면 확실히 대한민국 외교부는 '그나마' 나은 조직이 될 거다.

이 책은 태국의 간략한 역사, 태국의 문화유산, 태국인들을 만나고 살아가면서 느낀 단상들을 3-4페이지 단위의 꼭지에 담은 에세이집이다. 南國 특유의 느긋한 정서를 가진 태국인들의 모습과 외세의 침략에도 현명하고도 유연한 중립외교노선으로 평화를 유지한 그들의 저력은 감탄할만했지만, 엄청난 빈부격차와 엘리트 중심의 교육제도, 그리고 그로인한 사회적 차별이 불교특유의 윤회사상과 입헌왕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완화되고 있다는 대목에 가서는 좀 짜증이 났다.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환경은 동남아시아를 이해하는 주요한 단초가 될 것같다. 짧다면 짧은 여행기간동안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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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6-70년대 중남미문학의 황금기 이후 다소 침체되었던 중남미문학을 부흥시킨 소설가가 루이스 세풀베다란다. 형이 읽고서 추천해 주길래 퇴근하자마자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그의 문체는 이전의 중남미 소설의 특징인 마술적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쉽고 평이하며 남미의 지역적 색채를 잘 담고 있는 듯 하다. 또한 갖가지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들을 연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유기적으로 잘 결합되어 소설의 마지막을 향하여 맹렬히 치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뜻 제목을 보고 "이거 또 번역한 놈이 책 팔아먹으려고 제목부터 고쳤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제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다. 그리고 책장을 몇장 넘기다 보니 왜 이런 제목을 붙일 수 밖에 없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연애소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노인"이라... 대단한 은유다.

 

칠레의 군부쿠데타에 반대해 반체제운동을 벌이다 투옥당한 경험이 있고, 이후 망명길에 올라 환경운동, 민주화운동 등에 투신했던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친자연적인 원주민문화를 말살하며 전지구를 약탈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1세계중심의 세계체제를 비판하며 그는 무엇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길인지 되묻는다. 마르케스는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사람들을 감동시킴으로써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세풀베다는 대단한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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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

 

이 책을 읽고나서 "퍼슨웹"과 이성형씨가 인터뷰한 내용을 살펴봤다. 이성형씨는  우리가 남미에 대한 두가지 상이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포퓰리즘, 군사쿠데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자원부국임에도 후진국으로 전락해 버린, 피해가야 할 모델로서의 남미가 하나의 시선이라면,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역사과정과 강렬한 문화적 색채의 남미가 또 하나의 시선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미를 이해할 수 있는 조그마한 파편에 불과할 뿐 남미 전체를 설명해 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 밖의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마치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머릿속의 기억을 왜곡하여 자신들만의 논거로 들이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대학교  때 "칠레전투"를 보고 "체게바라 평전"을 읽고서는 남미라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남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자극이 되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중남미는 실제의 그곳과는 많이 틀릴 것이다. 그것을 지적해 준 위의 이성형씨의 말은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 글을 읽다가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른다.

 

이 책 "배를 타고..."를 읽을 때도 그랬다. 이 책은 중남미 4개국, 그러니까 쿠바, 페루, 칠레, 멕시코를 다루고 있지만, 재미있게 읽혔던 부분은 쿠바, 칠레 부분이었다. 인디오들의 전통과 문화유산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많은 페루는 읽는 내내 지루했고 잘 와닿지도 않았다. 마지막 부분인 멕시코도 그랬다. 멕시코 혁명기 벽화운동을 다룬 장을 제외하고 마야문명이니 떼오띠우아깐이니 하는 부분들은 내내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던 것 같다. 대신 칠레의 쿠데타, 광산지대의 노동운동이 칠레 현실정치에 미친 역사적 영향,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의 현상황 등은 너무나 재미있게 다가왔다.

