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_______________________인사아트센터(http://www.insaartcenter.com) 오채현 조각전_2009.02.18-02.24
전래, 해학, 친근, 익살...
대충대충 판 것 같아도 이미 돌 안에 호랑이나 사람이 숨 쉬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함박웃음이 절로 난다.
-이 시리즈가 약간의 잔혹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기에- 아직은 보면 안된다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제 쯤이면 '적응과 강화'의 일환이라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뭐... 결과적으로 좀 놀라웠다고나 할까?
내가 한동안 자신에게 했던 매우 곤란한 질문이 적시되어있다.
아니, 약간 틀릴지도... 나는 그 나선에 모순이 없을까봐 조바심이 나던 참이었다.
(참고로, 이 글엔 애니에 대한 네타는 커녕 감상도 없답니다.
사실 글의 주제도 애니의 내용과 살짝 벗어나있지요.
그래도 애니를 보신 분은 제가 무엇 때문에 기억을 소급하게 되었는지 이해해주실지도..)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살다가 죽기에,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일생 최대의 의문이자 정답 없(어보이)는 난제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이러한 고민에 빠지면 치열한 생각의 고리를 엮기 시작하고, 며칠간 고민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인가?ㅋㅋ- 머리 속을 reset한 기분이 들면서 세상에서 가장 속 편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이틀 쯤은 세상 모든 것이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언제나 결론보다는 과정이 소중했고, 행복을 위한 필수 과정과도 같았다.
그런데 작년 연말엔 좀 달랐다.
나는 어느새 삶과 죽음과 존재에 대한 매우 물질적인 결론을 내린 후 그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구멍은 많아도 말이다.
생명의 탄생 신비는 모르겠지만, 물질은 어떤 형태로든 순환하고 인간 또한 그 수레바퀴에서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물질은 그냥 하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이 여러 성인과 군자들을 통해 인성과 윤리를 쌓아가는 과정은 흡사 근원과 분리되면서 반드시 갖춰야하는 객체성을 유지하려는 몸부림같기도 하다.
제대로 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계속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순환이라는 고리의 중력에 지배를 받는다.
만약 그 과정의 모양새를 물질화한다면 원형 또는 나선형 정도가 되려나?
순간, 언제나 경이로웠던 세상의 변화들은 구조 속에 갇힌 별볼일 없는 것들로 보였다.
혹여 그 언젠가 변화가 완성되는 순간, 또는 진리를 얻는 그날이 온다해도, 그게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이후 인간은 모든 걸 해탈하고 행복해졌다해도, 그건 어떤 감정일까? 진정 나를 포함한 모든 이가 마감이 정해진 삶을 열심히 영위할만한 가치를 가진 걸까?
며칠간 눕기만 해도 생각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아서 죽을 맛이었다.
좋아하는 커피엔 손도 대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물질과 나 사이에 벽이 생겨 차단된 느낌, 무언가 짚었는데 실물감이 없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생각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는 건 아마도 사실일거다.
서둘러 지인들의 품을 찾아갔다. 인간에게 있어서 실물감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부여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아마도 인간일테니..
너덜너덜해진 정신 상태를 수습하고자 파란약을 먹고 매트릭스로 기어들어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의 사고 가능 영역만으로는, 인식 가능한 물질체계만으로는 추측이 불가능하다고, 내렸던 결론에 대해 오류 처리를 하기로 했다.
일정 기간동안 나는 나의 뇌에 잘못된 정보를 입력하고 기다린 결과, 값을 내기 전 '뻑' 가버린 꼴이 되었다.
'꼴'이라 하니 약간 부정적으로 읽혔을 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 순간엔 생존까지 걸렸다 싶은 상황에서 꽤 적절한 처리였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계속 상태를 유지할 기력은 바닥나있었다.
물론 비슷했던 예전의 경험과는 결과가 상당히 다르다.
하루이틀 쯤 눈부셔보여야 할 세상의 참맛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유리마냥 깨질 것 같은 상태를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조금씩 원래 상태 비슷하게 만드는 데만도 노력이 많이 들어갔다.
당시엔 갑갑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새삼스러울 정도로 멀쩡한 게 더 신기할 정도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드디어(?) 해소란 없는, 과정만을 즐길 수 없는, 살면서 언젠가 불현듯 나올만한,
그리고 그 나선에 모순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는,
그런 문제가 평생 내 속에 내재되어있으며 나의 삶과 함께 할 것이라는 점.
