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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산오리님의 [삶, 그리고 죽음....] 에 관련된 글.

그러니까 7월 30일이었구나,

가족들과 함께 강릉으로 가는 막히는 길위에 있었는데

과기노조 이광오 동지가 전화를 했다.

 

시설안전기술공단 최현 동지가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교회 갔다가 연구소 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자유로에서

아마도 졸음운전을 한 것 같다고,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아, 최현 동지, 파업 때 열심해 했던...?

예, 위원장님도 잘 아실걸요, 문선대도 하고, 얼굴 갸름하고

빼빼하게 생긴...

 

이름은 바로 알아들었는데

얼굴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런 낭패가.

 

2003년 봄과 여름, 94일동안 전면파업을 했던

시설안전기술공단 조합원 동지들 백 이십여명은

이름이나 얼굴은 어지간히 익히고 있었는데

최현 동지의 얼굴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다니...

 

여러 동지들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긴 했는데

그 중에서 최현 동지라고 생각되는 얼굴은 없다.

 

내 몫의 조문까지 이 동지에게 부탁하고

강릉에 도착한 밤 12시에 다시 이 동지의 전화를 받았다.

 

-스키드 마크도 없이, 중앙분리대를 그대로 들이받았다네요.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끔찍하고 참혹한 사고냐...)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답니다.

(이 아이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2003년 파업 때 체결한 단협에

업무상 재해와 유족보상에 관한 것이 잘 되어 있는 편이고,

이사장도 오고, 사용자도 적극적으로 사고 수습에 나서고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대전 도착했는데 잠이 안올것 같아서 소주나 마시러 왔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나도 한잔 할텐데...)

 

그리고 이틀 후쯤이었나,

강릉에서 속초로 가는, 짜증나게 막히는 길 위에서

불현듯 최현 동지를 떠올렸다.

여러 동지들의 얼굴이 나란히 우르르 나타났다.

그 얼굴들 뒤에서 미남형의 매끈한 얼굴 하나가

처음으로 불쑥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아아, 그리고는 다시 사라졌다.

다른 동지들의 얼굴이 그 앞에서 어른거린다.

분명히 그 얼굴이 최현 동지의 얼굴인 것 같은데,

왜 다시 안나타나는 거지?

눈을 감고 머리를 굴리며 끙끙거려도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얼굴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참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었다.

그 다음날에도 그랬고 그 다음날도 그랬다.

떼지어 나타난 얼굴 뒤로 한 얼굴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여러 날-

그러다가 지난 주말부터는

다른 모든 얼굴들이 다 사라지고는

오직 하나의 얼굴만 나타난다.

비로소 내가 떠올리는 그 얼굴이 최현 동지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제는 바빠서 하루가 그냥 지났고,

오늘 아침에 시설안전기술공단 박 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최현 동지의 사진 하나 보내달라고 했다.

유족보상 등등 사고 후에도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만만치 않을테니

막히는 일이 있으면 함께 고민하자고 했다.

(나는 연구소에서 두 명의 노조간부를 각각 교통사고로 잃었고,

유족보상을 둘러싸고 사용자와 싸워서 성공한 적이 있다

한번은 1심 재판까지 갔었지만...)

 

지금, 지부에서 최현 동지의 사진이 왔다.

지난 열흘 가까이,

나의 뇌리에서 날이 갈수록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떠올랐던 바로 그 얼굴이다.

처음부터 기억해내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당분간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될듯하다.

 

고 최현 동지의 명복을 빈다.

 




1. (2003년 06월 18일 23시 36분 48초)

 

주말에 고민하다가 월요일 아침에 대강 정리해서
건교부 장관을 만났을 때 전달했던 얘기 중에서,
공단 파업의 특징에 대한 부분...

= 공공기관(정부출연기관)으로서는 드물게 장기파업
→ 6월 16일 현재 64일 경과.

= 단체교섭의 생산성 극히 낮음
→ 파업 직전까지 합의사항 전혀 없음.
→ 파업 60일 임박해서 13개 조항 합의.

= 높은 조직률과 높은 파업 참가율
→ 파업 이후 조합원 증가
(노조설립시 102명 파업돌입시 122명 현재 128명).
→ 책임기술자 대부분이 조합원.
장기파업에도 불구하고 파업이탈자는 단 1명.

= 노조의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투쟁
→ 장기파업으로는 드물게 일체의 점거, 폭력, 파괴행위 없음.

