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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2/17 21:10

피에로님의 [스캐너 다클리] 에 관련된 글.

 

프랑스, 벨기에, 영국에서 합작한 애니메이션 [르네상스]와

헐리우드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스캐너 다클리].

근거리의 미래를 다룬 SF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은 무척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두 영화를 서로 비교하게 되었는데,

처음엔 [르네상스]의 압승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독특한 영상미에 취해 내용을 살짝 간과해버린 면이 없지 않다.

 

뭐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르네상스]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용에 흥미를 못느껴서 그런지 일단 화면빨에 집중이...-.-;;)

2%씩 모자라며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흥미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들.

 


 



[르네상스]

 

100% 흑백화면이다.

마치 흑백영화를 연상하여 소박하고 아련한 추억에 잠길만한, 다소 빗물 흐르는 화면을 연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흑백만으로 3차원의 공간감과 박진감을 잘 살릴 수 있었는 지 감탄이 절로 난다.

정말 이 영화는 공간감각 뛰어난 영상만으로도 볼만한 영화다.

 

똑똑하고 사회봉사에도 열심인 어떤 젊은 학자의 갑작스런 납치.

알고보니 오래전 영생의 비밀을 발견하였으나 숨기고 있던 늙은 학자의 비밀을 알고나서 다국적 회사와 손잡고 상용화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저 한 학자의 납치 사건인 줄 알고 있던 형사는,

자신과 애인의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태에서 젊은 학자를 발견하고,

애인의 동생이기도 한 이 젊은 학자를 구할지, 미래를 위해 늙은 학자 말대로 죽일 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아쉬운 점은 '죽음'을 통한 존재감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해 - 인간에게 있어서 한때의 두려움이긴 하지만 -
이를 통해 완성되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보존한다는 매우 상투적인 메시지만 남아있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지 - 또는 왜 영생하면 안되는지-에 대한 중대한 존재론적 논의를 - 담을 수 있었으나- 빼먹어버렸다.

덕분에 스토리상으론 헐리우드 영화 한편 본 거나 다름없는 셈이 되어버렸다.

 

 


[스캐너 다클리]

 

실제 키아누리브스, 위노나 라이더 등 쟁쟁한 배우들의 실사 촬영 후 애니메이션적으로 덧입혔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 화면 자체가 실사에 선을 약간 단순화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솔직히 너무 가까운 미래였나?

[르네상스]보다 훨씬 다양한 칼라를 사용했으나 훨씬 지루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뭔가 극적인 반전의 상황에도 오히려 화면의 톤이나 인물의 역동성이 떨어져 긴장감이나 해소감을 느끼기 어렵다.


 

 

마약단속반 형사인 키아누 리브스.

실제 단속을 위해 마약을 하고, 마약을 유통하는 조직에 함께 하게 된다.

그가 손 댄 서브스탠스D라는 마약은 궁극엔 좌뇌와 우뇌를 분리시키면서 뇌의 손상을 초래시키는 매우 위험한 마약.

약에 취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원래 자신의 캐릭터가 어떠한 생활을 했었는지,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진짜 자신인지, 과연 자신이 누구인지 모든 이들과 모든 상황,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결국 단속자는 마약중독자로 변하였지만, 정부가 이 형사에게 원하는 개인의 희생은 그 이상이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현란한 수사 또는 이어지지 않는 대화의 흐름들은 이 영화가 Philip K. Dick라는 소설가의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알게 해주지만,
동시에 빈약 내지는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결말에 아쉬워해야하는 것은 소설의 느긋한 심리 유도를 영화가 담아내지 못한 탓일라나?

당장 키아누리브스는 자신을 상징하는 두 개의 인물이 둘다 진짜 자신인지, 그중 하나만이 자신인지, 과연 자신이 누군지 혼동하고 있다고 관객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표현하는 화면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만약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저 앞뒤 서로 연결되지 않는 - 대화 아닌 - 대화들, 그리고 그 대화를 통해 이어져가는 사실같지 않은 사실로 영화가 진행되고 있는 힘과, 그 뒤에 숨어있는 뉘앙스나 문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사진 출처 : 르네상스 웹사이트(http://www.renaissance-lefilm.com/accueil.htm )와

한겨레(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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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7 21:10 2006/12/17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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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1/26 18:14


이 책을 산 이유는 크게 세가지 정도 들 수 있다.

 

1. 가격이 싸다.

2. 사은품이 있다!

3. 내용이 재미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이 중 두가지 정도는 만족스럽다.

더더욱 다행인 것은 3번도 꽤 만족스럽다는 점이다.


 



1. 가격

 

원래 정가는 9,500원이나 인터넷 할인가 950원이 깎인 다음

무려 3,000원짜리 할인쿠폰이 붙었다.

그래서 실제 구입에 든 비용은 5,550원.

땡 잡았다!

물론 이런 단순 계산 방식의 구매로 인해 난 이미 한 인터넷서점에서 '실버회원'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2. 사은품

 

사은품은 '책 한권 더'에 '쵸콜렛피자무료시식권', '다이어리'까지.

 

한권 더 온 책은 '마트형 인간의 그럴싸한 밥상차리기'이길 바랬으나, '아들아 당당한 부자로 살아라'가 도착했다.

아무리 눈 씼고 봐도 동네주민 중에 아들에게 이따위 책을 줄만한 위인은 없는 지라 선심 쓰기도 틀렸다. (내가 사는 동네는 정~~~말 이상하다!)

그리고 어찌나 아들만 부자여야하는지.

 

쵸콜렛피자무료시식권 역시 다른 무언가를 사야 덤으로 더 주는 거였고, 그나마 가게는 그닥 가볼 일 없는 동네.

친정이 그 동네인 언니에게나 줘볼까나?

 

다이어리는 생각외로 원츄~!

