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은 취향이 아니라 저항이다

식물성의 저항 2007/02/23 02:59
제가 2006년 2월 월간 '사람'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esaram.org/webbs/view.php?board=esaram_12&id=17&page=1 에 원문이 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인데, 찾아보니 제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았네요. 저는 최근에 진행된 논란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이런 내용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뒤늦게 올립니다. ---------------------------- 채식은 취향이 아니라 저항이다 조약골 | 피자매연대 활동가 내가 채식을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2003년 10월부터 시작했으니 만 2년이 조금 넘은 셈이다. 아직은 초보 채식인이지만 내가 부딪힌 차별은 수도 없이 많았다. 회식자리에서, 술집에서, 뒷풀이에서, 회의할 때마다 나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차별이 무엇인지 차츰 알게 되었다. 밖에서 음식을 사먹어야 하는 경우가 꽤 있는 나는 매번 식당에 들어갈 때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 귀찮은 요구를 해야 한다. 고기와 계란과 어패류 등 모든 동물성 식품은 빼고, 국물 역시 육수가 아니라 맹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나는 강렬한 고기 맛보다는 식물성 재료만으로 만들어낸 단순하고 깊은 맛을 더 선호하지만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는 아니다. 채식을 하는 몇 가지 이유 한국의 채식인들 가운데는 성인병이나 비만을 염려해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제일 많다. 사료를 먹고 사육되는 가축들과 양식장에서 생산되는 물고기들은 엄청난 환경호르몬과 항생제로 범벅이 되어 있다.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장식 사육체제에서 동물이 병들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즉 이윤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업자들은 화학물질을 마구 살포한다. 이렇게 키워진 화학물질 덩어리를 먹는 것이 인간 자신의 건강에 좋을 리 없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개인의 건강을 위한 채식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이 세상 전체가 오염과 파괴로 썩어가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둔 채 자신만의 건강을 돌본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채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하게 설명한다면 사회적,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으로 나는 채식을 한다. 내가 채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2000년 무렵이었다. 당시 한국에 와있던 호주 출신의 활동가 친구를 통해 처음 채식인이 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채식을 한지 8년이 넘은 상태였는데, 정치적 실천의 하나로 채식을 시작한 그의 삶 속에는 생명에 대한 깊은 존중이 체화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는 바퀴벌레도 모기도 죽이지 않았다. 방에 모기가 있으면 그는 손으로 잘 감싸서 창밖으로 내보내주었다. 당시엔 이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채식을 하는 것은 좋지만 꼭 저렇게까지 동물을 사랑해야 하나? 나는 특별히 개나 고양이를 좋아하지도 않고, 내 피를 빨아먹고 도망가는 모기를 손바닥으로 압사시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지금의 나는? 약간 변하긴 했다. 채식을 하면 생명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이 생겨나기도 한단다. 사회적 변화를 위해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전지구적인 자원의 불평등한 배분, 물 부족, 기아, 환경오염, 화석에너지의 낭비와 고갈, 이에 따른 분쟁의 분출과 군대를 통한 폭력적 해결 등의 산적한 문제들을 푸는데 채식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사회에서 육식은 자본집중적인 대량생산을 통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모든 인류가 먹기에 충분한 양이다. 하지만 생산된 곡물의 37%가 가축을 먹이기 위해 전용된다. 그리고 지구의 환경을 보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열대우림이 매년 영국 땅덩이만큼 없어지는 이유도 인간이 육식을 유지하기 위해 소와 돼지 등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1kg의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의 양은 같은 무게의 감자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물보다 200배가 많다고 한다. 1명이 육식을 멈추면 자원이 낭비되지 않아 22명이 채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끝없이 이어진다. 책도 많이 나와 있고, 인터넷에서도 간단하게 검색해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육식은 자원낭비적인 생활방식이다. 세계에서 가장 고기를 많이 먹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는 인도에 비해 8배가 많다고 한다. 미국이 오늘도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하며 이라크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이런 낭비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육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히 세상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채식을 하며 나타난 변화들 그런데 과연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고도 사람은 튼튼하게 살 수 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 같은 마을 사람들의 질문에 대해 가까운 곳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를 가리키며 ‘저 소는 평생 풀만 먹고 살아왔지만 뼈도 튼튼하고 힘도 세지요’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지면 어쩌나? 염려 말라. 채식을 시작하면 입맛은 변한다. 그래도 고기 씹는 맛을 원한다면 콩단백으로 만든 고기대체식품들이 있으니 그것을 먹으면 된다. 채식은 내 입맛을, 내 몸과 감수성을 변화시켰으며, 내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이 같은 변화가 맘에 든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갈까? 내가 하루하루를 겪어가는 이 체제는 경쟁과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이에 익숙해진 내 몸을 의식적으로 다른 길로 이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양심에 따라 육식과 자동차 사용과 필요 이상의 소비를 거부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상의 경험들이 각인되어 차츰 변화되어가는 내 몸을 다르고 새롭게 다듬기 위함이다. 채식은 개인의 몸을 변화시키며,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킨다. 가족의 누군가가 채식을 시작한다면, 직장의 누군가가 채식을 시작한다면 채식이 단순히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우리가 맺고 있는 육식소비 위주의 사회관계에 대한 저항이며, 이를 변화시키려는 구체적 실천임을 알게 된다. 톨스토이도 채식을 했지만 히틀러도 채식을 했단다. 개인들이 채식을 실천하는 것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채식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학교와 노조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된 채식 위주의 급식 조례제정 운동을 펼쳐야 한다. 채식인들이 환경, 생태, 평화,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더 많은 활동가들이 채식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운동들이 서로 그물처럼 얽히게 된다면 나는 거기서 진정으로 튼튼한 저항의 그물을 엮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간섭받지 않으며 소박한 자립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이런 저항의 그물을 짜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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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3 02:59 2007/02/23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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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3 03:01 Modify/Delete Reply

    참, 이 글의 제목 '채식은 취향이 아니라 저항이다'는 2006년 1월에 있었던 인권활동가 대회에서 달군이 했던 '유명한' 말입니다. 제가 그대로 베껴서 제목으로 사용을 했지요.

  2. 달군 2007/02/23 18:22 Modify/Delete Reply

    으엉..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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