 

어차피 중남미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그들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집단적인 경험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내 구미에 맞는 이미지와 정보만으로 그들을 재단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억울해 할까. 자신들만의 역사와 삶의 방식을 인정해 달라고 주장하는 멕시코 치아빠스주의 반군을 유럽의 좌파지식인들이 자신들 나름의 (실패한 68혁명에 대한 향수어린)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나도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성형씨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라틴아메리카 전문가다. 앞으로도 정치경제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문학 등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박식함이 우리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편견을 부수는데 기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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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요즘 들어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다. 요즘 들어 내가 하는 일은 중소기업들에게 돈 빌려주는 일이다. 그들은 나한테와 돈을 빌려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기업체의 사업성에 대해 얘기하다가 얘기가 쉬 풀리지 않으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종착지는 여기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수출하는 건 애국하는 것 아니냐? 난 애국자다. 그런데 왜 나한테 대출을 안 해주려고 하느냐..." 이 국가주의, 애국주의의의 광기라니. 도대체 나의 업무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란 말인가. 내 일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내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비인간적인 공장에서 열심히 미싱을 돌리며 착취를 받고 있을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걸까? 미국을 비롯한 1세계 국민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좋은 품질의 옷을 입을 수 있게끔 해주니까 그들에게 가치가 있는 일인걸까?

 

김영삼이 세계화를 부르짖은지 10년 정도가 흐른 것 같다. 국내의 저부가가치의 생산시설은 동남아, 중국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국제적인 분업체계(1.5세계인 한국은 1세계시장의 고객들이 편안히 싼값으로 소비할 수 있게끔 제3세계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국제적인 "마름"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도 공고히 다져지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변했다. 그동안 외환위기가 터졌고 확실히 내 주변사람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는데, 어째 이들은 자신들이 돌리는 쳇바퀴를 더욱 빨리 밟아대려고만 한다(어렸을 적 공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아침 8시 30분에 출근해서 7시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TV를 보시다 잠이 들었지만, 지금 내 주변에서 그런 생활을 하는 아버지들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다).

 

이 책은 이러한 세계화시대의 기업에 포커스를 맞춰 다룬다. 즉 이 책의 주제는 초국적기업의 정체와 폐해, 국민국가와의 관계 설정, 있는 자들의 대변인인 초국적기구, 그 저항과 대안이다. 이 책은 초국적 자본이 활개를 치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맞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대안에 대한 부분은 빈약하다. 물론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며, 지금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 이 책은 세계화와 초국적기업에 대한 알찬 개론서임에는 틀림없다.초국적기업은 그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 사람들 머릿속에 박아놓은 이미지처럼 깨끗하고 정다운 이웃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노동착취를 전세계적으로 행하는 약탈자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러한 그들의 행동을 막을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또다른 숙제이다.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문고본 같은 이런 책들이 훨씬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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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혁명사

 

요즘 사람들의 삶을 이토록 팍팍하게 만들어 버린 "신자유주의"라는 녀석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먼저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이 진행된 라틴 아메리카에 관련된 책을 몇 권 구해서 읽고 있다. 그런데 책 속에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관련된 사례가 나올 때마다 이해가 곤란한 부분이 많아 그쪽과 관련된 재미있는 역사책을 먼저 찾아보던 도중 눈에 띄었던 책들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초에 진행된 멕시코혁명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를 혁명의 각 주체세력들을 중심으로 각 사건의 원인, 전개과정 및 그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는 '기사본말체'방식을 사용하여 정리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일반인들에게 자칫 생소할 수 있는 주제와 배경 때문에 독자들이 쉬 흥미를 잃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때문에 1910~1940년이라는 긴 시간을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은 그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었던 듯 하다.

