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수로 이루어졌다.'
이 문장을 접하는 이들은 대체로 두가지 정도의 생각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영화 '매트릭스'.
수많은 코드, 결국 0과 1로 무엇이든 표현 가능한 그 세상은 인간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다.
그리고 자연을 두려워하여 자연과 맞서 성과 벽을 쌓았던 인간이 자연을 에너지로 소비해왔듯,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에서 에너지로 소비되어가는 신세가 현실일 뿐이었다.
하나 더 꼽자면,
수가 세상을 이루고 있다는 오만한 수학자들의 콧대.
그러나 그들은 0의 출현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무리수 등에 여지없이 설 근원을 잃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수로 바라볼만 했던 직간접의 경험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대체로 서늘하거나 수세적일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오만한 콧대의 수학자 한명을 책으로 접하게 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등장하는 박사는 30년전만해도 세상을 들썩이는 천재수학자였으나, 17년 전 교통사고 이후 기억력이 80분으로 한정지워져버렸다.
17년 전의 일은 어려운 공식도 남김없이 알고 있으나 정작 8시간 전의 오늘 일은 머리 속에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직업도 그렇고, 최근 17년간 바깥 출입도 없었으며, 기억조차 없는 그가 처한 기본적인 상황은 매우 무미건조하기 이를 때 없을 법 하다, 아니 없어야 했다...만...
그는 새로운 파출부의 생일과 자신의 기억 속 숫자 속에서 우애수를 발견하였고,
파출부의 아들이 모자를 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숫자도 꺼리지 않고 보듬는 관대한 '루트'라는 애칭을 부여했다.
이후 박사와 파출부와 아들 '루트' 사이에는
완전수와 부족수, 과잉수, 소수, 삼각수 등이 채워지면서 점점 더 풍요로운 관계로 가꾸어졌다.
수학의 여왕인 정수의 관계를 연구하던 박사는 분명 세상의 진리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는 일종의 오만(?) 속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에게 수는 위대한 근원이고 세상의 전부다.
그리고 대부분의 수학자나 -나도 살짝 - 박사의 생각과 같길 바라지만,
현재의 수학이론계만 본다면 사실상 기대에 부응할만한 상태는 아닌가 보다.
그러나 박사를 통해 깨닫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수학에 조예가 깊었는지, 얼마나 믿음(ㅋㅋ)이 투철했는지가 아니다.
그는 수에 정체성을 담아 자기 완결적 세상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일관되게 살아갔다.
그 삶은 8시간짜리 기억력을 가지게 된 순간에도 결코 폐쇄적이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는 건 오로지 수에 대한 것 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정도, 관대함도, 풍성함과 부족함도, 완전함의 기쁨도, 결국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과연 나는 그와 같이 관대하고 일관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20세기 디자인의 혁명이라 불렸다는 베르너 팬톤.(진짜?)
1900년대 중반에 한창 활동, 신소재였던 플라스틱의 사용, 독특한 디자인은
소재면에선 후질 지 몰라도
디자인면에서는 21세기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겠다 싶다.
분명 전시는 의자나 소파, 조명기구 등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왠지 공간 자체를 염두에 두고 통째로 디자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히 붙어있는 사진들이 그걸 알려준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 보면 무당집 같다 생각하겠지만,
공간 자체의 안정감이 느껴져서 화려함 속에 포근함이 있다.ㅋㅋ
디카를 가져갈 걸. 핸카로 찍었더니 특히 빨간색들이 많이 날라가버렸다.
꽃분홍이 아니라 진짜 빨간이었는데...
베르너팬톤의 상징인 하트모양 의자
가운데 있는 2인용 소파에 사람들 앉아있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적당히 차이나는 눈높이..
전시에 걸려있던 사진들
여긴 수영장이라오.
이 사진은 naver에서 찾은 사진..
실제 전시장에서도 들어가볼 수 있다.
그런데 전시용이라 그런가 폭신폭신해야 할 것 같은데 다소 딱딱.
그래도 이런 동굴같은 분위기 좋아...ㅋㅋ
* 베르너팬톤 전시회(http://www.vernerpanton.kr)
사람들은 보통 '함께' 하고자 할 때 서로간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론 자신의 모든 부분을 한번에 쏟아내기도 하고,
때론 잘 보이기 위해 허점과 빈 구석을 완벽히 메운 채 다가가려 한다.
