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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종로에서 점심을 먹고, 서점에 잠깐 들렀다.

사고 싶었던 책은 너무 비싸서 선뜻 살 수가 없었고,

서점에서 그냥 나가기는 싫어서 만 원 안 되는 책으로 한 권만 사기로 혼자 정해 버렸다.

책에 대한 소유욕이 강하고, 서점에서 빈 손으로 나오길 싫어하는 나는

주로 그럴 경우에 시집 한 권을 사서 나오곤 하는데

오늘은 구천 오백원짜리 소설집을 샀다.

간당간당히 마지노선을 맞추고 룰루랄라, 오랜만에 탄 지하철은 밖을 볼 수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책 읽기엔 참 좋았다.

 

책은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이라는, 일종의 소설 모음집이었다.

철커덩 거리며 한강을 건너 노량진으로 가면서 노량진에 관한 김애란의 소설을 읽었다.

가끔 그녀의 글을 읽으면 나이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글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궁금해졌다. 나와 거의 동시대를 살고, 매우 비슷한 경험을 했고, 심지어 비슷한 동네에서 생활 했던 그녀의 글은 나에게는 무지막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노량진에만 가면 느껴지던 그 음울한 공기와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과 63빌딩이 고시원 창문에서 보인다던 친구의 말. 그녀의 글 속에는 나의 그런 추억들이 있었다. 가장 치열한 곳이었지만 한편으로 가장 우울하게 보이던 곳. 그 곳을 떠올리자 얼마 전에 읽었던 KTX여승무원투쟁에 대한 한 기사가 생각나서 기분이 찝찔해졌다.

63빌딩을 보고 처음 서울에 왔다고 느꼈던 그녀의 글을 읽다가,

나는 노량진역에 내렸다.

축축히 비가 내려와 있었다.

'씨발 비.'

내 뒤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트렁크를 끌고 세 명의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제각각 츄리닝 차림으로, 얼굴에는 여드름이 잔뜩난 앳띤 스무살 정도의 모습의 아이들. 다른 아이가 말했다.

'야, 드디어 서울에 왔다!'

그 애가 바라보는 곳에는 커다랗게 정진학원 광고판이 붙어 있었다.

 

어쩐지 그 순간이 묘했다. 그 글과 내 세상이 같은 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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