 

저자의 지적대로 멕시코의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의 그것과 유사한 인물과 사건을 찾아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십년간 총과 칼로 집권한 냉혈한 독재자가 있고, 권력에서 배제되자 단순한 지배세력간의 교체를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우기는 웃지못할 과두 부르주아들이 있으며, 모두를 위한 진정한 정의와 평등을 외치며 피를 흘리다 죽어간 노동자, 농민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일들이란 사람과 관련된 일들이기에, 세상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만 다를 뿐 우리 모두 비슷한 경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치 무협지를 읽듯 숨가쁘게 책장을 넘기며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 들었던 대체적인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3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정동안 사람들이 당했을 죽음과 고통 때문에 가슴이 아팠고, 그러한 희생을 치르고도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버린  그 결과에 절망했다. 특히나 에밀리아노 싸빠따가 혁명의 동지랄 수도 있었을 까란사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멕시코혁명의 전과정동안 혁명의 의미와 그 방향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수줍은 이상주의자' 에밀리아노 싸빠따. 그는 실패했지만 그의 이상은 7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다. 그걸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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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이 책은 스페인내전에 대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것 같다. 오웰은 스페인인들과 세계로부터 온 의용군들의 순수한 혁명적 열기, 스탈린의 배신과 이로 인한 혁명의 좌절을 자신이 의용군이 되어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1936년 7월 프랑코를 위시한 파시스트들이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키자 스페인의 좌익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은 총을 들고 이들을 막아낸다. 이에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스트 정권은 프랑코를 지원하고, 소련과 각국의 혁명적 좌익세력들은 스페인 인민전선을 지원하게 되면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의 성격으로 발전한다. 전쟁 초반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파시스트를 막아낸 스페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을 요구한다. 수백년간 내려온 지주와 부르주와세력을 몰아내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공장을 접수하여 진정한 사회주의혁명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들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의 안보를 보장받기를 원했던 스탈린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지원하되, 사회주의혁명은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른바 ‘일국사회주의노선’으로 알려진 스탈린주의는 혁명을 배반했던 것이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혁명세력들(POUM, CNT)과 스탈린의 조종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시가전 이후, POUM과 CNT, 그리고 의용군들은 “파시스트의 간첩”,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비밀경찰에게 끌려가 투옥되거나 총살당한다. 게다가 좌익탄압에 이용됐던 세력은 왕당파의 사설경호대와 다를바 없던 치안대(la guardia)와 비밀경찰이었다.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오웰도 겨우 스페인을 탈출하여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국제정세와 스페인내부의 사정에 따라 혁명노선은 달라질 수도 있다. 농업국가에 가까웠던 스페인의 산업적 특성,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면 러시아혁명때와 같이 간섭전쟁을 도발하겠다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본주의국가들의 위협 등등을 감안했을 때, 스탈린의 선택이 현실적으로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만명의 국제의용군들과 스페인노동계급은 순수한 혁명적 열정 하나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파시스트들과 싸웠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다. 40년이 넘은 딱총을 들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수류탄 깡통을 들고 죽음의 공포와 추위, 굶주림과 맞서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그들의 등뒤에서 칼을 꽂았다. 이후 스페인은 결국, 파시스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이 책을 읽고,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을 다시 봤다. 국제의용군으로 참전한 한 영국인의 눈을 통해 스페인내전을 그린 역작이다. 전사한 동료들을 땅에 묻은 의용군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에서,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의 군대가 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다. 현실 앞에서 그들의 순수한 혁명적 열정은 짓밟혔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의 실패는 이후의 세대들에게 희생이란 무엇이고, 숭고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후 시간이 되면 스페인내전이 유럽인들의 사고에 미친 영향에 대해 공부해 보고 싶다. 96년 겨울, 시간을 때우려고 “세이예스(dis-moi oui)”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나이든 남성 의사와 그 의사를 좋아하는 천방지축 십대 여자아이가 등장하는 통속적인 연애영화였다. 근데, 그 여자애의 할아버지로 스페인내전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그 사실을 평생 자랑스러워하는 고집불통의 노인이 나온다. 스페인내전이 “고집불통의 노인”으로 기억되는 건 어째 좀 씁쓸하다.