토우코 : 아라야, 무엇을 바라는가?
아라야 : 진정한 지혜를
토우코 : 아라야, 무엇에 바라는가?
아라야 : 단지 이 몸에게만
토우코 : 아라야, 어디를 향하는가?
아라야 : 말할 가치도 없는 것을, 이 모순된 세계의 나선의 끝을
- 애니 [공의경계 - 모순나선]에서
80세 노인.
평생 농사로 인해 겹겹이 쌓인 주름과 백발 이외에도
10대에 침을 잘못 맞아 힘줄의 성장이 멈춘 관계로 그 굵기가 오른쪽 다리의 절반 밖에 안되는 왼쪽 다리.
77세 노인.
경운기도 안 쓰고 농약도 안 치는 꼴통 남편에게 시집 와 오랜 세월에 걸쳐 남겨진 주름과 꼬부랑 허리.
그리고 여러가지 의미에서 이 둘보다도 더 눈에 띈 존재인 40대 소.
평균 소의 수명은 10년이지만 무려 4배가 넘은 세월을 살면서 비쩍 말라 살은 없고 뼈에 그냥 털만 씌워놓은 것 같은 형상의 몸. 그리고 귀를 찌를 듯 자라서 몇번이고 갈았던 뿔.
영화 [워낭소리]는 이 3명이 평생을 거쳐 다져온 삶의 소중한 보물들을 모은 것 같은 - 여러 의미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몹시도 운 좋은 - 이야기다.
꽃같은 부자집 도령들이 수두룩 빡빡 등장하는 드라마가 유행하는 요즘,
매끄러움이라곤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주름투성이 몸에 흙이 덕지덕지 묻은 옷은 결코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수 없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화면은 꽤 매력적이다.
세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푸르디 푸른 자연은 관객석까지 그 풀향기를 전달해줄 것만 같고,
그 안에 언뜻언뜻 보이는 주름과 굽은 허리와 소의 흙딱지는 당연히 거기 있어야만 할 필요충분조건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데려온 젊은 일소가 늙은 소를 괴롭히는 에피소드도,
끊임없이 할아버지에게 투덜대는 할머니와 일언반구없는 할아버지의 에피소드들도
유쾌하기 그지없는 삶의 이야기이다.
게다가
소가 잘못 먹고 죽을 지도 모르니 논밭엔 일절 농약을 치지 않고, 매일같이 시원찮은 다리를 끌고 언덕에 올라 소 먹일 꼴을 베는 할아버지.
네다리가 꼬일 듯, 지금이라도 쓰러질 듯 싶지만, 느릿느릿 걸으면서 할아버지가 잠들 정도로 안정감을 주는 소.
소가 마지막 생명을 다한 후에도 밭 한가운데 고이 묻어주고 절에 가서 안녕을 빌어주는 관계.
생명이 생명을 위해 하는 행동이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감을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나는 대한민국에선 다시 못 볼 골동품같은 삶이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꽤나 흥미로운 삶들을 본 것 같아 즐겁기 그지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종 웅장해지려는 사운드와 엔딩컷의 '...에게 바칩니다'는 완벽한 실수처럼 보였다.
굳이 감동을 강요하지 않아도 좋았다.
영화의 생각(?)만큼 아련하거나 골동품같거나 철저히 남의 삶 같지도 않았다.
때론 유쾌하고 때론 감동적이고 때론 행복했던 이야기.
이런 삶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영화야말로 두번 다시 볼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이야기.
* 사진출처 : 다음(http://www.daum.net) 영화
광화문 사거리 지하보도에는 통로 가운데 광화랑이라는 작은 갤러리가 하나 있삼.
대체로 비어있을 때가 많은데, 오늘은 운 좋게도 테디베어 인형 전시중.
오랜만에 생각나는 영화 [클리프행어]
내가 못본 영화 [빌리 엘리어트]
이건 뭘까나? 어떻든 큐피드 베어는 왕 귀여움..ㅋㅋ
전혀 당연해보이지도 않는 갑갑한 상식을 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힘,
젊음의 힘은 뽀얀 피부와 하얀 눈동자가 아니라 그 안에 느껴지는 정열과 금기를 쉽사리 넘는 백치미...ㅋㅋㅋ
오석근의 [교과서(철수와 영희)].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모두 어린 시절에 대한 엄청난 기억 봉인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교과서엔 '단면적인 착한 어린이' 이미지들이 가득했지만,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시절인 '어렸을 때'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실생활은 꽤나 충격적이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존재했다.