아마도 2007년도 내내 jineeya에게서 새빨간 다이어리를 보게 될 것 같다.

 

3. 내용

 

어릴 적부터 작두개미 연구에 흥미를 보여 언젠간 적두개미를 연구하겠다는 꿈을 품은 TC.

그러나 그는 어느새 35년동안이나 상환해야할 대출금 덩어리인 집과 자동차, 가구과 차고 정도를 가진 평범한 회사에 다니는 회계사다.

 

세째아이를 갖고 싶었으나 아이를 키울 '다락방이 없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막아야한다는 공포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어느 날.

그는 자기 인생과 이 나라(체제)의 대차대조표를 짜본 결과

1) 자신이 빚진 것은 실은 돈($)이 아니라 시간(T)이며 결국 T = $이다.

2) 이 체제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고 있고, 자신에게 빚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평생 적두개미를 연구할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TC는

우여곡절 끝에 회사를 그만두고 회사를 차리는데 바로 '시간을 파는 자유주식회사'.

그가 작은 플라스크에  담아 파는 시간은 온전히 산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이 상품은 공존의 히트를 치게 된다.

 

처음 5분짜리 시간의 플라스크를 팔았을 때, 정부와 기업은 오히려 노동자의 작업 능률이 상승한다고 무척 기뻐하였다.

2시간짜리를 팔기 시작하자 기업은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해야한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으나, 정부는 실업문제 극복이라며 여전히 좋아하였다.

1주일짜리 플라스크가 생산되자, 조만간 모든 노동자 임금의 1/4이 자유주식회사로 흘러들어갈 것이라 판단한 정부와 기업은 플라스크에 '유통기한'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켜버린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도 위기를 맞은 TC는 유통기한 15일 이내 한 사람당 35년짜리 시간들을 팔아치우고 대신 상환금 남은 집들을 모두 사들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살 집이 없어졌으나 35년치의 자신만의 시간을 되찾았고,

자유주식회사는 나라의 모든 부동산을 소유했으나 누구도 돈이 없어 집을 사지 않으니 부동산업은 쫄딱 망하고 '체제 전복세력'으로 찍혀 정부에 몰수당했다.

한편 정부는 모든 부동산을 소유하게되었으나 누구도 경제활동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모든 국민들의 시간이라는 부채가 자동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10일도 안되어 일어났다.

 

그럼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TC는 또다시 아이디어를 낸다.

원래 T = $.

나라는 국민들에게 시간을 빚지고 있다. 그러니 그 시간을 돈으로 사기로 한다.

다만 합리적으로.

예를 들어 집은 35년 상환이 필요한 것이 아닌 2,3년 정도의 시간으로 구매가 가능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여생 남은 시간을 기준으로 구매력이 생기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데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게 그런거다.

결국 노동자가 노동을 멈추는 순간, 체제와 우리 사이의 대차대조표는 완전 반대가 된다. 체제는 그들이 차압해놓은 우리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부채로 떠안게 된다.

 

TC는 말한다.

"국민들이 평생 참고 살았고, 훨씬 더 여러 해 동안 감당해야 했을 대차대조표를, 체제는 단 일주일도 견딜 수 없었다는 게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가 발명(특허 신청해서 팔았단다.ㅋㅋ)한 '시간 팔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발명(?)할 수 있을 것인가?

 

 

* 사진 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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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6 18:14 2006/11/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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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10 20:53

누구나 한번쯤 거친다는 사춘기(思春期).

10대때 겪는다지만, 그닥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한자만 보면 봄에 관심을 갖는 시절? 살짝 확장하자면 성(性)에 관심 갖는, 인생의 시작에서 인생이나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게되는 시절 정도인가?

 

그래도 대부분 '사춘기'하면 무슨 현상인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으나 마냥 불안하고 불완전해보이고 어른이 되기 전에 겪는 무슨 관례같이 느끼기 마련이다.

 

최근 현대미술계는 예전처럼 야수파니 인상파니 라고 경향성을 짚어내기 힘들 정도로 포스트모턴하고 비제도권적 문화에 관심이 많나보다.

이번 전시는 제도에 편입되기도 싫고 주변부에 맴돌고 있는 이 시대 작가들의 상황과 인생의 '사춘기'라는 시절의 공통점을 잡아내고 있다.

동시에 성숙이라곤  눈씼고 찾아보기 힘든 이 사회에 대한 사춘기적 징후에 대해서도 슬쩍 내보이고 있다.

 

 

임민욱의 [뉴타운 고스트](2005)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초록색 세모인 새마을 깃발엔 '새마을'이 아니라 '뉴타운'이 적혀있다.

깃발 옆에는 '입장하신 후 반드시 출입문을 닫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문이 있는데, 문 자체가 작품인 것 같기도 해서 열어도 되는 지 잠시 갈등하게 만든다.

그래도 열어봤더니만 역시 빙고! 

벽면 하나 가득 야외공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트럭 위에서 두사람이 영등포로터리를 한바퀴 돌며

끊임없이 흐르는 드럼의 비트와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자기독백적 말들에서 엄청난 파워가 느껴진다.

외치는 내용은 도시 개발하듯 자신의 얼굴을 상대로 새마을 계획을 하는 내용.

"살기좋은 내 얼굴 우리 함께 만들어요~"

개발에 묻힌, 결국 개발이 아닌 개발을 하고만, 그리고 하고 있는 그런 세상.

 



최민화의 1993년 [분홍-개같은내인생]

두 명의 남자가 해변가에서 소주병을 부여잡고 있다. 7,80년대 한 시절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분홍색에 뒤덮힌 채 점점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은 밝지만 왠지 서글픈 느낌이다.