스페인내전을 다룬 영화로 "마리뽀사"와 "로르카"를 추천한다. "마리뽀사"는 나비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어린 아이 몬쵸의 성장영화인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옹호한 선생님을 빨갱이, 무신론자로 몰아야 했던 스페인의 비극을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그리고 있다. 스페인의 자연과 시적인 대사가 너무나 아름답다. "로르카"는 스페인내전 당시 의문사한 천재시인 로르카의 행적을 뒤쫓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영화로 앤디 가르시아의 오버가 약간 느끼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무리없이 잘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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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이 책은 1906년 러일전쟁 이후부터 45년 일본의 패전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남만주철도회사(이하 만철)”의 역사를 다룬다. 저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주제는 만철은 일본제국(식민지역을 포함하여)을 경영하기 위한 두뇌집단이었으며, 그 영향은 패전이후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이른바 1940년체제)를 통한 일본의 경제적 부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러일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만철을 식민지배를 위한 거대기구로서 위치지은 인물은, 고다마 겐타로와 고토 심페이였다. 이들은 만주나 조선보다 일찍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대만에 확고한 식민지배의 기반을 다져 놓았던 인물이었다.


만주의 주재배작물인 대두와, 그 탄맥이 너무나 거대한 나머지 획득초반 채굴방법을 결정하는데만도 엄청난 시간을 끌었던 푸순탄광, 그리고 유럽을 향해 열린 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이 셋만 놓고 보아도 만주는 일본으로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던 셈이며, 이의 효율적인 관리체제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식민지배를 위한 시급한 과제였다.


따라서 만철은 그 내부에 자원탐사, 경제, 산업개발, 치안, 안보 등의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역량을 지닌 두뇌집단을 필요로 하였고, 이는 결국 만철조사부의 창설로 이어지게 되며, 만주사변이후 관동군, 만주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 속에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전문연구기구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저자는 좁은 지면에서도 만철 속의 인맥관계에 지나치리만큼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있는데, 전후 일본 국철총재로 신칸센의 건설을 추진했던 소고 신지, 수상을 역임하게 되는 기시 노부스케, 고토 심페이의 조카이며 한일회담당시 외상을 지냈던 시이나 에쓰사부로 등 만주그룹이 전후 추진했던 정책들이 만주에서의 전시(戰時) 경제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논증하고 있다.(박정희, 서영훈, 정일권 등 남한내 만주인맥들에 관해서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보라)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두가지 점이 흥미롭고 놀라웠다. 첫째는, 당시 오가미 스에히로 등 맑시즘에 경도된 일군의 이단적 경제학파들이 일본본토를 떠나 만철조사부에서 이른바 ‘만철 마르크스주의’를 꽃피워 나름의 경제정책으로 입안시켰으며, 이것이 전후 일본의 관료주도형 통제경제체제(1940년체제)를 확립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맑스는 공산주의 이후의 생산양식이나 사회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경제연구는 자본주의를 분석하여 그 붕괴의 필연성을 밝히는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현실사회주의국가들에서 취했던 경제정책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에 가깝다라는 주장이 더욱 타당성을 얻는다. 차문석의 “반노동의 유토피아-20세기 산업주의에 굴복한 사회주의”에서 소련의 경제정책은 다름아닌 1차대전시기 독일군부에 의한 통제경제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후발 현실사회주의국가들도 동일한 경로를 밟았다. 결국 지금까지 존재하며 서로 죽일 듯 체제경쟁을 해왔던 현실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그 본류는 동일하다는 것이고, 완전경쟁에 의한 laissez-faire는 미시경제학교과서에나 존재하는 이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일본인들의 치밀한 기록의 문화다. 만주국 시절 일본이 남긴 만주관련 자료들은 그 양의 방대함이나 질의 치밀함을 놓고 보더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사료를 찾을 수는 없다는 말을 예전 근대 동아시아관련 수업을 수강하며 들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 실례를 찾을 수 있는데, 만철 경제조사회가 개편되어 산업부가 되기 전 4년 반 동안에 1,882건의 조사 업적을 정리해 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술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연간 400권 이상, 한달에 30권 이상, 즉 하루에 한권 이상의 출판물들이 인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피땀 위에 그들만의 백년왕국을 일구기 위한 몸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너무나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책은 분량이 적어 읽는데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지만, 저자의 의도대로 당시 만철이라는 방대한 조직을 여러 시점을 통해 바라보려 했기 때문에 언뜻 책내용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며, 당시 만주 및 일본본토에 대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이는 쉬 흥미를 잃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또한, 저자가 나름대로 당시 갖은 착취와 핍박을 받았던 재만 중국인, 한국인들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주의와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간간이 엿보여 일본인 저자의 한계가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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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