세상은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동화책 속 이야기가 아닌 경우도 있고,
반면 충격적이라고 기억했던 사실은 그저 고리타분한 편견에 의한 것일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사회가 개인적인 봉인 기술에 의존하도록 무언의 종용을 지속하면 할수록,
인간은 그것이 '억압적' 또는 '사고의 제한'을 유도한다고 깨닫는다는 점이다.
'은밀'로 가리는 것이 아닌 전형적 사고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
이재훈의 [UNMONUMENT- 이것이 현실입니까].
결전장의 꼭대기를 점한 winner와 정복자.
그 밖의 모든 자들은 밟히고 부서지고 쓰러진다.
결코 기념스럽지 못한 비기념비.
이은실의 [대치].
문지방만 넘으면 깊이와 높이와 존재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압도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면 어떨까? 실제로는 넘어갈 수 있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갇혀있다는 갑갑함, 자유에 대한 갈구를 소망하지만,
때론 정답이 존재하고 안정감 있는 틀 안에서의 휴식에 만족하기도 한다.
그래도 내 생각엔... 인간이란 건 평생 자유를 포기할 수 없는 어리석지만 용기백배한 짐승임에 분명하다. 아무리 거대하게 구축된 보수라도 이 점을 간과한다면 언젠간 큰 코 다칠 수 밖에...
고등어의 [Meat & Clothes].
고등어의 작품은 하나의 그림보다 영역 내의 모든 설치와 드로잉을 함께 감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야만적인 남성의 세계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수많은 소녀 또는 미성인 자들과 자아를 세우고 안락을 얻기 위해 남성의 세계에 타협해가는 자들, 또는 한쪽 구석에서 조금씩 야만을 온건으로 변화시켜가는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뭐랄까.
기괴하고 아름답지만 생각외로 도식적이라는 생각도 드네.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 전시 - [오래된 미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2008년 12월 11일 ~ 2009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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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영역을 엿볼 때 가끔 상상이나 근원, 아니면 -여러가지면에서- 사회상과 거리를 둔 영역을 다루고 있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간혹, 직설적으로 소위 '꽂히는' 작품을 접하게 된다.
작가의 실제 의도는 어떠했을 지 몰라도
사회적 의식 고양을 위해 긴장의 강도를 높여가는 수만번의 궐기보다
때론 전시장 한켠에 전시되어 있는 지도 한장이
머리 속 긴장을 푼 상태에서 보다 직관적이고 진지하고 집중된 사고를 도모하기도 한다.
(사회에 대한 직관력을 높이는 건 간혹 현실사회와 거리감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현실감을 되찾는 중요한 키포인트가 될 것 같다.)
실제 전세계 땅덩어리를 펼쳐놓고 돈으로 계산하다보면 이보다 비좁고 어리석고 답답한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지도]
작품의 하나였던 설문지.
희한하게 일상에 필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닥 꺼내지 못하는 화두들은
적절한 환경과 적당한 질문 속에서 쉽게 끄집어 내어 지기도 한다.
그리고 간혹 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앎의 방향이 서로 달라 서로 '모른다'라 판단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이를 테면 아래 설문 답변자가 가진 영토의 개념은 문투로 봤을 때 살짝 비관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사실상 '빌려쓴다'는 개념이라든가 그(녀)가 생각한 '권력'이 자연이나 우리를 포함한 기(氣)라고 생각하면 그닥 불편한 진실도 아니다 싶다.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가장 확실하게 느껴지는 건
정답이 아닌 다양한 사고가 교류하고 공유된다는 점이 꽤나 상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 전시 - [오래된 미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2008년 12월 11일 ~ 2009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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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을 꿈꾸는 인간이 그들만의 질서를 통해 재편해나가는 세계는 이미 '인공'이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이제 서서히 그 안의 모든 물질은 자연과 인공의 무뎌진 경계를 오고간다.
사실 물질은 그대로이나 인간의 사고만이 오고가는 것일 지도...
이러한 현대의 한 때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줄타기같은 상상의 세계.
우에마쓰 타쿠마의 [Coral Forest]
우에마쓰 타쿠마의 [Mix White Fawn-Coral]
임승천의 [바벨]
임승천의 [3호]
강태훈의 [책]
다니엘 리의 [Dreams]
공성훈의 [오리와 연꽃]
우에마쓰 타쿠마의 [Shining]
아트님의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 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에 관련된 글
생명과 존재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객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관계하는 유기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 안에서의 순환 원리도, 존재성의 의미도, 때론 끊임없어보이는 순환 속 존재성에 대한 허무나 위협도 경험하게 된다.