= 사용자의 공세적 요구
: 사용자만의 일방적 요구 20여개 조항.
: 규약에 정할 ‘조합원 범위’를 단체교섭에서 요구,
: 인사(제도)에 관한 사항 전면 배제,
: 단체협약 내용을 형식과 내용이 전혀 다른 '노사협의회'로 이관 주장 등

= 사용자의 불법적 직장폐쇄
: 공격적 성격, 노조 파괴 의도(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비조합원 선별 출입 허용)

이렇게 줄줄이 떠들어대는데,
장관의 표정은 태평스럽고 한가하기만 했다.
화물연대 투쟁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던 그 장관이 맞기는 맞나?
허.무.한.면.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징조가 여실하더라.
믿을 것은 역시 조합원들 뿐이라.
초심으로 돌아가서 싸우자고 역설하는 지부장의 연설에
고개를 끄덕이던 동지들이 고맙다.

 

2. (2003년 06월 18일 23시 44분 24초)

 

오늘 하루 겪은 일을 몇 줄 적는 것으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대강은 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전면파업 66일차,
새벽에 건장한 청년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사설경비업체에서 불러들인,
우리는 쉽게 '용역깡패'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날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다가 경찰의 호응이 없자
이사장이 택한 방법이 바로 사설경호원 고용인 셈입니다.
대여섯명의 어깨들이 오늘부터 현관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합원들의 화장실 출입까지 막았습니다.
조합원들은 순순히 물러섰습니다.
물리적 충돌을 피하라는 노조의 방침이 확고했으니까요.
직장폐쇄라는 이름으로(그것도 법리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부분 직장폐쇄!)
노조의 파업권은 형편없이 제약되고 있습니다.
공단의 영토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일체의 대화는 없다, 그래서 노동부(의정부노동사무소)의
사적중재마저 사용자는 거부했습니다.
노조는 진작부터 동의했던 일입니다.
그동안 습관적으로 공단의 1층 화장실을 이용했던
조합원들이 직장폐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화장실을 들락거렸다가
무더기로 경찰에 고발당했습니다.
오늘 현재 출석요구서가 발부된 조합원이
무려 33명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본부의 간부 3명을 빼면
128명 중 30명이 고발당한 셈입니다.
그리고도 오늘 추가로 고발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고발자가 늘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일산경찰서 담당자가 고발 내용을 보고 피식 웃기만 했다고 하더군요.

공단의 이사장은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틀 후에는 40-50명의 사설경호원들을 고용하여
공단 앞마당에서 노조 사무실 대용으로 쓰고 있는 천막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들을 일제히 철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왜 당장 철거하지 않구선? 했더니
내일 단병호 위원장께서 노조를 방문한다고
하루를 미뤘다고 합니다.
그런 소식을 전하는 사설경비업체의 팀장급 어깨가 하는 말이
"조합원들이 살짝만 부딪혀 와도 자기들은 뒤로 자빠진다,
그리고 입원하면 그만이다, 회사에서 월급도 나오고,
합의금도 따로 받고, 일거양득 아니냐" 그랬답니다.
어쩝니까, 이번 금요일, 그러니까 모레가 되면
조합원과 사설경호원들이 한바탕 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칫 크게 충돌이라도 하게 되면,
노조가 불법파업을 해서 그랬다고 하겠지요.
그리고 그게 빌미가 되어 경찰이 쉽게 쳐들어올 수도 있겠지요.

대수롭지 않게 느끼실 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사문제의 자율적 해결이 이리도 어렵습니다.
노조가 직장폐쇄 이후 물리적 충돌을 애써 자제하고 있는데도
사용자가 사설경호원들을 동원하여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그게 빌미가 되어 또 고발되고 경찰이 투입되고
이런 것이 빤히 보이는데,
그것을 예방하지 않고, 적어도 그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노조에게 불법 행위 하지 마라, 빌미를 주지 말라,
하고 얘기하는 이른바 제3자들의 충고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얘기란 말입니까.

내일 저는 우리 노동조합의 전임자들과
민주노총의 고양지구협의회 동지들에게
용역깡패들의 난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20일(금요일) 공단으로 총집결하자고 호소해야 합니다.
아무도 몰래 고향의 동생들을 불러서
이사장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라고 얘기하는
한 조합원의 얘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3. (2003년 06월 21일 06시 14분 43초)

 

새벽 4시쯤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어지러운 꿈 꾸며 잠에 빠져들었는데
조금 아까 5시 40분에 전화가 왔다.
사오십명의 철거 전문인 듯한 용역깡패들이 와서
천막에서 잠자고 있던 우리 수석부위원장을 포함한
5명의 간부들을 집단적으로 짓밟았고,
천막과 현수막들은 모두 망가졌고,
현관을 경비 중이던 또다른 용역들은
그 광경에 질려서 도망갔고
그 중에서 일부가 폭력현장 목격자 진술을 하겠다고 나섰다고 하고
그래서 일단 우리 간부들은 대화동 파출소로 가서
폭행당한 진술서를 쓰는 중이라고 했다.
무조건 사무실로 달려왔다.
우선은
동지들 모아 일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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