그러나 '함께 한다'는 건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니다.
무게감에 질려, 가식에 질려 오히려 다가가고픈 거리만큼 멀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바라보기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 다가가고픈, 함께 하고픈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자체로는 실체가 없지만 실체만이 가지는 '그림자'를 통해 주변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그 형식 속에서 살포시 감추어진 듯, 노골적이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지만,
상당히 공감 가고 진정성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지고 있다.
언뜻 보기엔 매우 건조해보이는 느낌은 오히려 관람자인 나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호기심과 이야기의 상상 기회를 부여한다.
거리 두기를 통한 편안함, 이것이 '함께'의 척도를 고민해볼 여유를 부여하는 듯 하다.
물론 그 다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준다고 볼 수는 없을 듯.
[축구]
겹쳐있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축구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바보들의 대행진처럼 보였을 지도 모르겠다. 캔버스 자체를 접어 만든 실루엣이 뭔가 역동감을 더해주는데, 안내지에 의하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ㅋㅋ
[바보]
이 그림은 '바'라는 글자로 그려져있는 왼쪽 사람과 '보'라는 글자만으로 그려져있는 오른쪽 사람의 대화나 숨결이 얽혀있다.
둘의 대화는 잠시 스치거나 또는 잘 아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행하곤 하는 허무와 가식과 무시의 전제가 마치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된 듯한 모습이다.
[연꽃을 부는 사람]
순수한 도의 상징인 연꽃을 부는 사람.
뭔가 불어서 도를 완성한다거나 파괴하는 것 같다는 개념보다
그저 도 자체에 관심없고 무지한 사람의 야사시한 행위같은 느낌이 강하다.
* 그림 출처 : 성곡미술관 (http://sungkokmuseum.com)
얼마 전 드라마 '뉴하트'를 봤는데,
수술을 받아야할 정신대 할머니가 나왔다.
나이가 들어도, 삶이 고되었어도, 가까운 이들이 많이 남지 않았어도,
하루하루의 삶과 사람들에게 감사해하고,
여전히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는 그녀.
그녀가 화면에 나온 순간 나는 생각했다.
'1시간 후면 사망?'.
그래도 드라마 중반 쯤 가니 수술도 잘 된 듯 싶어 잠시 불안감을 삭힐 수 있었다.
그러나 굳이 입원한다면 독방을 쓸만한 한국 최고의 섹시하고 어린 연예인이
할머니의 옆 침대를 꿰차고 할머니와 교감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나의 불안감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화보집 못 찍을까봐 수술 거부하며 '수술 상처난 이후의 삶은 없다'고 외치는 연예인에게 수술의 의지를 불어넣어준 그녀는,
그러나 '정신대'라는 규정된 고통과 '할머니'라는 규정된 산 죽음의 구획을 벗어나지 못한 그녀는,
결국 젊은 의사의 열정을 돋보이기 위해 희생당했다.
드라마는 개인이 깨달은 삶의 의지나 존중감이 아닌
사회가 부여한 삶의 가치에 따라 그들의 삶과 죽음을 갈랐고,
의사진의 능력, 사고 시비 안 걸릴 조용한 처리, 진행의 속도감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가 통속적인 사회의 가치 규정에 따라 그녀를 가벼이 내버린 그 순간에 지성은 그녀의 삶'도' 존귀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도덕 교과서인 척은 어느 정도 참겠지만,
기왕 흉내 내려면 진심을, 핵심을 왜곡시키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아는 이가 극찬을 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스토리도 알려주지 않았다.
동네 방네 벨소리가 영화 속 삽입음악들로 바뀌어가고 있단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푼 기대를 안고 영화관을 찾았다.
포털을 뒤지다보니 어느 블로거가 '음악 하나는 최고로 잘 만든 것 같다'라고 썼는데,
'음악 하나 잘 만든 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명확한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 '영화 또한 그러했다'고 포괄적 동의를 해주는 건 아니다.
영화적 기법이 딸려서냐고? 그 반대같다.