 

 

 

오형근 작가는 사춘기로 추정되는 10대 소녀들의 사진을 찍었는데, 

은 인물들은 매우 거대하면서도 화면 주도력도 없고 그저 배경과 전혀 융화되지 못한 상태라고만 느껴진다. 마치 자신 이외의 모든 세상과는 엄청난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진희 17세](2003)는 아름다운 소녀의 무표정한 모습이 거대하게 배치되어있다. 배경은 있지만 마치 그녀만 따로 오려붙인 듯 괴리적이다.

[강소영 16세]는 한강변의 그녀가 역시 거대하게 있지만 [한진희 17세]보다는 인물이 화면에 잘 녹아있는 듯 하다. 오히려 구름이 일부러 만들어진 느낌.

 

배영환의 [유행가](2000)는 잘 짜여진 쇠창살 뒤로 바닷가에 노니는 젊은이들의 영상이 비추어지고 있다. 흘러나오는 'Knockin' on the heavens door'.

이렇게 사춘기는 마음 한켠에 갇혀있는 것?

 

서도호의 [나/우리는 누구인가?](1996)는 60벌의 교복이 5열로 나란히 서있다. 그 빽빽하게 빈틈없고 천편일률적인 배열 속에 개인은 없다.

이 속에서 과연 나, 우리는 진정 '나, 우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일까?


 

 

배영환의 [청춘](1999)이란 작품은 위장약을 본드로 덕지덕지 바른 글자들이 표현되어있다.

글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영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들을 잡으리'

 

왠지 위장약, 본드, 솜 같은 것들과 진탕 어울려 막 사는 인생이 하루라도 있어야 청춘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는 듯 하다.

 

장지아의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둘째, 모든 상황을 즐겨라!](2000).

머리에 침을 뱉고 계란을 던지고 사정없이 쥐어박히는 모습, '모든 상황을 즐기기'엔 너무나 폭력적이다. 장지아는 일상에 퍼져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 성폭력에 대한 일종의 역설을 행하고 있다. 으... 오래 보고만 있어도 기분 상당 나빠짐.-.-

 

 

 

박진영의 [변두리의 여름방학](2004)은 정말 신비한 느낌의 사진이었다.

강가의 두 소년이 서있는 모습인데, 강가에 흐르는 강물이 마치 산 정상에서 지나가는 구름떼를 보는 것 같다.

 

[추석 귀성차량과 외국인 노동자 메르씨와 그의 딸](2003)은 좌우로 긴 사진의 가로 길이만큼 늘어져 막혀 있는 교통 체증이 보이고 그 옆길로 자전거에 딸을 태운 메르씨가 보인다.

왠지 여유로운 메르씨들이 원하는 곳에 먼저 도착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새침한 와이피의 [새침랜드](2006)는 한 벽면 가득 거대한 아크릴 벽화가 그려져있다. 화산 폭발을 배경으로 여러 에피소드의 그림이 강렬한 색상으로 채워져있다.

때론 손목이 잘린, 눈(eye) 속에 다시 사람의 모습이 거듭되는, 뱀과 벌레 등등...

독특한 캐릭터가 정말 인상적이다.

 

 

 

플라잉시티의 [블록스터디#2 - 사춘기](2006)도 꽤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10년간의 서울 각 구별 아파트 값, 시세, 실업률, 주택종류, 월평균소득, 장만 기간 등을 구조물로 형상화하였다. 역시 용산과 강남 아파트 시세는 월등하구만.ㅋㅋ

 

 

 

김홍석의 [와일드코리아](2005)는 16분간의 영상인데,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총기를 지급하고, 얼굴이 빨갛다는 이유로 사상범으로 몰려 사형당하기도 한다.

폭력이 일상화된 현실.

 

 

진부해보이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현실적, 구체적이면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도 눈에 띄어 재미있었다.

폭력, 부동산 과잉, 본드나 약, 시대와 동떨어져가는 개인 등을 통해 점차 농후하게 퍼지는 이 사회의 사춘기적 징후.

 

 

그런데 작품 수가 너무 적어.  좀 돌다보니 끝이었어. 아쉽다 아쉬워...-.-

 

 

*사진출처 : 로댕갤러리(http://rodingallery.org) 팜플렛을 스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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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10 20:53 2006/10/10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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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7 20:01

jineeya[SEMA - 임성수의 드로잉들] 에 관련된 글.

 

떠오르는 작가들의 눈으로 세상의 사회문화적 이슈를 쟁점화하고 이를 통해 미술문화 발전을 조망하려는 전시회, Selected EMerging Artists(SEMA). 올해로 2회째 맞이한다.

 

정글 선샤인(Jungle Sunshine), 아스팔트 키드(Asphalt Kid), 무명씨의 대화(An Anonym), 멀미(Nausea), 일탈(deviation)-꿈꾸는 사물들, 내러티브 스피킹(Narrative Speaking)  의 6부문으로 나뉘어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정글 선샤인(Jungle Sunshine)

약육강식의 정글인 현대사회.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유머러스한, 유머를 통한 고통의 소통을 꾀했다고...

 

박은선의 [제 녹용을 받아주세요].

그 아래 초코파이는 자신의 몸뚱아리 절반의 초코파이를 바치고 있다.ㅋㅋ


이 작품도 '받아주세요' 시리즈 중 [제 간을 받아주세요].

 

고영미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시리즈. 긴장감 넘치는 전장의 한 순간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나신의 그녀에게 집중되는 포화는 매우 절망적이지만, 그 절망의 크기에 비해 그녀의 포즈나 위치는 너무나도 한가롭게까지 느껴진다.

 

 

최준경의 [핑크정글]은 잘 꾸며진 도심의 한 건물 같은 곳에 성매매업소를 연상시키는 분홍빛이 내비친다. 그 내부엔 정글의 상징인 나무가 슬쩍 보이지만 과연 이 잘 짜여진 건물 틀 안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질 지 은근히 두려움이 생긴다.

