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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11월 26일 서울 대학로 쇳대박물관에서 열렸다. (사)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하는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생존자들의 말하기를 통한 치유와 성폭력에 대한 인식 전환 등을 목표로 지난 2003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가해자의 뇌에 넣었으면 하는 것들을 그리는 그림판에는 '양심의 더러움을 씻어줄 세탁기' '입 막음용 마스크' '좀 들어라 표 다리미' '제멋대로 쉽게 빼버리는 이성' 등의 기발한 문구들로 가득했다. 한편 생존자의 머리 속 생각들을 그리는 그림판에는 '말해도 될까' '성폭력 정말 짜증나' '치유란 뭘까' '여자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등의 고민과 지지의 메시지들이 씌어 있었다. 그런가 하면 타로 텔러와 마주 앉은 참가자들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다. 연애운이나 현재 진행 중인 소송의 결과, 내년의 운 등 각자에게 중요한 것들을 물었을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한숨을 내쉬며 타로 텔러의 조언에 귀기울였다. 복채는 마음 내키는 대로. 성폭력 생존자 기금으로 쓰인다는 안내에 상자는 금세 돈으로 가득 찼다. "너도 혹시 즐긴 거 아냐?" 늦은 다섯 시 가수 흐른의 공연으로 이날 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시작됐다. 이번 대회에 말하기 신청을 한 생존자는 모두 여섯 명. 하지만 대회는 말하기나 듣기 참가자의 구분 없이 모든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의 말에 호응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가해자가 나를 때리며 그걸 즐겼는데도 경찰관은 성기를 삽입하지 않았으므로 단순 폭행이라고 했다. 내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그건 분명히 성폭력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중요한 것은 성기의 삽입 여부일 뿐이지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아니었다. 수사 과정에서도 경찰관들은 그래서 삽입을 했냐, 삽입한 채 때렸냐, 삽입을 하려고 때린 거냐고 계속 물었다."
흔히 성폭력이라 하면 가해자가 피해자를 유·무형의 힘으로 억압하고 강제적으로 일어나는 강간이나 추행을 떠올린다. 강제성은 피해자의 반항 정도에 비례해 인정되며 강간과 추행은 성기 삽입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사람들은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오로지 두 가지 상황, '당했거나 혹은 즐겼거나'만 존재한다고 여긴다. 또 모든 위험은 여성에게서 발생한다고 믿는 가부장제적인 사고는 성폭력의 책임을 여성의 몫으로(이를 테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다거나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거나 하는 등) 돌린다. 더욱 끔찍한 것은 생존자들 스스로도 그런 물음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그 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식의 무의미한 가정을 수십 번씩 곱씹게 된다. 또 정말 즐겼던 것은 아닌지, 자신이 가해자를 유혹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후회하면서 스스로를 다치게 하기도 한다. "몰라서 당하고 끌려가서 당하고 맞아서 당하고…. 사람들은 내가 팔자가 세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나?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그런 거다. 왜 따라갔냐고? 강간 당할 줄 몰랐기 때문에 따라갔다. 모르고 따라간 쪽이 잘못인가 성폭력을 저지른 쪽이 잘못인가?" 성폭력 그 이후, 나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성폭력 그 자체도 고통이지만 성폭력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2차 가해도 생존자들에게는 상처를 남긴다. 앞서 나현씨의 사례처럼 성폭력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추지 못한 경찰과 검사가 폭력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건 그 자체를 설명해야 하는 것도 생존자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헌법재판소까지 이어진 5년간의 지리한 싸움에서 승소한 김선경씨의 말이다. 폭력과 위협 속에 감금된 채 강간 당한 기억, 소송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2차 가해로 나현씨와 선경씨는 심각한 수준의 외상후스트레스 장애를 겪었다. 그러나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들의 몫으로 남았다. "불안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길을 걸으면 누군가 다가와서 나를 쿡 찌를 것 같고 집에 있어도 무섭고 잠드는 것도 싫었다. 나중에는 화장실 가는 것도 두려워 친구에게 같이 가달라고 할 정도였다. 정말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수면제를 몇 번씩 먹기도 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럴 때 그녀들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었다.
"처음에는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마음 먹기도 했지만 법 제도 안에서 싸워나갈수록 이상하리만치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부당함에 결코 굽히지 않는 모습으로 살도록 가르쳐 주신 부모님의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김선경) 네 시간에 걸쳐 진행된 말하기 대회는 여성타악그룹 동천의 속풀이 공연으로 마무리됐다. 북 소리에 맞추어 소리도 지르고 몸의 나쁜 기운들을 털어 버리기도 하며 참가자들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이날 대회에 나선 이들은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참석자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그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이가 말을 받고 그럼 또 누군가는 힘껏 박수를 치고 누군가는 눈물을 쏟고 가해자를 향해 욕을 퍼부었다. 또는 울음으로 말을 잇지 못하거나 분한 마음에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털어 놓기도 했으며 그저 박수를 치거나 발을 동동 구르거나,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는 것이 낯설고 두려워 주저하고 채 입을 열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세세한 모습을 떠나 그 자리에 말하고 듣고 공감하기 위해 모인 참석자들은 그들의 용기로 당당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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