분명 거친 화면, 튈 것 없는 장면들인데, 인공조미료 냄새가 풀풀 난다.
음악이 주인공을, 그들의 감정이입을, 스토리를 다 잡아먹어버린 느낌이다.
음악으로 표출하고자 하는 감정은 영화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과잉되어 스크린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 했다.
이걸 누구나 흔히 깨닫는 멜로의 한 코드로 감싸 해소하려하니
나중에는 저 어설퍼보이는 화면조차 연출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누구나에게 익숙한 향수를 통째로 뒤집어 쓴 느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뮤직비디오 10편 쯤 본 느낌...
* 밝은집 님의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에 관련된 글
한국 현대 사진계 원로, 중견, 신진들의 사진을 총망라해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별로 3섹터로 나뉜 전시의 구획은 3세대간 구분이기도 하지만, 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와 카메라에 대한 작가의 위치같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실제 피사체와의 물리적 거리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원로에서 신진으로 갈수록
피사체는 사람-자연-사물(또는 투영되는 사회)로,
피사체와의 거리는 다가옴에서 멀어짐으로,
카메라와의 거리는 도구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이다.
1.
1880년대 사진이 도입된 이후 1960년대 프로사진가 개념이 정착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는 1세대들의 사진에서는 대체로 피사체 내부까지 꿰뚫어 사진이라는 정지화면에 담아내고자하는 엄청난 욕망이 느껴진다.
육명심 [백민-강원도 강릉](1983)
주명덕 [논산](1971)
심지어 극히 거리감을 두고 싶은 피사체에게조차 바라봄의 거리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이러한 거리감 개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만병통치가 아닌- 가벼운 두통을 동반할만큼 피사체에 대한 진중한 고민을 하게끔 유도해낸다.
황규태 [만병통치](2000)
2.
중견 집단들은 사진전을 안착화시킨 세대이기도 하다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요인도 많겠지만- 사진의 크기가 커지면서 화면 안에 자연이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혹여 사람이 주요 피사체라 하더라도 주변화하거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묻어나는 피사체에 대한 거리는
피사체의 중심이 사람에서 자연으로 옮겨지면서 보다 드넓은 시야를 선사하는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민병현 [SNOWLAND.SL165](2006)
배병우 [소나무](1992)
b
김아타 [ON-AIR Project 056-1](2004)
3.
중견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가 자연이라면,
신진 작가들이 새로이 확장시킨 피사체는 사회다.
물론 1세대도 인물이 있으니 주변의 사회를 담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 '사람'으로부터 파생된 공간을 담은 것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반면, 신진들은 사회 자체가 핵심 피사체로써 사람이나 사물, 간혹 자연이 그 공간안에 배치되어진 느낌이다.
때론 작가가 아닌 카메라가 원하는 대로 찍은 것 아닐까 싶은 사진도 있다. 그만큼 사물을 대한 감정의 깊이가 달라짐을 느끼게 한다.
김옥선 [Alex and Eric](2004)
아래 사진은 너무 작게 축소되어 놓칠 부분이 있는데,
실제 이 사진을 보게 되면 전화박스 바닥에 전쟁을 벌이고 있는 작은 병정인형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백승우 [Real World II](2006)
대체로 감정 투여의 대상을 사람과 자연까지 봐준다 하더라도 사물로 확장시키는 건 이상한 거부감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그 사람으로 구성되는 것이 사회이고,
사회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다보면 사물에 대한 '바라보기'는 당연한 결과치다.
확실히 상대를 꿰뚫어 표현하고싶고 관계 맺고 싶은 욕망이 21세기가 된 우리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만,
지금의 시대에 대뇌의 명령을 무시하고 간뇌의 감성을 증폭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일 수 있다.
현대인들은 조금씩 사회가 할퀴고 간 상처를 품고 있는 일종의 정신병자들이며, 소외라는 현상의 핵심 대상들이다.
따라서 뭣 모르고 상대방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을 풀가동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는 순간이 오면 - 물론 계속 제정신이 아니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상대방이 요구하는 감정의 홍수에 휩쓸려버리게 된다.
