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 | 노조 | 이야기 - 2005/11/30 17:37

[1]
얼마 전 사무실 동료가 받은 전화 상담 사례 하나.
A 교사는 2004년 12월부터 Z 어린이집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처음 3개월을 수습으로 지내고 3월에 근로계약서를 썼단다. 근로계약서에는 2006년 2월까지로 계약기간이 명시되어 있길래 왜 그런거냐고 물어봤더니 원장은 그냥 ‘관례적인 절차’이고 계속 갱신되니 걱정 말라고 한 모양이다. 얼떨결에 서명을 했지만 좀 찝찝하기도 해서 어린이집 다니면서 문제 제기 몇 차례 하였고, 문득 12월이 다가오는 어느 날 원장에게서 다닌 지 1년이 넘으니 “나가라”는 해고통보를 받았다.
법적으로는 2월까지 고용이니 그때까지야 어떻게 버틴다해도 그 다음은 참 기약할 길 없는 상황이다. 노동조합 가입밖에 답이 없다고 말해봐도 쉽게 동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전화 상담만 한차례 더 받고는 더 이상 연락이 없다.


하긴, 나고 자라는 동안 붉은 띠 머리에 묶고 팔뚝질하며 뭔가 부수거나 두 눈에 눈물 가득 담고 서럽게 오열하던 모습밖에 본 적이 없을 테니, 꽤 세상이 바뀐 듯해도 여전히 두려운 건 두려운 건가 보다. 갈등 회피형 인간들...-_-;;(사실은 나도 그래 ^^;;)

 

보육노조가 생긴 2005년 1월을 전후하여 1년짜리 근로계약서들이 남발되고, 보육교육원에서는 계약직이 기본인 근로계약서를 교육시키고, 여성가족부는 영유아보육법시행규칙에 근로계약서 내 계약기간 명시를 규정하였다.
노조도 나름대로 위와 같은 사례가 생길 거라고 외쳐도 보고, 막아보겠다고 설쳐도 보고 했는데, 읍! 진짜 실제 사례가 눈앞에 나타나니 긴장감이 틀리다.

도대체 앞으로 몇 건, 몇백건, 몇천건이 발생하게 될까?

 



[2]
또 하나 받았던 상담은 학교 직속 후배에게서 받은 전화.
학교에서 위탁받은 어떤 기업의 탁아어린이집에 근무하는데, 위탁을 준 기업에서 교사 월급이 너무 많이 나간다고 위탁을 취소하겠다는 말을 내비쳤나보다. (아직 공식적으로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학교에서 다급하게 취한 조처라는 게 ‘호봉 높은 교사 자르기!’
이때를 대비했던 걸까? 이미 그 기업에선 1년 계약직으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여 매년 쓰게 하고 있었단다.
결국 이 여파로 8년차 베테랑 교사이던 후배가 잘린다. 내가 제대로 들었다면 오늘까지 근무다. ‘어떻게 할거야’고 물어봤더니 더럽고 치사하여 그냥 그만둘 거란다.
솔직히 위탁체 바뀌어도 8년 근무 중이었으니 보육노동자야 고용승계 외치며 버텨볼만 한데, 그렇게 하는 것이 더럽고 치사하니 해볼 만한 행동일 텐데, 아무래도 학교와의 관계가 걸리나보다.
하긴 졸업 후 계속 학교와 엮인 곳에 있었으니 그 세상이 사회생활의 전부일 텐데... 그래, 잘못 처신했다가 그 동네에서 매장당하지. 다음 취업을 생각하면 폭발 일보직전이라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할만하다).
퇴직금을 퇴직적립금만 달랑 주려고 하길래 그것만은 확실히 챙겨서 받아 나오는 게 목표란다.

 

자기 제자 하나 보호 못하고 학교 이미지 수호에만 몰입하는 학교와 교수.
졸업해서도 학교와 엮인 직장이기에 다음 취업을 위해서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보육노동자.
자칫 서로에게 고상하고 깔끔한 정리 단계로 보이지만, 약자에게서 약자에게로 넘어오는 더러운 권력의 내리꽂음이다.