 

 

박은선의 [경례하는 용봉탕]과 [묵념]. 곧 사람 입으로 먹힐 것들이 경례라든가 묵념을 하는 등 사람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 왠지 '못할 짓을 한 것'같은 기분이 들게 만든다.


 

 

이연미의 [으악새]는 피 흘리는 으악새를

정글의 승자같은 위용을 보이면서도 결국 멸해가는, 게다가 단상에 놓인 구경거리화되어가는 존재로 표현하는 듯하다.

 

 

이주연의 [페이퍼맨의 궁전]은 매트릭스에 갇히고, 심연 속으로 놓여진 다리에서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간 쥐 마냥 무표정하게 달리는 페이퍼맨들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달리는 페이퍼맨들은 '반지의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부하들같다. ㅋㅋㅋ

 

원 모양의 페이퍼맨들은 가운데 구심으로 믹서에 갈리듯 갈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뷁!

 

 

아스팔트 키드(Asphalt Kid)

분자화된 개인들이 구획된 도시를 더이상 자아의 한계가 아닌 놀이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함유된 병적 징후를 마치 유전인양 몸 속에 내재한 사실에 대해 표현하고 있단다.

 

김정주의 [The City]는 실제 도시가 아니라 스테플러 심으로 만든 인공의 도시를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그야말로 불필요한 잡것들은 하나도 없지만 동시에 소용되는 것 역시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권순학의 [Last Winter Night of 2006]은 익숙한 공간에서 눈을어지럽히는 익숙치 않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무명씨의 대화(An Anonym)

이 부문은 익명화된 현대인들의 평면적, 표피적 소통, 그럼으로 인한 획일화된 익명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박상희의 [긴의자 흰테이블]은 개인들간의 정서적 거리를 극대화함으로써 소외된 개인들을 표현하고 있다.

 

황은주의 [엘레노이-내 손을 잡아줘]가 주는 메시지 또한 비슷하다. 동일한 공간들에 존재하지만, 극단적인 위험에 처한 사람들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대중들.

 

 

멀미(Nausea)

멀미는 빨리 돌아가는 세상과의 거리를 인간적으로 바꾸려는 지성적 시도를 보이고 있단다.

 

장유빈의 [기대]는 마치 자살토끼를 연상케 하는 작품. 사회를 대하는 공포가 느껴진다.

 

도영준의 [컷터카멜레온]은 작품의 함의보다 작품의 독특성 자체가 눈에 띈다. 분명 카터인데 그 위에 움직이는 카멜레온의 모양을 영상으로 쏘아주어 매우 특이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이경아의 [들어오다]는 덫에 갇힌 인형과 집들이 칸칸이 단절되어있는 모습을 보인다.

 

늑대너구리의 [개념]. 전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형상화된 개념. 그저 벽돌 한덩어리일지도 모르는 바로 그 '개념'. 사람의 머리속을 어지럽히는 개념은 이렇게 단순할 지도 모른다.

 

 

 

멀미의 전시장 말미 출구에 전시된 [한미 FTA 즐쳐드삼]. 잘 쳐드삼.^^


 

일탈(deviation)-꿈꾸는 사물들

일탈은 사물을 통한 잠시의 여유, 휴식을 추구한다.

 

임선이의 [shelter-landscape]는 인조잔디, 아스팔트 선인장이라는 삭막 그 자체의 소재를 가지고도  은근 따스한 느낌의 작품을 연출해내고 있다.

 

 

오진선의 [아스팔트 연못-명륜동]. 생각보다 너무나 아름답다.

 

 

 

이혜진의 [Love house 부동산]에선 그림같은 집을 무료 분양한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다. 실제 관객들은 분양 청구서를 직접 써넣고 가기도 한다.

 

 

 

 

내러티브 스피킹(Narrative Speaking)

작가가 일상에 치중하다보면 작품은 그저 일기에 지나지 않는 것. 따라서 일기에 회화적 내러티브를 반영하고 여백을 주어 관객으로 하여금 화폭간을 가독하게 만든다.

 

권순영의 [新세한도] 중에서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풍속도의 형식을 빌어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보배스러운 어린이와 쓰레기스러운 어른들.

 

홍인숙의 겸손한 피눈물 그리고 가족자화상 가운데 [신끼에 가까운 이해심-엄마].

엄마는 머리 줄기와 꽃이 필 정도로 엄청난 이해심의 소유자로 표현된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

 

 

 

SEMA는 사회문화적 이슈에 대한 쟁점화를 말하고 있지만 확실히 일상에 그 기운을 다 쏟는 느낌이 극명하다. 소외, 고독, 분절화는 이미 진부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 이상은 수박 겉 핥기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약간 진부하다.

 

사적 영역에 대해서도 -예를 들어 가족에 관해서도- 문제점 제시 수준에 머무는 것 같은 느낌.

기왕 사회문화적 이슈에 대한 작가의 시선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젠 매우 단순하게 사회문화적 이슈 자체에 대해 반영해보는 건 어떨지?

아니면 초우주적 수준으로 뚫고 나가보던가?

나도 못하는 주제에 일단 질러봤음....ㅋㅋ

 

* 사진출처 : 직접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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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7 20:01 2006/10/0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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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7 20:00

jineeya님의 [SEMA - 진정한 쟁점화까지 한걸음 더] 에 관련된 글.

떠오르는 작가들의 눈으로 세상의 사회문화적 이슈를 쟁점화하고 이를 통해 미술문화 발전을 조망하려는 전시회, Selected EMerging Artists(SEMA)
2회째.

 

아스팔트 키드(Asphalt Kid) 부문의 임성수 작가 드로잉이 재미있는 게 많아서 따로 포스트!

 

[Sewing Machine]. 미싱을 돌린다기보다 노란 줄로 굴비 엮듯 엮여있는 느낌이다.