실제 요즘은 누구를 만나든 마치 정신과 상담 치료를 원하는 사람마냥
끊임없이 말을 한다. 그러나 어떻게 듣는 지를, 관계의 진정성을 잊은 존재들 같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 조금씩 감정의 경계선을 긋는다.
동시에 생존 전략 차원에서 사회를 통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진실,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를 찾고자 한다.
* 사진출처 : 서울시립미술관 [한국현대사진의 풍경]
나의 '서커스'에 대한 인상은 정지화면이다.
누군가 몸을 꺾든, 코끼리의 발을 올리게 하든, 어떠한 묘기를 보여주는 과정 후반에는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잠시간의 정지 장면이 연출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이 순간적 적막에 긴장감을 느끼며 '서커스'의 전부 내지는 백미인양 여기고 있다.
그래서인지 서커스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무대와 사람들이 펼치는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사진에 담아내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로나 비트너(Rhona Bitner)가 담은 서커스의 모습은 내가 받은 느낌을 그대로 옮겨준 것 같은 정적인 미의 극치다.
검은 바탕에서 오로지 서커스를 펼치는 주인공들만 존재하는 것 같은 사진들은 상당히 동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고요와 테잎 늘어진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서커스에선 동물들의 역할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사라 문(Sarah Moon)의 [앵무새]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붉은 바탕과 검은 링에 너무나 그림같은 앵무새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발타자르 부르카르트(Balthasar Burkhard)의 [사자]는 125*197cm의 거대한 화면에 멍하니 입 벌린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인 나머지,
서커스단에 갇힌 속박감, 자유가 박탈된 자의 비존재감,
서커스 자체가 갖는 우울한 느낌 등을 한꺼번에 표현해주는 것 같다.
피터 린드버그(Peter Lindbergh)가 찍은 크리스텐 멕메나미(Kristen Mac Menamy)의 사진들은 이미 과장된 서커스에 대한 이미지를 한번 더 과장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인물과 공이라는 사물의 배치는 과도한 소형화나 대형화를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3차원적 공간감을 무너뜨린다.
올리비에 르뷔파(Olivier Rebufa)의 [조종]은 줄을 잡고 있는 사람과 줄에 매달린 인형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이 주는 인상은 오히려 줄과 무관하게 무대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인형이고, 인간이야말로 위태로운 줄에 매달려 상황에 휩쓸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도식화된 관계들이 변화 또는 역전되고, 흡사 액자 구조의 문학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위대한 서커스]라는 전시 제목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한 감상 포인트는 '화려함, 역동성, 고독감'정도가 아니었나 싶었다.
확실히 부합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아련한 과거에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면도 있고, 피에로의 고독과 카리스마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확실히 화려함이나 역동성보다는 정적인 아름다움,
고독감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조나 이중삼중으로 가려진 풍자 등으로 읽히는 것들이 많다.
정(靜)에 숨은 동(動)보다 더욱 광대한 열정과 고요함이 만들어가는 느리고 작은 변화.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 해멍님의 [전시회 다녀왔다] 와
민중언론 참세상의 [참세상 기자들이 추천하는 명절 보내기 비법!] 에 관련된 글.
이 가을, 일민미술관에서 세 작가에게 '미술은 무엇'인지에 대해 물어봤다.
그중 한명인 전영찬 작가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그림의 진화를 시도중.
작품들 중 하나의 제목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인 'Inside Out'은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분류하지만
사실은 '당신이 이상해'서 라든가 '당신이 독특해'서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답한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 하나하나가 때론 비범하거나 때론 비참한 반전들을 준비하고는,
그 이질감에 대해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면서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속삭인다.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
1) 별거 아니니 크게 놀라지 말라고 토닥거리기
예를 들면 이런 건데,
[Falling]이란 작품은 침통한 감정으로 빌딩 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두팔을 들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화면이 상하 역전되면서 자살자 이외의 모든 이들을 -화면에선 아래가 된- '하늘'로 떨어뜨린다. 그 모습을 본 자살자는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사회인들을 바라보며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하늘로 떨어졌던 사람들이 -화면 위가 된- 바닥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두팔로 걷기 시작한다.
아래인 땅에서 두발로 걷던 모든 이들은 이제 위가 땅이 된 곳에서 두 팔로 걷기 시작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는 자 없이 또다시 일상의 쳇바퀴는 돌기 시작한다.
