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로보트가 아니다

경계를 넘어 2007/06/20 15:28
날갯죽지가 아프다.
어제 너무나 무거운 짐들을 날라서 그런가보다.
 
요즘 피자매연대 일로 바쁘다.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었냐마는 요즘들어 부쩍 더 그런 것 같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버거운 일들.
다행히 새로운 활동가들이 많이 들어와서 천군만마(踐群滿瑪)를 얻은 듯한 기분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주먹구구식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까 새로운 사람이 활동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같이 일을 나눌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다.
그냥 내가 해왔던 것처럼 이 일 저 일 생기는대로 맡고 맡기는 식이다.
체계가 없고 임시방편적이다.
 
물론 난 이런 모습을 좋아하긴 하지만, 문제는 이런 무정형의 모습에 익숙해지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같이 활동을 하고 싶다고 왔을 때 그 사람에게 뭔가 같이 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또는 같이 활동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줄 수가 없다면 (보람이라는 감정은 빼고 말이다) 애써 찾아온 사람은 실망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하고 있는 일도 바쁜데, 여기에다가 일을 체계화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무겁다.
 
요즘에는 면융 주문이 많이 들어온다.
이제는 이미 완성된 달거리대보다 재료를 주문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만큼 대안생리대 만드는 법이 널리 퍼졌다는 뜻도 되고, 우리가 활동한 결실이 드러나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하겠다.
그래서 내심 뿌듯한 마음을 품고 동대문종합시장 원단가게로 향했다.
 
마침 마지막으로 남은 잔꽃무늬 면융이 한 롤 남았다고 하기에 그것을 몽땅 짊어지고 동대문에서 서대문 피자매 사무실까지 버스를 타고 왔다.
한 롤에 담긴 천의 무게와 양은 다양한데, 어제 들고 온 녀석은 125마 짜리다.
저울이 없어서 면융 125마가 얼마나 무거운지 재볼 수는 없지만, 어깨에 그 놈을 올려놓고 터벅터벅 사람들로 붐비는 길을 따라 시장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오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어깨에 마치 마귀라도 한 마리 올라앉아 이리가라 저리가라 명령을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인도 이야기가 떠올랐다.
길에서 빼빼 마른 노인을 만나 개울을 건네주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 말이다.
가벼울 줄 알았던 그 노인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사람은 당장이라도 그를 내려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고된 육체노동이었다.
피자매연대 일을 하면서 육체노동을 하는 날도 제법 많았다.
재료를 사가지고 오거나 달거리대 배달을 하거나 안감을 나르거나 할 때, 또는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종이나 컴퓨터나 가구나 기타 등등 잡다한 물건들을 나를 때 내가 직접 몸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게 말했다.
 
너라는 육체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나 참 고생을 많이 한다고.
나도 어쩔 수 없다고.
간편하게 택배를 시키면 편하겠지만 그러면 돈이 많이 든다고.
그러니 이해하라고.
 
나는 성별화된 노동에 반대한다.
어떤 일은 남성이, 어떤 일은 여성이 해야 한다는 사회통념 같은 것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는 짐을 나르는 육체노동이든 글을 쓰고 홈페이지 관리를 하고 재정상황을 확인하고 배송을 하는 등의 정신노동이든 사람들 연락하고 챙기고 하는 감정노동이든 밥 하고 커피를 타고 청소하는 등의 가사노동이든, 심지어 컴퓨터를 고치고 프로그램을 짜는 등의 전문적인 노동까지 모조리 하게 된다.
일은 많고 힘에 부칠 때는 그런 온갖 종류의 노동을 모두 하는 내 자신이 불쌍하기도 한데, 대부분은 그게 나에게 도움이 된다.
단순한 일이었다면 금방 싫증이 났을 것이다. 
덕분에 하루 네 시간 노동하겠다는 결심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총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오늘도 깨닫고 있다.
 
난 로보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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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0 15:28 2007/06/20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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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지 2007/07/19 21:40 Modify/Delete Reply

    체계화보다, 저마다 상상력을 발휘해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어. 무거웠구나. 덜어 나누고 싶은데. 마음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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