 

최근에 짬이 나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시 읽고 있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하루키를 좋아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으로 접했던 것이 상실의 시대였고, 그때 받았던 충격은 상당했던 듯하다.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동아리에는 나보다 4살 위의 매력적인 선배누나가 있었는데, 그가 내게 권해주었던 소설이 바로 ‘상실의 시대’였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이 책을 권했던 그도 다소간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만큼 하루키소설의 문체와 분위기는 젊은 층에게 강렬하게 다가올 이유가 충분했다. 그 후로 하루키의 소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의 소설은 여름날 밤 원샷으로 읽는 게 제 맛인 까닭에, 대학교 1학년의 여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밤에는 그의 책을 읽었고, 낮에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시절은 하루키의 소설로 내 기억에 남아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태엽감는 새, 댄스댄스댄스, 하루키 단편선 등등

 

그의 소설에는 항상 허무함이라는 냄새가 깊게 배어있다. 그의 소설 한켠에서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찾아냈던 기억이 있을만큼 그의 소설에서는 항상 죽음과 허무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인간은 그가 겪었던 시공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기 마련인지라, 6-70년대 일본의 전공투는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전공투는 미일안보조약문제가 발단이 되어 6-70년대 일본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으나, 너무나 어이없는 한편의 드라마로 끝나버린 극단적인 방식의 일본 학생운동으로 68년 세계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이었던 하루키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이 때문에 늦깍이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내 전공투세대의 위치다. 유럽의 68혁명세대가 정치, 교육, 문화계에 대거 진출하여 극단적인 냉전대립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개량하는, 체제내의 새로운 목소리이자 활력으로 작용한데 반해, 일본의 전공투세대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를 추종하던 戰前세대와 풍요로운 물질적 성장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들인 신인류세대 사이에 끼여 제도권에 발을 붙일 수 없이 떠도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2차대전과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의 부재,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맹종은 결과적으로 80년대의 일본을 극단적인 우경화의 길로 들어서게끔 만들었다. 하루키의 경험은 이러한 일본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열망했던 이상과는 정반대의 길로 들어선 일본의 모습 앞에 그는 한없는 상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그의 문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지만, 나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우리나라에 번역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기묘하지만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생시절 친구인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세상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포기한 채 살아간다. 혼자서 수업을 듣고, 혼자서 식사를 하고, 어디서건 혼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등 그는 무인도에 떨어뜨려 놓아도 혼자서 능히 살아갈 수 있을 법한 自足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와타나베가 그리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미도리에게 “봄날의 곰만큼 네가 좋아”라는 기상천외한 고백을 할 줄 알며, 주변의 매혹적인 사람들(레이코여사, 하쓰미, 나가사와 등)을 자신에게 끌어당길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지녔다. 그가 혼자인 이유는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람들로부터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생명체이고, 생명체에게 죽음이란 어떤 위대한 사상이나 신념으로도 뛰어넘을 수 없을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無인 죽음과 죽음 사이에서 정해진 만큼의 시간을 허가받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 젊은 시절, 신념의 좌절과 허무함을 맛보았던 그였기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천착했고, 결국 그는 “죽음앞에 선 인간”이라는 무오류의 명제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허무함에 빠진 주인공의 생존의 증거는 욕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섹스(!)에 대한 욕망. 중간중간에 섹스장면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서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당신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결말부분, 레이코 여사와의 포만감이 깃든 몇 번의 섹스 이후, 와타나베는 빗속의 공중전화에서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미도리는 어디냐고 계속해서 묻지만, 와타나베는 대답하지 못한 채 흐느낄 뿐이다. 난 이 장면에서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너무나 기뻤다. 사랑과 애정이 깃든 섹스를 통해, 와타나베는 비로소 자신이 궁극적인 無가 아니라,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고, 자신의 둘레에 쳐둔 벽을 허물고 능동적인 소통을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하루키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니다. 내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난 하루키가 동시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주제의식)는, 상실의 시대 이후 더 나아간 게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저 소설의 플롯과 등장인물들을 약간 변형시키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시킨 것 밖에는 없지 않나 싶다. 오히려 과장된 그의 기교가 독자들로 하여금 주제를 읽어내는데 더 난해함을 던져주고 있지 않은지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문학평론가 김명인씨는 어느 글에서 “이성이 사라지면 소녀 취향만 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고 썼다. 나는 위의 경구와 하루키를 동시에 떠올리며 무릎을 쳤다. 어제 친구가 “해변의 카프카”를 빌려주기로 했다. 그 책 속에서 하루키의 더 나은 생각의 단편들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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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 박천홍