 

[3]

단기계약과 경력자일수록 해고가 난무하는 보육천하, 정말 도가 땅에 떨어졌나봐.
예의는 커녕 기준도 논리도 없다.

 

일파만파 보육현장의 비정규직 수레바퀴는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다. 실제 당하는 주체가 나서서 부수어나갈 수밖에...
그런데 그것도 쉬운 것만은 아니다. 다른 직종도 그렇겠지만 이들에게 정규직으로써의 경험이 없다는 건 매우 어려운 조건이다.
뭔가 좀 나은 조건도 경험해봐야, 같은 직종 내의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근사하게 지내는 사람을 봐야 왜 그들을 ‘열악하다’고 표현하는지 알게 되는데, 다들 조건이 비슷비슷하여 비교도 쉽지 않다.


빈곤을 지향하는 듯 한 보상대가의 끊임없는 하향평준화 속에서 그들은 꽤 정당하다할만한 노동의 조건을 잊는다.
실제 대구의 한 10년차 보육노동자는 자신이 한 달에 100만원이상 받기 때문에 - 상대적으로 - 월급을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최근까지 60만원을 받고 버티는 버릇이 제대로 길들었기 때문에...

평균노동자 임금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평균 보육노동자 임금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어느새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이,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월급이 너무 적고 근무시간이 많다는 사실이,
보육현장의 그 어느 노동자에겐 그저 처해진 현실일 뿐 바꿔내야 할 무엇이 아닐까봐 두렵다.


최근 20대의 최악의 취업률 역시 비슷한 의미에서 두렵다.
직장이란 걸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비정규직이자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한 자가 생각할 수 있는 더 나은 삶이란 건,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아니라 연봉 몇 푼 상승인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은 단순히 노동의 성격이 아니라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이며 삶과 문화의 질을 바꾸는 사회적, 문화적 과정으로 보인다.

그 속에서 노동자는 비정규직으로 태어나고 단련되더라.

투쟁의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라 투쟁의 내용성이 이미 한계 지워져버렸다.

그리고 삶의 자세가 변화되어간다.
경험할 게 못된다. 아예 경험하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없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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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30 17:37 2005/11/3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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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작전 변경! 혼자 보기 아까운 글 추천!

    Tracked from 2006/04/18 07:36  삭제

    메이데이 블로그 찌라시에 추천합니다. ^^

  1. 이재유 2005/11/30 19: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니야 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 조건 자체를 아예 경험하게 하지 말아야죠. 그런 조건을 경험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다른 노조에서 단체 협상할 때 아이들의 보육 지원을 최대한 받도록 해서 그 노조의 이름으로 보육원을 개설하고, 보육노조에서 정당한 대우와 조건 속에서, 연대의 기틀로 만들면 어떻겠나 하는 것입니다. 좀 낳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 너구리 과학 이야기 책은 좀 있다 주문하면 안 될까요? 제가 경제 사정이 달랑달랑해서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영어 강독 모임에도 참가하고 싶은데, 1월부터라도 괜찮을지요? 안 된다면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겠습니다^^.

  2. jineeya 2005/12/01 19: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재유/그러게요. 이제부터는 고민을 다층적으로~!
    령리한너구리는 넘 마음에 부담갖지마세여..^^;;
    글고 영어강독은 총 6회 예정인데 1월이면 벌써 반이나 지나는 거라서 어떨런지... 음...

  3. 이재유 2005/12/02 16: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월에 참석하면 세미나 분위기가 깨질 것 같네요. 그럼 다음 세미나를 기약하도록 할게요. 저도 세미나 많이 해 봐서 아는데, 중간에 누가 들어오면 분위기가 산만해지더라구요. 나중에 세미나 자료 주시면 혼자 공부해 보도록 할게요*^^*... 고맙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