[Identity Crisis]에서는 바나나로 원숭이를 약올리면서 폭력을 일삼는 아이와 그 아이의 약을 올리려고 아이스크림으로 꼬시는 원숭이가 나온다.
그리고 아이가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못이겨 원숭이를 따라 들어간 동물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모든 동물들을 연기하는 인간의 세계였다.
사실 여기까지면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이나 설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는 여기서 또한번, '원숭이들이 아이를 징벌하려는 순간 밝혀지는 아이의 진실'이라는 반전을 준비한다.
[Identity Crisis]
2)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
[The Happiest Days Of Our Lives]는 고양이와 쥐가 조금만 움직여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쪽배 안에서 감격의 포옹을 통해 배의 전복을 막을 중도(中道)를 찾아간 아름다운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이어진 고양이의 먹이사냥은 약자와 강자 사이의 중도란 결코 평등한 길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더불어,과연 고양이와 쥐가 가장 행복했던 그날의 그 순간은 언제였을지, 남은 고양이는 내내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긴다.
[Show]라는 작품에서는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을 보는 아이,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빠, 그리고 그 아빠를 도청하고 있는 정부기관, 그들을 내려다보는 외계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화면에 잡힌다. 이를 통해 관음증에 사로잡힌 건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사실이 조망된다.
5천만 또는 전세계인 모두 '나는 극히 정상'이라고 외치고 속으로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하는 시대,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덕분에 우린 겉으로는 원숭이를 약올리던 아이가 쓰고 있던 가면을 쓰거나, 서로의 관음증을 숨기기 급급하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예외없이 누구나 소외되고 갑갑함을 느낀다.
구조에 어긋나는 것들에 자꾸 '이상하다'는 딱지를 붙이면서, 딱지가 많아질수록 격리, 거세시켜버리는 것은 세상이고 사회일 뿐이다.
격리와 거세의 두려움으로 사람을 호령하는 세상에 우리의 딱지를!
* 그림 출처 : 일민미술관(http://www.ilmin.org)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19세기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할 때까지,
아니 비유클리드기하학이 등장한 이후에도,
유클리드가 정리해놓은 기하학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 철학의 주요 이론적 발현체였고,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리계의 핵심으로 배치시켜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였다.
그러했던 만큼
알고보면 인간 사고의 결정체라든가 직관에 의거했다기보다 오히려 경험치의 발현이었고, 그 경험이 결코 신뢰할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혼란이란
세계관의 붕괴, 대재앙 그 자체였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적이고 변화와 흐름 자체에 집중하는 동양의 철학에 비해
정적이고 고정된 물체 자체에 집중하는 서양의 철학의 모든 특성을 부여받은 듯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깨어버리고 싶은 실체없는 거대한 '틀'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 [유클리드의 산책]은 르네 마그리트의 1955년 작품명이기도 하는데,
당시 마그리드는 유클리드의 평행선법칙을 원근법으로 가볍게 어겨주는 예술가적 표현으로, 규정된 상황과 세상의 체계에 대한 논리의 돌파을 보여주었다 한다.
그러한 정신을 이어받기라도 하려는 듯 경계나 한계를 넘어서기나 hybrid, 기존 논리로 구분된 영역간의 관계나 교류에 대해 모색해보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손정은의 [어느 자연주의자의 죽음]은 세이머스 히니의 시집 제목이라고 한다.
작가는 시집의 시구를 하얀 종이들에 분절하여 적어놓았는데, 관객이 무작위로 종이 하나를 뽑아든 순간 이미 그 시들은 더이상 시인의 그것이 아닌 관객만의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마치 진보블로그의 모든 글을 탐독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특정 블로거의 특정 포스트를 접하면서 개인이 변화할 수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 개인은 해당 포스트를 접했을 때나 블로그글 모두를 읽었을 때와는 분명 다른 개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편으론 전시회 설명글에도 있었지만 저 종이 하나하나가 마치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를 나타내는 듯 하다. 종이 하나를 집었을 때 머리 속을 퍼져나갈 오만가지 생각들이 마치 클릭하면 링크 따라 만날 수 있는 마구 펼쳐질 세상을 의미하기라도 하듯이.