생산물이 복제가 아니라 노동자 자체가 복제물인양...




[Reckless Little Ted Bear].

어느날 세상에 적응 못한 곰에 대해 일제히 공격을 취하는 그림 하단 곰의 탈을 쓴 사람들. 곰의 눈은 이미 미쳤지만, 인간원숭이들의 눈은 crazy를 넘어 맛이 갔다.


 

 

어디 가나 똑같은 얼굴,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마음, 똑같은 생각.


 

 

 


 

 


 

 


 


 

 

그래.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구멍이 뻥뻥 뚫려있는 존재들이 아닌지...


 

 


 

 

자신을 위로하는 진정한 손은 결국 자신인가?


 

 

세상에 대한 두려움, 그가 느끼는 두려움으로 인해 보는 이에게 발생하는 또다른 두려움.

두려움의 재생산, 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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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7 20:00 2006/10/0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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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4 16:23

잭 런던의 장편 소설이되 잭 런던만의 장편소설이라하기엔 좀. 쓰다 만걸 후대의 로버트 피쉬가 완성시켜놓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뒷 부분은 스릴러일 뿐이다. 사실 이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앞부분에 촘촘히 다 짜여져있다.

그가 -비록 완성하지 못했으나- 썼던 이 소설은 꽤 의미심장하다.

 

 

 

내용은 간단하다.

 

옛 맑스주의자들이 만든 암살단.

주로 들어오는 의뢰는

뭔가 꾸미려하지만 항상 어설퍼서 실패하고마는 아나키스트들 대신 사회의 악을 처단하고,

'아나키가 한 일'이라고 떠들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 많다.

이들은 처단할 대상에 대해 실제로 '사회의 악인가?'라는 점을 냉정한 평가를 통해 판단한다.

평가 후 처단이 결정되면 1년 안에 처리하는데, 혹시 못하게 되면 의뢰인에게 대가를 다시 반환한다.

 




어느날 그들의 존재와 방식은 그릇되었다고 생각한 한 젊은이가 암살단의 지도자를 만나 지도자의 목숨을 의뢰한다.

젊은이는 그들의 존재 자체의 모순과 암살이 주는 사회의 위기에 대해 수준높고 열띤 구라구라를 통해 풀어나가고, 지도자는 결국 그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젊은이는 '이제 암살단이 해체되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지도자는 스스로를 처단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온 조직망을 동원하여 자신의 처단을 명한다.

 

갑작스레 지도자의 대리가 된 젊은이.

그가 만나게 되는 조직원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능통하고 고상하고 순수하고 논리적인 이성을 지닌 지식인들이다.

그들의 이치에 맞는 한 무슨일이든 충실하게 따르는 조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이치에 너무 충실하여 조직원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된 지도자.

 

보기엔 그냥 '미친놈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고지식함의 사슬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동네에서 '빨간약을 먹었다'며 좌절하는 네오의 후예들을 몇명 보긴 했어도

솔직히 운동의 역사도, 계보도, 계파도 하나도 모르니

'네가 뭘 안다고?'라고 한마디 들을 수 있겠으나,)

 

마치 원리원칙에 갇혀 끝내 자멸해버리는 일군의 좌파를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진정성이라면

충분히 그들과 공명할 수 밖에 없는 측은지심이 발동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게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말이다.

여자 캐릭터는 남자들 이어주는 물건에 지나지 않아 살짝 기분 나쁘지만

어떻든 소설로써의 박진감 자체도 만만치 않은 글.

 

* 그림출처 : 알라딘(http://www.alad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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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4 16:23 2006/10/0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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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10/01 21:44

개럭키스님의 [믿거나말거나]

물들래님의 [일민미술관,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에 관련된 글.

 

"현대미술은 나의 취미"

이런 생각을 가진 작가는 미술관에 박물관을, 백화점을, 시끌벅적 시장을, 온갖 물품 공장을 옮겨왔다.  일명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보통 전시장에 가면 정신을 집중하여 느낌을 받으려 노력하지만 이번 전시는 다르다.

그냥 재미있는 물건들이 쌓여있는 근처 골목들을 뱅뱅 돌고 있는 기분이다.

우리는 밟고 있는 세상을 무한생산되는 공산품 속에 쓰레기로 만들고 있지만,

하찮은 쓰레기도 의미를 부여하면 사람이 즐기는 아름다운 기예, 즉 예술이 되는 법.

 

사람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역시 아름답다.

그러나 쓸쓸함을 넘어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도곡동 유여사가 보낸 화환..ㅋㅋ



 


 

 

 


 

 


 


 

 


 

 


 

 

 


 

 

 


 

 

복수할거야...질 수 없어...누군가 날 보고 있어

 

돈 좀 있어?...지켜볼께...잊지 않아

 


 

 


 

 


 

 


 

 

 

 

제목 '마씨' ㅋㅋ

 

 


 

 

꽤나 수준 높은 수집가의 방 한켠같은 느낌.

 

역시 나무는 사진으로 봐도 머리가 상쾌해진다.

 

 

* 사진출처 : 직접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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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01 21:44 2006/10/01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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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9/08 15:55

프랑스와의 수교 120주년 맞이 각종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대림미술관의 [프랑스 현대패션 사진전]도 그 일환.

패션 사진전이다보니 '옷 구경이나 실컷 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갔는데, 그래도 역시 방점은 '사진전'에 있었다.

유명해보이는 잡지 사진이나 패션모음집 등에 사용된 것들이라지만 꽤 볼만. 왠지 우리네 패션잡지보던 때의 마음가짐과 전혀 다르다고나할까?

그냥 남의 나라 거라니 신비해보여서냐?(ㅋㅋ)

아님 우리나라에선 맛보기 힘든 문화 자유, 문화 풍성, 문화 해방감의 차이인가?