한편 생태와 순환에 대한 또다른 상상을 꾀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록 물(物)의 상태 내에서만 감지하거나 상상할 수 밖에 없다하더라도, 상상과 창조(또는 복기?)는 인간의 본능이니까.
아래 작품들은 뭐랄까, 늘어뜨리다보니 원래 전시 수순과는 반대가 되었다.
생태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작품에서 생태 원리를 표현한 작품 순이라고나 할까?
정경희의 [또 다른 기억].
정경희의 [기억의 숨]
심현주의 [Waterfront].
김순임의 [I meet with stone - 어디서 굴러먹던 돌맹이].
여락의 Untitled [54-1]과 [54-2].
* 사진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 전시 [오래된 미래] 직접 촬영
[서양미술거장전 : 렘브란트를 만나다]를 보러갔다가
다른 심(?)을 봤습니다.
'花音'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예술의전당 입구에 있었는데 정말 흥미로웠어요. 예술가들의 상상력이란 참 아름답네요.
* 뱀발 : 너무 오랜만에 포스트를 쓰네염~
한동안 한 고민을 너무 깊게 했더니만 정신이 인정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려진 기분이었슴다.
지나고 보니 새삼 제 주변의 여러분들이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네요.
모두에게 감사드림다~!(뭣 모르고 감사받으려니 쑥스러우시져?ㅋㅋㅋ 일단 받아두세염 *^^*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다들 행복 잊지 마세요~!
현실이란 무엇이고 허구란 어디까지일까?
평생을 걸쳐 인간이란 얼마나 위험한 정의에 기대어 행동하게 되는걸까?
생각보다 얄팍한 경계는 인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하다.
예를 들어 김세진의 [닉네임]엔 사진 아래 그녀/그들과 어쩌면 상관없을지도 모를 단어들이 붙어있다. 그리고 그 단어를 보는 순간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그녀/그들을 규정지우는 딱지가 붙이게 된다.
안규철의 [상자속으로 사라진 사람].
너무나도 당당하게 적어놓은 사용매뉴얼. 누군가의 진실되어보이는 글은 해본 적 없던 상상도, 없던 믿음도 생겨나게 한다.
김홍석의 [This is Coyote].
어찌보면 코믹하기까지한 인형. 그러나 그것을 연기하는, 그 안에 인형의 탈을 뒤집어 쓴 사람의 사연은 겉모습만큼 유쾌하진 않다. 오히려 진짜 현실에 존재할 법한 이야기는 살벌하기 이를 때 없다.
같은 김홍석의 [The Talk] 역시 허구로 치장되었지만 꽤나 현실적일 법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도 사실은 아니겠지만 언제 강제출국당할 지 모를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어려워서 분장한 대타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제는 꽤 알려진 탤런트 안내상이 외국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다면 진짜 외국인 인줄 알았을 거라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정혜경의 작품들에는 슬슬 꿈보다 현실의 무게가 커지는 30대가 되면서 와닿은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통해 떠올린 김광석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도 떠올려준다.
작가는 김광석을 위해 스테인레스 재질의 [세계일주]와 기타로 만든 오토바이 [Touch Me]를 만들고,
그들을 기억하는 다양한 30대의 인터뷰를 영상에 담기도 했다.
그리고 김광석을 [Touch Me]에 태우고 여행을 보내는 [CHAOS]를 만들었는데, 뭐랄까 정겨운 느낌.
박재영의 [Dr.john's LAB]과 [CERTIFICATION MODELS]는 예전 황우석 줄기 세포, 신정아 학위 위조 등과 같이 매체를 통해 쉽게 믿어지고 우리의 의식을 왜곡시켰던 사건들과 비슷한 새로운 조작을 만들어낸다. 상대방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변형시키는 '보카이센'. 이를 믿게 하기 위한 실험실과 각종 증명서들은 어디선가 본 듯하여 헛웃음을 짓게 한다.
아래는 모두 박윤영의 [Downtown Eastside]라는 작품의 일부인데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내가 찍고 싶은 이미지만 골라서... 그냥 내 소장용.ㅋㅋ
* 사진출처 - 서울 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현실과 허구의 경계 읽기]에서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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