정재철의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 9]는 한국의 버려진 현수막을 중국, 파키스탄, 인도, 네팔 등지의 현지인들에게 자율적으로 활용하도록 건네고, 일정 기간 경과 후 쓰임새를 관찰한 것이다.
결과물은 사진에 담겨져 있으나 아래의 붉은 천은 작가가 입수한 모양이다. 꽤나 훌륭한 차양으로 변신한 모습 속에서 형태, 문양 등의 문화적 hybrid 를 체감할 수 있다고나 할까?
기와지붕 위에 이슬람문자 프린트가 있다면 보면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이중근의 [super nature]는 위에서 바라보면 벌집 모양일 것 같은 공간 내부에 밀림의 사진과 산수화를 오버랩시킨 작품이다. 2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병풍들에 둘러쳐져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보는 지점은 한 곳인데도 여러가지 풍경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다.
박소연의 [Story Telling and Listening Series]는 특정 공간과 소품의 세팅과 주제(story)를 동참하는 관객들에게 부여하여 참여자들끼리 말하기와 듣기를 통한 정서 교류, 경계 허물기를 시도한다. 예를 들어 화면에 비춘 모습은 [어머니와 딸의 장소]라는 주제를 주고 '움'으로 끝나는 한글단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단어에 맞는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다.
다소 작위적, 또는 유치하다고 생각되는 세팅과 행동규칙들이 때론 생각의 정돈과 집중을 유도하여 감정의 풍요를 유도할 수 있다.
김현숙의 [플라모델]시리즈들의 조각들은 매난국죽같은 전통적 코드를 현대의 기성품 생산문화(ㅋㅋ)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런데 왠지, 진짜 조립해보고 싶다.
조덕현의 [in/finite 1Channel Projection]은 풍경을 찍은 영상과 거울을 통해 -사실은 한정되어 있으나- 무한한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원래 작품을 만들 때 고고학적 방식으로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잘 섞는다는 작가가 택한 풍경도 가야금의 명인으로 알려진 우륵이 태어났다고 추정되는 신화의 장소이기도 한 거창군의 한 마을을 담고 있다.
윤영석의 [표본실A]는 복제양 둘리 성공에 충격을 받았다는 작가가 인간복제에 대한 공포를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실제 계산된 수치들과 칩 모양의 돌기들이 생명에 대한 인간의 통제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좀 약올리는 것 같지만, 이 전시... 9월 30일에 끝난다.
-생물,무생물 다 합쳐서- 내가 최근에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한 캐릭터는
애니메이션 [풍인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만2세만 넘어도 보기 힘들다가 4,50대되면서 종종 나타나기도 하는 항아리형 몸매,
코는 거의 안보이고 입도 희미한데 눈은 햄스터마냥 검은 자위 가득한 얼굴.
그런데 이 애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쪽이 간질거리면서 머리 속에 절로 떠오르는 말은 '섹시함'이었다.
인간이 가진 보는 능력의 얄팍함을 고려해보건대, 미의 척도란 진정 아~무짝에 쓸모없는 거다.
저 유연한 웨이브를 따라가다보면 그 어떤 통자 몸매라도 눈을 홀리는 곡선의 법칙을 발견해낼 것만 같다.
'하늘거린다'는 표현은 끊어질 듯 가는 개미 허리를 위한 지칭이 아니라
캐릭터의 온몸에서 뻗어나오는 가벼움의 기운을 위한 말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올리며 짓는 옅은 미소에,
무심결 손을 뻗어 뺨을 어루 만질 것 같은 기분.
사람이 날고, 고양이가 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이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범한 일들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다보니 나 역시 함께 동화된다.
에너지도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세상에서,
어쩌면 누구나 바람의 흐름만 읽으면 바람을 타고 훨훨 나는 것이 환상만은 아닐런지도...
사람보다 먼저 바람의 흐름을 깨달은 애니 속 고양이들이
거대한 태풍을 타기 위해 서로의 몸을 연결하여 거대한 공 모양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언젠가 바람에 몸을 맡겨 하늘에 오르게 되면
서로가 뭉쳐 거대한 태풍을 즐김의 대상으로 받아넘길 그 때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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