 

사라 문의 ['보그'걸을 위한 수영장 작업](1983)은 왼쪽 개를 통해 내뿜어지는 動적 이미지와 오른쪽 소녀를 통해 발현되는 靜적 이미지가 개끈이라는 끊어질 듯 위태로운 한가닥 선으로 연결되어져있다. 훤히 보이는 개의 얼굴과 그늘에 가려진 소녀의 얼굴 대비도 인상적이다.




 

 

['보그'영국판을 위한 소니아리켈](1976)에서는 정장입은 애꾸눈 고양이에게 차를 권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연출되는데, 코믹한 설정과는 달리 과묵한 표정들이 마치 피카소의 삐에로를 보는 애처로움을 자아낸다.


 

사라 문이 찍은 작품 중 가장 독특했던건 [웨딩드레스 '보그')(1984)였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못 구하다니 안타까움.

무엇으로 통할 지 모르는 벽의 거대한 구멍(좌)과 반드시 삐그덕거릴 것 같은 계단(우)사이에 웨딩드레스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모니터와 카메라의 모습이 사진 안에 그대로 담겨져있다.

벽의 못에, 옷걸이에 걸린 웨딩드레스는 마치 결혼의 무게라도 되는 양 축 늘어져있는데, 실제 사람이 진짜로 걸려있는 듯 한 모습이다. 거기에 계단 쪽의 문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웨딩드레스를 가리려는 듯 도사리는 모습이 암울함을 더하는 듯 하다.

 

['노바'를 위한 인간 - 거울작업](1971) 역시 매우 흥미로웠는데, 거울 앞뒤 몸통에 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삼각형의 꼭지점을 이루듯 서있는데, 서로의 거울을 통해 서로를 비추는 형상이 마치 그들의 거울이 서로를 마음 속에 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거울이 없는 여인 앞에서 '서로의 마음에 서로 품기'는 끝이 나버리지만...

 

[이세이 미야케를 위한 테레사 스튜워트](1995)는 적흑의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인데, 옷이 마치 거대한 꽃과 같다. 벽과 나란히 서있는 그녀를 비스듬히 찍은 것이 역동성을 더하는 듯 하다. 이런 풍의 사진이 몇개 있는데, 모두 포르말린 냄새가 날 듯 과도하게 인공적이다.

 

 

사라 문의 작품 중에 [해부적 구조](1997)는 인체의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옷 모양새가 마치 인체의 내부를 투시하고 있다. 옷을 입었지만 X-ray를 찍어놓은 느낌.

 

작품들 중에는 사진끼리 이미지 연결이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샤넬](1990)은 단정히 서있는 모델의 나부끼는 치마폭이 인상적이고, [오스텐드](1990)는 거대하게 몰아치는 파도와 한갈래 길 같은 둑방이 있는데 이 두 작품은 파도와 치마폭의 실루엣에서 서로 느낌으로 연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은 데보라의 [무제_'Parco'를 위한 풍경](1981) 9개의 사진 중 한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이 세여인이 등장하는 시리즈는  총 3장인데,

첫번째 사진은 세 여인이 모두 무표정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는 거였다.

아래 사진은 두번째 사진인데 오른쪽 끝의 여인 표정이 어느새 매우 강렬. 가운데 여인이 곁눈질로 의식하고, 왼쪽 여인이 이미 상황을 알지만 피곤한 듯 무시하는 표정이 뭔가 긴박감을 더해준다.

 

이 사진 다음의 세번째 사진은 사진 각도가 오른쪽 여인에게로 넘어왔는데,

왼쪽 두여인과 오른쪽 여인 사이의 창틀이 어느새 문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마치 감정의 골이 더이상 회복할 수 없는 차단의 상태로 치닿고 있음을 나타내는 듯 하다.

 

프랭크 페랭의 [데필레 028](2004)는 엄청나게 큰 원형 무대에 K2나 미국 권투무대를 연상시키는 천장의 조명들 아래 워킹 중인 세 모델을 나타내는 데, 정말 인간이 자잘해보인다. 마치 SF의 한 장면같아보이기도 하고...

 

 제라르의 [꿈의 파브릭_아브라함폴햄 1999 봄/여름 오트 쿠튀르](1999)는 처음엔 두 남자가 잡고 있는 손이 옷을 벗길 듯 말듯 해서 불안정해보였지만, 살짝 보인 모델의 웃는 입술이 상황을 마치 정지상태로 만든 것 같다.



 

장 라리비에르의 [신기루-"씨티즌 K를 위한 패션" 시리즈](2001~2)는 마치 환타지 소설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아래 사진은 가위를 들고 날고 있는 여성들이 마치 마녀인 양 보이지만 왠지 공포스럽지는 않다.

신기루시리즈는 희한하게도 무서운 또는 무표정과 과장된 원근법, 위험해보이는 물건(가위) 때문에 위협적으로 보일 것 같지만, 사용된 요소와는 전혀 다르게 굉장히 코믹스럽고 유쾌해보인다.

 

 

아래 사진도 신기루 시리즈 중 하나인데, 눈감은 살아있는 줄인형, 다가오는 가위, 망망대해인지 호수인지가 폭풍 전야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죽음 또는 종말을 앞둔 줄인형 모델의 표정이 아이러니하게 참 고요하다.


 

프랑소와즈 위기에의 작품들도 흥미로웠는데, 구도가 정면이 아니라 항상 비뚤어져있고 모델이나 옷이나 기타 찍고 싶은 것들의 일부가 반드시 잘려있다. 위기에는 르포기자 출신이라서 극적이고 일시적 화면을 담고자했다고 한다.

 

 

패션 사진은 '대중문화의 가장 예민한 센서'라고 한다는데,

굳이 말하자면 보이는 세상 반쪽 문화의 센서같다.

