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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 참세상의 칼럼에서 소개한 <돌 속에 갇힌 말>

 

'돌 속에 갇힌 말'을 풀어내는 사회변혁의 연금술사들

 공모적 비판과 좌파적 신세한탄에 맞서는 권력, 책임성, 희망의 정치를 
 
 
 너부리 neoburi@jinbo.net 
 
 여성 독립 다큐멘타리 감독 나루의 <돌 속에 갇힌 말> 디비디를 구해 다시 보았다.


나루 감독이 다시 기록하고 있는 87년 대선 구로구 투표함 부정사건에 점철된 국가권력의 폭력은, 거의 20년 전의 일이고 그 사이 정권이 네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것은 87년이후 수년이 지나고 그때와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경험한, 폭력의 과거에 대한 내 흐릿한 기억때문이 아니다. 이 낯설지 않음은 오히려 최근의 살인적 국가권력의 폭력에, 이 폭력의 연속성에 직접적으로 기인한다.


우리는 이 소중한 한 편의 다큐멘타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소위 '공화국'의 이름으로 '개혁'을 자칭함으로써 들어선 노무현정권 하에서 자행되고 있는 경찰, 사법 폭력을 통해서, 왜 이런 폭력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깨달아야 하는 상황에 있다.


지금 여기 우리는, 자기 자신의 입장과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정치행위가 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이 권력으로 인지되고, 생존을 위한 목소리는 '폭력'으로 매도되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두 농민의 죽음으로 한해를 마감하고 있다. 한 시위에서 두 농민의 죽음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에 비판의 형식을 띤 공모만 하고 있는 '우리'가 다시금 배우는 것이라고는, 저항, 생존권 투쟁있는 곳들에 권력은 바지런히 따라다님시롱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공모자다. '우리'의 비판 역시 이런 공모의 일부다. '우리'의 '날선' 비판이 "나는 이에 대해 할 말을 했다"는 무력하고 무책임한 자위의식에 머무르고 '우리'의 온당한 '분노'가 (좌파적) 신세한탄에 머무른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비겁한 공모를 가리는 알리바이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날선 비판과 온당한 분노로 '무장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알리바이나 (자가발급) 면죄부가 아니라, 그 비판과 분노를 집단적인 책임역능으로 끊임없이, 무엇보다 끈질기게 발전시키는 것일 터이다.

 

<돌 속에 갇힌 말>은 87년 구로구 투표함 부정사건 농성장에 있었던 감독이 약 15년이 지난 후에서야 작업을 시작하여 몇 년간의 힘겨운 자료조사와 관련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 사건을 다시 기록하고 있는 다큐멘타리이다. 감독에게 10년이 훌쩍 넘는 이 세월은 아마도,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시민들의 몸부림과 국가폭력이 동시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이 감독 개인에게 남긴 상처와 트라우마를 용기있게 다시 대면하고 다른 시각들에서 성찰해 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을 터이다. 관객인 우리에게 이 긴 시간은, '우리'의 비판과 분노가 (외관상 새로이 들어선) 지배집단의 입맛과 이해관계에 맞게 포용·억제되는 사이비 변혁의 역사적 시간이자, '우리'가 지향하는 변혁과 이를 위한 '우리'의 비판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정치적 무능력으로 노정된 시간이기도 하다.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혁명은 언제나 '장구한 혁명'이다.)


다시 말해, 나루 감독과 이 다큐멘타리 둘 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대로, 비판과 분노가 책임성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공모가 된다. 이것은 이 다큐멘터리 내내 시사되는 것이자,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면, "눈은 올 때는 보기 좋지만 다음 날은 추적추적한 것이 됩니다"라는 식으로 역사를 보는 개혁 신데렐라들의 대변왕 유시민에 대한 나루 감독의 섬세한 비판 방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폭력성과 일사불란한 조직성을 핵심으로 하는 '권력'과, 이에 대항하는, 흩어져 있는(scattered) 개인들의 (집단적) 투쟁, 그라고 그 과정이 남긴 죽음과 상처, 최악의 집단 불행으로서 망각. "폭력적" 시위문화 이데올로기의 여전한 강력함. 87년과 2005년 말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다르지가 않다. <돌 속에 갇힌 말>이 공모와 침묵의 묘석을 외롭고 힘겹게 들어올림으로써 나온 목소리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들려줌시롱 우리에게 촉구하는 바대로, 너무 빨리, 너무 확실히 잊혀져 가는 사건들, 그것을 점철한 국가/사법폭력, 그라고 (훗날) 아무도 모르게 된 이 폭력이 개인들의 삶에 남긴 깊은 상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들은 끊임없이 다시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의 이러한 기억은 실제로 사회에 위협적이라서, '우리' 자신에게도 가해져 올 만한 위험부담을 스스로 감수하는, 그렇기 때문에 힘있고 정말 위협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우리'의 비판은 권력, 책임성, 희망에 관한 것이자, 희망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책임하에 사회적으로 건설하는 것과만 관련된다. 하여 <돌 속에 갇힌 말>이 실천하고 있는 대안적인 기억과 끊임없는 재기억의 제식으로 무장한 '우리'의 변혁 정치는, 핵심지배집단의 간택(pickup)을 은근슬쩍 욕망하면서 '개혁'을 영악하게 레토릭으로만 써먹음시롱 개혁과 변혁에 관한한 태업/파업만을 일삼는 열린당 및 소위 중도/개혁 우파 신데렐라들의 몸사리기와는 가장 거리가 멀고, 또한 '진보'를 표방하는 마초들의 위험감수 없는, 여성 및 소수자 억압적인 안전한 비판, 그리하여 무능력한 정치를 족친다.


하여, '우리'는 필요하다면 죽을힘을 다해서, 예컨대, '죽은' 조승수들을 더욱 해방적이고 새롭고 증강된 조승수들로 살려내며, 농민들과 강기갑들의 목소리를 널리 들리게 하여 넘의 생존권이라고 '태평한' 정치권과 시민 사회에 생산적 압력을 가하고, 여성과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담론적 사회적 정치적 의제를 설정하고 주도하는 역능을 끊임없이 계발, 확장하며, 협상 속에서 양보 혹은 타협된 사안에 책임을 진다. 이를 위해 필요하다면 수십명의 심상정들과 노회찬들을 시장으로 지사로 의원으로, 대통령으로 맹글어내며, '우리'의 정치적 창조물들마저 '비리'의 덫에 빠지지 못하도록 행.페부린다.


그리하여 '돌 속에 갇힌 말'들을 풀어내는 사회변혁의 연금술사들인 '우리'는 보다 해방적이고 보다 희망가득한 미래의 딴세상을 지금 여기로 가져온다. 망각에 맞서는 반복 제의의 문화를 끊임없이 생성하자. 기억하되 책임지자. 여성들과 함께, 남성들과 함께, 행.페부리자.

2006/01/11 02:18 2006/01/11 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