 

‘철도로 돌아본 근대의 풍경’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근대성이라는 것이 내면화되었는지에 관한 연구서다. 이 책은 근대문명 그 자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철도가 우리의 삶에 미친 영향을 당시의 공문서, 신문기사, 문학작품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함으로써 근대민족의식, 제국주의, 공간, 시간, 풍속의 변화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저자인 박천홍이 제시하는 자료는 책 말미의 참고문헌목록만 보더라도 방대하며, 곳곳의 글의 문맥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인용된 사료는 명쾌하고도 적확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이 책을 준비했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책의 곳곳에서 저자의 고민과 고된 작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상당히 왜곡된 우리 근대화 과정의 문제다. 저자는 근대화과정에서 “서구의 근대화가 자신들의 패권을 지구적으로 관철시키는 과정이었다면, 비서구권에서는 타율적으로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되는 고난의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특히, 당시의 조선은 서구의 패권주의와 일본제국주의라는 이중적인 억압을 겪어야만 했기에 더욱 고난에 찬 근대화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근대화는 전근대사회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근대적 합리성(자본의 증식이라는 절대적인 목적을 위한 합리성)을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서구의 경우, 자신들의 전통의 재해석이라는 과거와의 끈을 통해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조선의 경우는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 전근대사회와의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증기기관이라는 동력은 대량생산을 위한 생산력의 집적(대공장제도)을 가능하게 했으며, 철도는 상품과 원료, 기술을 놀라운 속도로 실어나르며, 전지구를 단일한 시장으로 만들었고 세계를 자본주의적인 분업체계로 재편했다. 이는 구래의 농촌공동체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농촌에서 밀려난 대규모의 인구는 도시빈민으로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부르주와지의 주도세력으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가상적 실체인 민족과 근대국민국가의 성립, 국민교육제도와 징병제, 신문, 소설과 같은 서사문학의 유행, 표준시(mean time)제도의 확립, 봉건적 신분제의 철폐, 근대도시의 성립, 박람회 등을 통해 새로운 착취구조를 은폐하고 그들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러나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다시 한번 왜곡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철도노선의 건설을 위해 민중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고, 민중의 생산물은 철저히 싼 값으로 수탈당해야 했으며, 철도건설에서 구도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일본인 주도의 새로운 식민도시를 건설하여 전통사회와의 단절을 의도하였으며, 빈부에 따른 도시공간의 분할이 조선인과 일본인이라는 국적 구분에 의해 다시 한번 분할되는 차별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근대성에 관한 수많은 문헌을 통해 우리의 근대화 과정의 문제를 치밀하게 논증한다. 근대적 시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등장하기도 하고, 철도의 삶과 죽음의 갈림길적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이인직의 ‘은세계’가 나오기도 하며, 근대의 성격을 논하기 위해 베네딕트 앤더슨, 칼 맑스, 발터 벤야민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라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근대와 관련한 새로운 저작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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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조정래

 