이 세계는 더러움이란 없다는 듯 정돈, 깔끔, 인공, 가식, 조작된 아름다움, 조작된 행복, 관리된 풍요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는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행, 불행이라던가, 만족, 불만족이라던가, 흥분, 냉정이라던가의 일관된 감성 정의가 힘들다.

그 세계로 인해 나는 역시 풍부한 감정을 겪게 된다.

 

그들의 세계는 다들 아는 知의 세계같지만 생각 외로 未知의 세계다.

마치 영화 [콘스탄틴]에서 현실과 지옥은 동떨어진 게 아니라 바로 같은 세계를 다르게 본 것 뿐이었던 것처럼...

 

* 사진출처 : 대림미술관(http://www.daelim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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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15:55 2006/09/0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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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9/02 14:21

pannella님의 [롭스 & 뭉크 전시회]

사뿐사뿐.Idolog님의 [뭉크&롭스전] 에 관련된 글.

 

이 전시의 부제는 [남자와 여자]이다.

그러나 제목에 [악마/돼지와 여자]라고 적은 건 남자는 안보이고 그 자리에 악마와 돼지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악마주의를 세상 종말의 징후로 보고 이를 이끄는 존재를 여자라고 생각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대하는 21C 여성인 나에겐 

관람 내내 그게(남자) 그걸(악마와 돼지)로 보이는 야릇한 체험 상태였지만...ㅋㅋ

확실히 부제 [남자와 여자]는 표현 상 어폐가 있을만큼 '남자'가 안보인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마치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의 경계라도 되는 것 같다.

 

창부정치가(1896)

 



남성이 되어 즐겨볼까하다가

괜히 좁은 속에 '지들이 세상 망쳐놓은 주제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외침이 머리속을 메아리치고 있는 지라,

그냥 편하게 여자인 내맘대로 해석하고 즐기기로 했다.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작가들이 관찰의 대상인 여성(뭔가 남자와 달라 인간이 아닐 것 같은)을 그린 동안,

나는 그들의 그림에 표상된 여성이 되어 악마와 돼지들의 세계를 보고 있었다.

 

 

롭스는 책 속 삽화 그림을 많이 그렸던 것 같은데 이 작품 [주술] 역시 옥타브 위잔의 [여전하] 中 '마법의 거울'편에 수록된 삽화이다. 별 설명없어도 무슨 분위기인지 척보면 알만한 상황. 여성에 대한 화가의 전형적인 시각을 볼 수 있다.


 

 

[사탄-골고다]는 롭스의 사탄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인데, 예수의 모습을 한 악마와 그 아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목졸리고 있는 여성이 보인다. 

사탄 연작은 악마주의의 도발을 새로운 위기로 받아들이고 육체에 대한 두려움을 표시했다는 데, 시리즈중 [사탄-제물]이 참 인상적이었다.

사탄의 몸통이 사탄을 나타내는 데 주로 쓰이는 소 두개골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주변부에 날아다니던 천사를 패러디한 해골모양의 아기악마들, 오~ 압권.

 

 

롭스는 어릴 때부터 인물을 캐리컬쳐화하는 걸 좋아하고 썩 잘했다고 한다.

이 작품 [발론지방의 장례식] 역시 인물을 희화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장례 진행중인 신부가 너무 가까이 얼굴에 갔다댄 성경을 보면서,

언젠가 보좌관이 써준 글을 있는 그대로 교과서 읽듯이 읽던 국회의원이 떠올랐다.

 

 

[악녀- 범죄의 기쁨]도 '악녀들'이라는 시리즈 중 하나인데 역시 소설 삽화로 쓰였다고 한다.

남성을 꼬신 여성이 메두사상에서 키스하는 동안 남성에게 버림받은 여성은 상 아래서 캬라멜 녹듯 녹고 있다. 롭스는 '이미 악마는 지배하고 있고 여성을 매개체로 사용한다'고 했다던데, 그림 상으로만 보면 어찌 그 결과의 가혹함 또한 다시금 여성의 몫이 되는지...

 

사실 악녀들 시리즈 중에는 [악녀들-돈후안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신의 여성이 뭉크의 [사춘기]에서 본 소녀의 자세와 비슷하게 살짝 겁 먹은 듯, 울먹이는 듯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리고 돈후안이라고 추정되는 남자는 온 몸을 망토로 가린 채 흐릿하게 뒷편에 보인다. 마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 베일을 선호하는 모습, 악마같은 대체물로만 발현되는 모습을 상징하는 느낌이다.

 

 

롭스의 그림이 상대적으로 화려한 반면 뭉크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칙칙하기 이를 때 없다.

그러나 이 그림 [마돈나]만큼은 다르다. 그림 속 그녀는 사랑스러운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며, 육체적이면서도 정신적인 존재이다. 그녀는 매우 매혹적이면서도 뭉크가 꿈꾼 순종적인 여성의 이미지도 동시에 내재하고 있다.

한편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아기와 정자들은 여성과 모성을 동시에 표상함으로써 그녀를 완벽한 '마돈나'로 만드는 데 성공한 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에 오히려 이 그림은 많은 여성들이 섹스할 때마다 겪게 되는 임신에 대한 공포를 극단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다.


 

 

[흡혈귀II]는 뭉크의 여인에 대한 피해의식, 선입견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래서 심지어 자기 자신을 여성의 제물로 바치고 있다.

 

이 작품[골목길]은 그린 이의 의도와 나의 받아들임이 완전 반대인 대표적인 경우인데,

화가는 숨 막힐 듯한 골목길에서 여성이 마치 남성을 희롱하는 듯 상징적인 구도와 포즈로 묘사한거라고 큐레이터가 적어놨더라.

그러나 나는 아무리 봐도 권위적 남성성이 극대화된 완전 정장 차림의 수많은 남자들이 골목을 만들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한가운데인지라, 그 여성이 희롱당하기보다 희롱하고 있다는 게 참 믿기기 어려운 상황 판단이다. (선입견 과도?ㅋㅋ)


 

 

'여성은 악마의 공범자이며 남성이 저지른 모든 살인 , 범죄 , 혐오는 여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했다길래

그림 안의 여성들이 일정 정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자 권력도 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현실과 똑같네.

여전히 여자는 악마가 될 수 없었고 그저 악마의 시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만으로 어떠한 처벌과 수치와 모욕도 모두 받아 마땅한 존재이다.

 

적어도 나에게 그림의 안과 밖은 같은 세상이다. 마음 편히 숨어들거나 거만해지거나 평정심을 유지하거나 내가 '나'로 있을 만한 공간은 극히 드물다.

만국의 여성들은 한(恨)으로 승화하려나?

 

* 그림 출처 : 덕수궁 미술관 http://www.deoksug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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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2 14:21 2006/09/02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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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만화영화책 - 2006/06/17 21:50

여러 주인공들을 시켜 감정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영화는 수습하는 데 한참을 헤매게 된다.

그러다가 감정선 하나라도 놓치면 진짜 별볼일 없는 영화가 된다.

처음엔 그런 영화가 아닌가 싶었다.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부부 중 부인이 아프게 되고,

건물 관리인인 한 남자는 건물에 근무하는 근사한 여자를 - 남모르게 - 쫓고,

한 고등학생은 채팅으로 만난 동성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다 바람맞게 된다.

 

그러다가 그 여인, 쳉이 은근슬쩍 화면에 끼어든다.


 

 



쳉은 어릴 때부터 귀가 먹고 눈이 먼 사람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어려울 듯 보이는 그녀는 그러나, 화면 안의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학교의 선생이다.

그녀가 등장할 때는 배경음악이 전혀 없다.

그녀가 말하지 않을 때, 즉 그녀가 타인과의 소통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녀의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흐른다. 처음엔 '영화 자막 잘못 나온 것 아니야?' 싶을 정도로 고요 속에 흘러가는 것이라곤 그녀의 움직임과 자막뿐이었다.

감독은 마치 그녀가 사는 고요의 세상을 맛보게 해주려는 듯 하다.

 

 

이렇게 열정적이지만 고요의 바다에 사는 그녀의 삶이 지나가는 중간중간,

아프던 부인은 죽었지만 남편A는 부인을 위한 식사를 여전히 준비하고 있고,

거의 스토커 수준으로 쫓아다니던 관리인B는 드디어 그녀를 위한 편지를 준비한다.

자신을 버리고 남학생에게 가버린 연인을 위해 여고생C는 끊임없이 문자를 보낸다.

 

아, 짧은 시간안에 흩날리는 감정들...

게다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가슴 먹먹한 감정들이다.

도대체 이 영화는 어떤 결말을 준비해놓고 있길래 이렇게 가슴의 응어리를 계속 쌓게 만들어 놓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 영화랍시고 중간에 '뚝!' 끊 듯 끝나버리면 '그저 그런 영화 봤다'며 화낼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렇게 영화는 결말을 내야 하는 시간에 가까워가고 있었다.

 

A는 우연한 기회에 부인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쳉에게 먹이게 된다. 그리고 쳉은 생전 처음 본 A지만 그에게서 받은 음식의 기운을 그녀 특유의 행복한 기운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그런데 희한하게 그 순간 A는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부인이 오랜 시간 곁에 머물길 애원했으나 부인은 편안한 긴 잠을 소원하였고, 실제 그렇게 하였다.

아무리 희구하여도 얻을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이제 A는 '보내야함'을 매우 매우 확실하게 깨닫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완벽하게 깨닫는 이 순간은 쳉에게서 행복의 기운을 받은 바로 그 순간이다.

쏟아지는 서러운 눈물의 A를 쳉은 소리없이 보듬어 안아준다.

 

한편 B는 결심의 결심을 거듭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그녀에게 전하러간다. B를 한번도 보지 않은 그녀에게로 가는 길, B는 신바람이 나지만 스크린을 쳐다보는 관객들에겐 위태 천만 그 자체이다.

C는 역시나 자신을 버린 연인에 대한 미련을 접어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정을 날려보내던 핸드폰을 옥상에서 바닥으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핸드폰과 함께 자신도 날려보내고 만다.

그런데 C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행복의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던 B와 쿵!

B는 사방에 번지는 자신의 선혈 속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편지를 보며 죽어갈 수 밖에 없었고,

B와 부딪치는 바람에 '죽음'이라는 선택을 완수하지 못한 C는 병원에 실려 새로이 인생을 시작해야하는 처지를 맞이한다.

 

결국 A,B,C 모두

아무리 애틋했던 감정도, 절절했던 소원도,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였고,

그들의 감정을 추스리려는 노력은 무엇하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숨막히게도 영화는 이렇게,

늘어놓기 시작한 감정선들을 느려보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고 확고하게 정리한다.

 

씨네21의 어떤 글을 보니

고요하게 감정을 뒤흔들어놓고는 배경음악도 안깔아줘서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괘씸해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도 외치거나 울지 못하게 만들면서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게 만든다.

그리하여 느끼게 되는 먹먹함, 뭔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의 소용돌이,

그러나 감독은 '그게 사는 거'라고 '그렇게 사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느날 A,B,C 모두 (B는 확인할 수 없겠군-_-)

인생의 모든 경험과 감정과 노력을

쳉과 같이 행복의 기운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게 되길 빌며...

그러나 지금의 가슴 아픔 또한 일생에 여러번 갖기 힘든 소중한 감정임을 잊지 말길 바라며...

지금의 이 가슴 저릿함, 꽤 오랫동안 내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 출처 : 씨네21(http://www.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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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17 21:50 2006/06/1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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