조정래의 한강을 읽었다. 그의 소설 중에 처음 읽은 소설이었다. 평소 그의 민족주의적인 시각을 그리 탐탁지 않은 눈길로 봐온 나였기에 태백산맥과 아리랑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고, 그 분량에 있어서도 부담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한강을 읽게 되었던 이유는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루어진 6-70년대를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라는 내 나름의 시각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이문열의 변경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문열을 싫어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은 채 먼지에 싸여 중대본부에 나란히 꽂혀있던 그 12권의 책들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그때는 시간을 어떻게든 흘러가게 만들어야 했던 군대의 말년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문열의 변경은 6-70년대를 조망하는 나름의 시각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기 보다는 작가가 왜 수구반동세력의 돌격대가 되는 길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지리한 변명을 풀어서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들었다. 또한, 그 시절을 살아갔던 인물 군상들을 바라보는 이문열의 시각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은 감정수준에서 끝났을 뿐, 그에 대해 객관적인 비판을 날카롭게 가할만큼 정리된 생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정래의 한강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에서 작가 조정래는 4.19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인물 군상들이 세상과 맞부딪치며 살아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려나가고 있다. 그 중에는 권력과 가진자들에 빌붙어 서서히 정신적으로 몰락해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어떻게 해서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조선팔도와 세계 각지에서 스러져갔던 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통해, 근대화, 산업화, 공업화라고 일컬어지는 6-70년대의 경제개발의 주역은 저 수구꼴통들이 들먹이는 다까끼 마사오(박정희)가 아니라 농토에서 내몰리며 서울의 공장에서, 그것도 부족해 베트남의 밀림, 독일의 광산, 사우디의 사막에까지 보내져 저임금과 고단한 노동에 혹사당해야 했던 이름없는 민초들이었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천두만, 천칠성, 나삼득, 나복남, 나복녀, 박보금, 김광자, 문태복, 전묘숙,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아름다운 청년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태일...

 

대학교 1학년 때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의 남한의 역사를 다룬 개설서인데, 그때는 각 학회나 동아리에서 갓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이 책을 읽히고는 했었다. 그 책의 표지에는 구와바라 시세이라는 일본인 사진작가가 찍은 4.19혁명 5주년 기념시위 사진이 실려 있었다. 빗속에서 대학생처럼 보이는 일군의 남루한 사람들이 연출하는 우울하고도 경건한 침묵시위장면이 흑백의 스틸사진에 담겨있고, 그 뒷면을 넘기면 “지금 50대에 이르는 이들은 재벌 기업의 간부나 고위 공무원이 되는 등,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다.”라고 씌여 있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한강을 읽은 뒤 바라보는 그 사진은 의미심장하다. 유일민, 유일표, 이규백, 허진, 이상재, 원병균, 박준서 등이 바로 그들이 아닌가. 현실과 부딪치게 되면서 날개를 하나씩 꺾여 버린 채 삶의 무게와 개인적, 사회적 욕망 속에 하나씩 허물어져가던 나의 아버지 세대들. 그들에게 품게 되는 나의 감정은 매우 복합적이다. 동정심, 측은함, 배신감, 허무함 그리고 경이로움. 이들에 대한 평가는 두고두고 우리 그리고 후세의 몫이 될 것이다.

 

조정래의 한강을 통해 정말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인물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역사책에 나오는 딱딱함과 건조함으로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나름의 삶의 무게를 지닌 향기가 나기도 하며, 때론 악취가 나는 주체로 다가왔다. 그것만 하더라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의 혹자는 조정래의 한강이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 비해 너무 도식적이고 짜임새가 없는 것 같다고 비판을 하는가 하면, 지면상의 한계로 유신 이후의 소설의 결말부분이 너무 설익게 끝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포항제철의 박태준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일견 국가주의적인 시각인 엿보인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20여년간의 삶을 이토록 짧은 분량에 리얼하게 그려낸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조정래는 실로 큰 일을 해 낸 것이고, 우리는 나름의 시각을 통해 독해해볼만한, 우리시대를 조망해 볼 기회를 주는 중요한 텍스트를 손에 넣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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